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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커뮤니티와 성폭력

 

 

텍스트:  퀴어 커뮤니티와 성폭력 # 잇을 / 배경이미지: 시멘트 벽 위에 "#METOO"라는 문구가 여러 글에서 오려 붙인 듯한 낱자들로 적혀 있다.

 

 

 

 

잇을 / 언니네트워크

*이 글은 언니네트워크 및 무지개행동 반성폭력교육TF에서의 논의를 정리했다.


 

성폭력을 주로 암수범죄라고 한다. 신고부터 여전히 극히 적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성소수자라면 더욱  그런 것 같다. 많은 성소수자가 성폭력피해 상담전화를 걸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할 것이다. 미지의 상담원이 성소수자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람일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없이 자신의 성폭력 피해경험을 경청하여 줄지 두렵다. 상담을 해도 성소수자임을 밝히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기도 한다.

 

<한국 LGBTI 사회적 욕구조사(2014)>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성소수자 3,208명 중 레즈비언의 64.3%, 트랜스젠더 여성의 59.7%, 트랜스젠더 남성의 68.5%가 성폭력 및 성적 괴롭힘이 ‘자주 또는 종종 일어난다’고 응답했다. 다수의 성소수자가 성폭력 피해를 겪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가족부 성폭력 실태조사>나 성폭력상담소의 상담통계 등에서는 성소수자 대상의 성폭력이나 성소수자 간 성폭력이 파악되지는 않는다.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고 가해자의 대다수는 남성이라는 점만 파악이 가능하다.(<2017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 전체 상담 2,118회(1,414건) 중 피해자는 여성이 94.5%, 가해자는 남성이 94%) 성소수자 단체에 상담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이 경우에도 총 상담건수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알려진 사건들

 

성소수자운동은 여성가족부가 ‘성소수자는 양성평등기본법의 정책대상이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내고 지자체 양성평등기본조례에 개입한 것을 비판해왔다. 그리고 양성평등정책이 중요하게 주목하고 있는 성폭력, 가정폭력 문제에서 성소수자를 떼어내지 말고 성소수자의 경험을 파악하고 대응할 것을 주문해왔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해 정신병원 강제입원, 교정 강간, 학교와 직장에서 성희롱을 경험하고도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편, 성소수자운동 안에서 성소수자의 성폭력 경험을 가시화하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그만큼 수반되어 왔는지 통렬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알려졌다. 2017년, 무성애 가시화 행동 무:대(구 에이로그 팀),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행자, 팟캐스트 프로젝트 승냥이FM, ACE STORY, (구)논모노로그,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에서 활동해온 (전)활동가 케이의 착취, 횡령, 성추행과 데이트강간이 공론화되었다. 2017년 10월 행성인은 케이의 강연을 취소했으나 취소의 정확한 이유, 공식입장과 후속처리는 공표되지 않은 상태였다. 2018년 3월 여성의 날을 앞두고 비판이 다시 제기되었고 반상임활동가가 다수의 성폭력 사건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특히 행성인이 성폭력을 방조하고 묵인한 점이 강하게 비판받았다. 이후 행성인은 조정위원회를 통해 성폭력 피해를 신고 받는다는 공고를 올리고, 사과문과 함께 대외 활동을 잠정 중단하였다.

 

성폭행, 성추행이란 우리나라 사법기관이 유권해석으로 밝힌 바와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을 유발케 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은 물론, 행위자의 의사, 행위의 태양, 발생한 결과, 피해자의 의사, 신체적 혹은 정신적 조건, 행위자와 피해자와의 관계, 주변의 상황, 당시의 사회구조, 경제 및 교육수준, 신분관계 등에 따른 당사자간의 위계의 존재나 정도 등을 아울러 전방위적으로 검토하여 그것이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 내지는 위해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바, 여기에서 사람의 의사라 함은 확정적이고 사전적인 의사는 물론 사후적인 의사나 불확정적인 의사 또한 상대방이 예견할 수 있는 정도를 고려하여 참작되어야 할 것이고, 피해자의 의사결정에 행위자가 개입한 정도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이를 앞서 밝힌 피해자의 진술과 비교하면 피징계자는 피해자들에 대하여 신체접촉 또는 성행위의 동의 여부와 의사를 고의적으로 묵살하거나 기존에 견지하던 태도와 의사를 자신의 교육수준이나 사회구조적 위계를 이용하여 교란하고 자신의 의사에 따르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형식적인 동의 의사를 무리하게 표시하도록 한 바, 피임기구를 사용하지 않은 성행위와 기타 신체접촉 등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고 봄이 상당하며 이는 각 성폭행, 성추행으로 평가될 수 있다.

- 여행자 171110 징계3 결정문 (18.01.14 공개)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는 성폭력을 포함한 인권침해와 공동체에서의 배제, 인권단체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것에 대해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지하시는 모든 분들, 그리고 행성인을 믿고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행성인 운영위원회는  (1) 행성인 회원이었던 케이 전 퀴어활동가의 성폭력과 노동착취, 횡령 등 인권침해 가해 문제제기에 대한 단체의 미흡한 조치, (2) 반상임활동가(현재 직무정지 되었고, 조정위원회에 회부되어 있습니다)이자 전 사무국장인 활동가의 성폭력 가해 사실에 대한 방조와 묵인, (3) 현 성소수자노동권팀장의 성폭력과 주취폭력 등에 대한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지하는 분들의 문제제기를 통해, 문제제기의 대상이 된 회원 뿐 아니라 행성인의 조직문화와 구조에도 폭력을 용인하고 묵인하도록 만드는 잘못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사과드립니다 (18.03.17 게재)

 

두 사건은 활동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활동가/회원에 대해, 가해자가 상대적으로 지위와 힘을 이용했다고 보인다. 이들 사건은 ‘좁은 성소수자판’에 큰 충격과 상처를 남겼고, 반성폭력에 대한 더 깊은 고민과 교육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안팎에서 높아졌다. 이후 대학 성소수자동아리나 작은 규모의 단체 등에서도 성희롱, 성추행, 위력을 이용한 성폭력 사건들이 공론화되었다.

 

‘소수의 예외’로 남겨진 성폭력

 

‘남성간 성폭력’은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남성 대상 성폭력 사례에서 가해자가 남성인 경우가 82.8% 여성인 경우 10.2%, 성별을 알 수 없는 경우는 6.9%를 차지했다. <군대 내 성폭력 실태조사(2004)> 및 다수의 사례에서 남성 가해자는 이성애자로 정체화하며, 피해자에 대해 권력의 우위를 확인하고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성폭력을 저질렀다고 보고된다. 이는 성폭력이 ‘권력과 불평등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는 예시로도 종종 언급된다.

 

그러나 성폭력의 기저에 있는 핵심권력이라고 지목되는 ‘젠더권력’이 동성 간에도 작동하는지,  성소수자 간에는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다. 우리는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저지르는 성폭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수를 차지한다는 걸 알지만, 그러므로 남성이 남성을, 여성이 남성을, 여성이 여성을, 성소수자가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은 모두 ‘소수의 예외’로 남겨둬도 되는지, 우리의 지식과 이해를 어떤 방식으로 더 넓혀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누구나 성폭력 피해를 겪을 수 있지만 그 ‘누구나’는 90% 이상 여성으로 상상되고, ‘남성에 의한 여성의 피해가 전부는 아니’라는 말은 그 ‘전부가 아닌’ 사건 앞에 공허해진다. 나는 반성폭력을 중요한 가치로 두는 회사에서 성희롱을 경험한 적이 있다. 만약 가해자가 남성이었다면 성희롱임이 분명했겠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정체화하는지를 떠나서) 둘 다 여성이라고 간주할 때 그 관점은 쉽게 간과되었다. 이성애자 기혼여성이 한 몸매평가는 성적인 의미가 없거나 적다고 간주되고, 그러므로 사소하게 취급된다. 같은 행동도 여성이 했다면 무서울 것도, 못 견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많이 겪었다. 정말 여기에 젠더권력이 없으며, 그러면 성폭력이 아닌 걸까?

 

등잔 밑을 밝혀야 할 때

 

간혹 여성긴급전화 1366에서 성소수자 단체에 전화해 피해자가 성소수자인데 어떤 지원을 해야 할지 묻는 일이 있다. 1366은 피해자가 ‘성소수자니까’ 성소수자 단체에 자문을 구하고, 성소수자 단체는 ‘성폭력피해자니까’ 성폭력지원기관에 도움을 구한다. 그래서 성소수자인 성폭력피해자를 위한 별도의 지원체계가 필요하다거나 어느 쪽이 이 문제에서 전문성을 차지해야 하는가를 논하자는 건 아니다. 성소수자 단체가 성폭력 문제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남성 가해-여성 피해 중심의 성폭력 담론을 어떻게 참고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호소를 접해왔다. 일반적인 성폭력 매뉴얼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도 받았다. 그런데 선행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상대가 원하지 않은 성적 언행은 성폭력’이라는 명제에서 ‘원하지 않았고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 ‘성적인 것’의 의미를 얼마나 토론해왔는가? 대개 성폭력을 안다고 여기면서도 잘 접근하지 못하는데, 담론의 한계가 아니라, 기존의 논의부터 수용하고 소화하지 못한 데 주된 원인이 있다.

 

성소수자 성폭력을 가시화하고 그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한다. 무엇을 성적 침해라고 느끼고 문제화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와 성폭력을 인지하는 감각이 연관관계를 갖는다면, 그것을 탐구할 때 젠더와 섹슈얼리티, 성폭력에 대해 더욱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서 ‘성적욕구를 표현’하는 것이 어떻게 때때로 성폭력과 이어지는지 그 맥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등잔 밑까지 환하게 밝혀야 하는 때가 왔다. 우리가 그 불을 붙여야 한다.

 

 

폐쇄성과 특수성이라는 알리바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퀴어 커뮤니티는 다소 폐쇄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이는 조직 자체를 경직되게 하기 쉽다. 사회의 공고한 성소수자혐오는 그 자체로도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이지만, 커뮤니티가 폭력에 대응하는 데 취약하게 만든다. 피해자, 가해자, 그 주변인 모두가 ‘다른 데 가면 되지’ 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문제제기는 더 어렵고, 이 공간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하고 방어적인 심리는 성폭력 피해 은폐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될 수 있다.

 

사회는 비규범적 섹슈얼리티와 성폭력을 구분하지 않고 처벌한다. 바꿔서 말한다면 많은 성폭력이 그저 일탈적인 섹슈얼리티로 왜곡된다. 퀴어커뮤니티에도 성희롱과 성추행을 ‘플러팅’, ‘성적 신호를 보내는 행위’ 정도로 여기며, ‘제약 없는 성적 언동’이 문화적 특징으로 수용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일부 존재할 것이다. 커뮤니티가 닫혀 있는 점은 이 기대가 고질적으로 지속되는 데, 다른 구성원을 성적으로 침해해도 비판받지 않는 데 기여한다. ‘아웃팅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적지 않은 성폭력이 일어나는 만큼, 강간 가해자를 고발한 것이 ‘아웃팅’이라는 비난도 적지 않다.

 

그러나 ‘특수성’이라는 알리바이는 힘을 잃어간다. 점점 더 많은 성소수자가 페미니스트로, 성평등운동의 주체로 선언하고 있다. 성적으로 친밀한 동시에 불편하지 않고, 불편함을 표현했을 때 그것이 존중받는 커뮤니티를 기대한다. 게이문화중심성, 상대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정체성/의제에 대한 편견과 희화화를 경계하고,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감하고 성장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기대한다. 이런 변화 앞에, 커뮤니티의 ‘특수성’은 당연히 전제되기 이전에 ‘왜 달라야 하는가?’ 라는 예리한 질문을 받는다. 성급한 알리바이는 내부를 성찰하는 대신 외부적 요건만을 탓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량의 부족이 아니라 원칙의 부재

 

성폭력 해결절차가 없다. 사건조사, 가해자징계, 피해자회복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도 모른다. 절차가 있어야 기록도 남으니, 문제제기는 늘 ‘처음’이고 당혹스럽다. 성폭력이 있을 때 어디서 어떻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정보가 없고, 기존 지원체계가 낯설어서 활용하지 못하고, 상담기관에 연계하지 못한다. 징계 내규만 있을 뿐 징계의 의미, 조직의 책임범위에 대한 토론은 드물다. 이는 역량과 자원의 부족으로 설명되지만, 사실은 원칙의 부재라고도 할 수 있다.

 

조직의 역량을 재평가하고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량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그 역량을 원칙에 맞게 배분하고 정의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원칙의 공백이며, 우리의 한계다.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데 무능한 조직이기에 피해자는 부담을 감수하고 공론화를 선택하게 되며, 조직은 급작스럽게 여론에 압도된다. 일상적으로 논의하지 않던 주제를 토론에 부치니 성폭력 피해사실을 적시하게 되며, 여지 없이 2차 피해가 일어난다. 구성원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규약이 있어도 효용을 찾기 어렵다. 사후 약방문. 그저 남는 것은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안타깝게도, 가해자를 영구제명한다고 해도 조직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구제명은 오히려 조직과 개인이 함께 책임지지 않고 가해자에게만 문제를 전가하는 가장 무책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당장의 비난을 모면하고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실적으로 지금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지 제시하고 신뢰감 있게 소통하는 것, 작더라도 행동으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은 모습이다. 그러려면 주위에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우선해야 한다.

 

구조적 장치 마련과 기준점 세우기

 

커뮤니티에 갓 진입했을 때 겪은 성희롱을 시간이 흐른 뒤 문제제기 했을 때, 그 사이 쌓인  위치와 관계 맥락이 겹쳐져 해당 사건을 공정하게 판단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활동 경력도 권력이 된다는 점에서, 왜 곧바로 문제제기하지 않았는지 의심할 게 아니라 조직문화 점검이 먼저다. 소수에 의해 많은 활동이 진행될 때 ‘활동을 주도하는 사람’이 갖는 권력은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권력이 명시적 지위, 물리적 힘만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얻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난 권력이 없다’거나 ‘어쩌라는 거냐’고 항변하기보다는 잘못된 권위와 권력의 행사에 경각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

 

또한 정보와 결정권한이 집중되지 않도록 대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공동의 노력,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기간, 활동량, 커밍아웃의 폭과 인맥 등 서로 다른 위치와 자원에서 오는 격차를 돌아보고 견제하는 구조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과제다. 성과주의를 내려놓고 자기돌봄과 휴식을 독려하는 연습, 때로는 일에 공백이 생기는 것도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공백이 재충전이고, 반성이고, 내부에 당연히 존재하고 있을 갈등을 돌아볼 수 있는 쉼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일하지 않은 위치, 경험, 정체성이 공존하므로 논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지만, 정신없이 내달리지 않는 조직, 쉼표가 있는 조직일수록 그 과정에서 서로 상처입히는 일도 적다. 좋은 토대 위에 뼈대를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름 붙지 않은 폭력’이 성폭력으로 수렴되는 현상은 사실 자연스럽다. 반성폭력운동은 성차별을 문제시하고, 남성중심적 문화를 배격하고, 성적 불평등을 쟁점화하는 운동이다. 즉 사회가 폭력이 아니라 ‘성’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폭력으로 명명해왔고, 성폭력을 엄격하게 정의해서 ‘어디까지는 괜찮다’고 말하는 방향으로 흘러오지 않았다. ‘성폭력인가?’ 의문이 떠오를 때 이를 ‘조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바꿔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전투’가 아닌 학습의 계기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쉽게 버리지 않고 천천히 평등을 뿌리내리기

 

퀴어 커뮤니티의 성폭력 사건에서 많은 성소수자는 피해자이자 침묵한 방조자다. 그 자책을 헛되게 증발시키고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 성소수자 단체들, 그리고 단체들의 연대체인 무지개행동은 성폭력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배울 수 있는 장을 여는 시작 단계에 있다. 대응은 항상 사건 뒤에 올 수밖에 없는 걸까? 몇 박자 늦었더라도, 그러니 더욱 더 우리가 서로를 성장시켜야 하고, 그 과정에 질문과 비판이 아낌없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공동체적 해결’에 해답을 척 내놓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퀴어커뮤니티 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이란 ‘커뮤니티를 부수지 않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커뮤니티는 허울을 위해서 사람을 버릴 때 부서진다.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피해자에 대해서도 가해자에 대해서도 선을 긋고, ‘피곤하게 하는 사람’,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라고 딱지 붙일 때. 성급한 자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제대로 경청하지 않고 사람을 함부로 이용할 때. 그건 알맹이를 다 버리는 일이다. 그러니 ‘잘 해결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을 버리고 가치를 버리면서 성폭력을 잘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는 평등하지 않다. 평등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안온하고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지향점일 것이다. 평등을 담보하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노력과 앞으로 해나갈 노력뿐이다. 피해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경청하고, 가해자의 주변인이라면, 그를 감싸는 것이 그를 위해서나 모두를 위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새기며, 무책임하게 가해자를 옹호하고 부추기기를 중단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정도 잘못은 넘어가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라는 안이한 생각이 실상 우리 자신을 얼마나 모욕하는지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등을 재고하고, 평등을 뿌리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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