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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 / 웹진 <글로컬포인트> 기획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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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일이다. 어느 생매매 업소 밀집 지역에 붙었다는, 이내 ‘삼촌들’(업소를 운영하는 남성들)이 떼어 버렸다는 대자보 한 장이 화제가 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썼듯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이 붙은 이 대자보는 “저는 성매매를 하는 여성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저는 성매매를 하는 여성입니다. 요즘 ‘안녕들 하십니까’가 정말 유행이기는 한가 봅니다. 성매매를 하러 온 구매자 남성이 자신도 자보를 썼다며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더군요. 거기에 제대로 호응하지 않았다고 주먹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돈을 냈으니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논리에 구타 당하고 욕먹고 성병예방도 할 수 없고 수치스러운 말들을 듣고 내가 성매매 하는 여성이라는 걸 알고 강간하려 하는 사람들. 돈의 출처는 묻지 않고 그저 돈 벌어오라고 하는 사람들. 결혼도 안 한 여성이 산부인과 드나든다고 경멸하는 눈초리. 쉽게 돈 번다고 마냥 욕하는 사람들[,] 성매매 한 번에 몇 십만원을 지출할 수 있는 남성들의 재력은 묻지 않고 여성에게만 욕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괜찮지 않습니다. 낙태를 하고도 돈을 벌기 위해 쉬지도 못하고 오늘도 성매매를 하러갑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싶지 않습니다. 나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나도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을 깎아 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냐는둥 하고 말이다. 저 대자보를 의심했던 사람들, 혹은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페이지를 일방적으로 삭제했던 페이스북1 등을 생각하면 “나도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저 말은 쉽게 먹혀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2016년의 “#○○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이어 2018년 초 “미투(Me too)”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성폭력 고발 운동 가운데 유독 논란거리가 된 것이 있었다.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의심과 비난이 따라붙곤 하지만) ‘진짜 피해자에게 사과하라’, ‘미투의 본질을 흐린다’는 식의 ‘악플’이 몰렸던 그 게시물은 다름아닌 성판매 여성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밝히는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지의 글이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을 깎아내리려는 것이라는 의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반응이 다시 한 번 반복된 것이다.
그 페이지에 종종 달리곤 했던 ‘닥쳐, 이 창녀야’ 수준의 댓글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저러한 반응들은 한국에서 성판매 여성이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한국에서 여성 일반이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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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판매 경험을 묘사할 때엔 ― 인신매매를 비롯한 직접적인 강요를 당한 것이 아닌 경우에도 ― ‘성매매로 내몰렸다’는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건강을 비롯한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안전조차도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매우 낮은 수준의 협상력 만을 가진 채 일하게 되는 것이므로 내몰렸다는 말은 적지 않은 경우 적절해 보인다. 제도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며, 구매자나 관리자의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는 점 등에서 모두 말이다.2
그러나 이 당연한 말을 조금 더 뜯어 보기로 하자. 성판매 행위의 비범죄화를 비롯한 몇 가지 조치들로써 나아질 수 있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임금을 받지 못했을 때, 폭행을 당했을 때, 휴일을 보장 받지 못했을 때, 혹은 이 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상해를 입었을 때, 신고할 수 있고 국가가 구제 조치를 취한다면 저 ‘내몰림’이 지금과 같이 출구 없는 형태의 내몰림은 아니게 될 것이다. 여기에다 이를테면 복지제도 같은 것을 통해 저 열악한 환경을 택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줄인다면, 어쩌면 문제는 해결된 듯 보인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성판매의 조건이 있다. 바로 성적 규범에의 극단적인 종속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사이즈’나 ‘스펙’ 혹은 ‘마인드’와 같은 은어들은 특정 형태의 외모나 순종성 등 사회가 그리는 성적 규범으로서의 ‘여성성’이 성적 거래의 현장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남을 보여준다. 또한 이 여성성이라는 것에 순종성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한, 이것은 순종의 거부에 대해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됨을 잊지 말하야 할 것이다.
한국과는 다른 여성성 관념을 가진 사회가 있다는 점을, 혹은 한국 내에조차 주류적 관념과는 다른 어떤 것을 가진 그룹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성 문화 일반의 층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일 테다. 어째서 성판매는 단순히 성적 행위 ― 예컨대 다양한 형태의 성교 ― 를 판매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인 순종’을 함께 판매하는 일로서 존재하는가? 구매자의 폭력은 어째서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그다지도 쉽게 정당화되고 타인들의 (‘성판매 여성은 자신의 성을 내어 놓은 것이므로 성폭력 피해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식의) 언어로 다시금 반복되는 당연한 현상으로서 존재하는가?
달리 말하자면, 어째서 성판매는 인격의 판매로 치환되어 이해되는가? 성을 산 것은 곧 인격을 산 것이므로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생각은 어떤 토대를 갖는가? 성이 인격을 대표할 정도로 중대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일까. 많은 남성들은 그의 성적 수행들이 비규범적일 때조차 그의 삶 전반이 부정당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예컨대 성범죄를 저질렀을 때조차 사회적 지위에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그보다는 여성의 인격이란 성 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성’이 아닌 다른 영역(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구매할 때,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든 여성을 고용할 때, 같은 일이 반복된다. 업무의 종류나 수준에 상관 없이 여성이 ‘직장의 꽃’이 될 때, 노동자 여성에게 업무상 필요한 노동이 아니라 여러가지 성적인 (혹은 성별화된) 노동들 ― 식사나 다과 준비부터 웃음 짓기에 이르기까지 ― 이 요구될 때, 성적인 폭력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일로 이야기 될 때. 그리고 이것은 다시 한 번, 고용 관계 바깥의 다른 모든 관계들에서 반복된다. 성적인 수행들을 연인·배우자 여성에게 의무로 부과할 때, 혹은 여성의 모든 행동을 (종종 거절의 표시마저도) 성적인 신호로 읽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면 성판매 여성이 성판매 과정에서 겪는 폭력들, 폭력으로 불리지조차 못하는 여러 강압들은 이 사회 전반에 횡행하는 성적 폭력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성판매 여성이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일 뒤에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단순히 성매매라는 현상을 없애야 한다는 결론(만)이 아니다. 기어이 성매매라는 현상을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그리고 그와 같은 원리를 갖고 있는 이 사회 모든 곳에 있는 이들이, 성으로 제한되지 않는 인격을 되찾을 길을 탐색하는 과정으로서의 성판매 노동 조건 변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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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판매 여성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신고조차 할수 없다’는 문제 의식 이상의 지점에서, 성판매 노동 조건을 바꾸려는 시도와 미투 운동 일반3이 만난다는 뜻이다. 성폭력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은 몇 가지 특정한 행위들을 금지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성은 인격체가 아니기에 성적으로 정복해도 좋다는, 역으로 성 이외의 인격이란 없기에 성적으로 정복하면 모든 인격을 지배한 것이라는 관념에 기반한 성폭력 일반에 저항하는 운동으로서의 미투 운동은 결국 성폭력이라는 개개 행위들을 고발하고 처벌하려는 운동이 아니라 성에 대한 관념 전반을 바꾸는 운동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안희정의 성폭력 혐의를 다루는 법정의 재판관은 “정조”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법조문에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 사회의 굳건한 기둥으로 남아 있는 그 단어를, 여성이 지키고 가꾸어야 할 유일한 것으로 성(적 순결)을 말하는 그 단어를. 그러나 성 이상의 것이 아닌 여성이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여성이란 그를 소유할 남성을 위해서만 지켜질 가치가 있으며 그 남성이 요구할 때 언제나 전적으로 바쳐져야 하는 것임을 말하는 그 단어를 말이다.
‘미투 운동’ 앞에서조차 반복되어 입에 오르는 이 “정조”라는 말은,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여성을 비난하는 데에 동원되어 왔다. 그처럼 성이 여성 인격의 전부인 이 사회에서 성을 내어 놓은 성판매 여성은 곧 스스로의 인격을 포기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성판매 여성의 말하기를 의심하고 성폭력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그에 맞서 성을 파는 일 ― 저들의 말로, 정조를 지키지 않는 일 ― 이 곧 인간임을 포기하는 일이 아님을 말하는 실천들은 곧 이 사회 모든 영역에서 여성이 지켜야 할 것 ―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여성이 거주하는 사회가 지켜야 할 것 ― 이 정조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서의 여성임을 말하는 실천들일 것이다. 때로 다른 이름이 붙고 때로 다른 취급을 받는 이 실천들은, 실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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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은 2017년 8월 일방적으로 페이지를 삭제했다가 수일만에 1200여 명의 항의 서명이 모이자 별다른 해명 없이 복구 조치를 취했다. 페이지 주소는 https://www.facebook.com/성판매-여성-안녕들-하십니까-184300758649712/ 운영자 이소희가 페이지에 게시한 글들과 다른 필자들의 글을 엮은 책으로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도서출판 여이연, 2018)가 있으며(이 책은 1쇄를 낸 후 절판이 결정되었는데, 절판 경과에 대해서는 fb.com/gynotopia/posts/1930658413693709 참고) 이외에 성판매업 종사 당사자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페이지로 “성노동자 대나무숲”(fb.com/sexworkersbamboo), “모던바 근무자의 업무일지”(fb.com/bar0000alba) 등이 있다.
- ‘개인의 가장 내밀한 영역을 타인에게 내어보여야 한다’는 식의 말은 의식적으로 배제했다.
- 성판매 여성의 미투와 구분되는 일반 미투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미투 일반’이란 성판매 여성의 것을 포함한 모든 경우의 미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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