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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20
    오늘, (1)
    하노이
  2. 2007/04/19
    <버스를 타자>와 뒷담화에서,
    하노이
  3. 2007/04/17
    머리로는 아는데.
    하노이
  4. 2007/04/02
    내 청춘의 영원한, (2)
    하노이
  5. 2007/03/20
    2007/03/20
    하노이
  6. 2007/03/14
    움찔움찔,(3)
    하노이
  7. 2007/03/11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
    하노이
  8. 2007/03/09
    이럴 때 말이야,(1)
    하노이
  9. 2007/03/06
    대추리와 나(7)
    하노이
  10. 2007/03/05
    오래된, 오래될, 부탁.
    하노이

오늘,

 

 

 

오늘

'장애해방가'를 들을 수 있다면,

엠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서

3년 전, 2년 전, 1년 전과 마찬가지로,

'노동으로 일어설 기회마저 빼앗긴 형제'가 아니라,

'동지'로 부르는 걸 들을 수 있을까?

 

문제인건 알겠는데

바꾸는건 어찌 그리 어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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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자>와 뒷담화에서,

 

 

*

 

이리가라이에 대한 집담회가 끝나고 나서

알 수 없는 흥분과 끈적한 충만함,

그리고 나로 시작해서 지구 맞은 편까지 뚫어낼 듯한 공허함에 사로잡혀서,

 

 

단대에서 진행하는 420 교양 자리에 가기로 했다.

(언제든지) 보고 싶은 얼굴들도 있고

<버스를 타자> 영상물을 본다고 하기에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거의 기울고 있었지만

집담회 후의 공허함이 한 몫한 것도 틀림없다.

 

 

새내기 때 보고, 2학년 새내기 새로 배움터에서 본 영상인데.

새터에선 기억이 거의 없고 새내기 때엔

숨죽여 울었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이번엔, 그냥 '거리'란 걸 두고 보고 싶었다.

이전과 좀 '다른' 것들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

 

 

정말 나는 뻘쭘해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4월실천단장이 후배이고,

기껏해야 보이는 같은 학번이라고는 단대 학생회를 하는 사람과

그를 벗어난 둘, 셋 정도의 사람들인,

'새내기에 초점이 맞춰진 듯한'

이런 자리에 참여한다는 게 '내겐'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제쳐두고라도

어쩐지 자리가 불편하다.

 

집담회부터 같이 있던 언니를 꼬셔서

-언니한테 쪼꼼 미안했지만 언니랑 같이 있으면 내가 덜 불편할까봐-

같이 가서 영상물 시작을 기다렸다.

 

("언니, 새내기가 삼수를 해도 내가 언니란 사실이 실감이 잘 안나.."

"받아들여..")

 

 



 

영상물은, 모처럼 보게 되는 익숙한 얼굴들이 새삼 반가우면서도 가슴이 뜨끔뜨끔했다.

 

다소 이전보단 담담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건,

이전에 이 영상물을 봤던 때 이후에

내가 겪었던 어떤 경험들과 이 영상물이 너무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큭

 

 

어쨌든,

그래도 같이 보는 언니님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내 안으로만 침잠하는 건

가까스로 벗어나서 영상물을 봤다.

 

 

그냥

비단 이 영상물에만 국한되는 생각들은 아니지만,

전경들, 경찰들과의 몸싸움 장면들.. '끌려가고' '맞고' '때리는' 그런 장면들..

은 정말 혼란스럽다.

나오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거나,

그럴 필요 있나 하는 생각에 보려고 하다가도 너무 깝깝하다.

이걸 왜 보여줘야만 하나. 보여줘야 한다면 이유는 뭐고, 어느 정도의 길이가 '적당'한가.

그 상황에서도 어떤 장면들을 담아야 하는 건가.

새삼 저상버스를 처음 타게 되는 분의 환한 미소를 담은 장면이 더 소중하게 와닿는건..

이런 생각과 관련이 있을까 없을까..

 

수많은 집회에서의 발언 장면과 공무원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성별을 시각/청각적인 정보(외모, 목소리..등)로 파악하면서

괜시리 한숨이 나오고, 어쩌다 등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에 더욱 눈이 가는 건 뭐..

 

딴 소리지만 대체 행정부에서 면담은 왜 있는건지.. 보여주기식이 아닌 면담들이 있는건지.. 궁금해졌다 정말..

 

*

 

영상물을 보고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문득 궁금해져서

몇십분만 앉아있으려던 것이

 

조금씩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타이밍을 못잡기도 했지만

나름 재미있기도 해서 마칠 때까지 있어버렸다.

 

어쩌면 영상물을 본 것보다 더 .. 날 흔들어놓은 자리일지도 모르겠다.

 

새내기들이 느끼는 듯한 발화의 압박과,

내가 보기에 마찬가지로 어떤 2학년들에게서 느껴지는 발화의 의무에 대한 압박이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

나 역시 포섭되어 있으면서도

어떤 3학년들에겐 '이젠 발화 자체의 의무에 대한 압박보단 자기 위치를 통해 스스로를 더 객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내가 나에게도 하는 그런-기대를 눈치껏 보내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다 나누고 난 다음에,

내가 있던 조에서 사회를 봤던,

sh씨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미안"하다고 말해버렸다.

그런데, 그게 계속 떠오른다.

대체 뭐가 미안했을까... 하는... 미안하다고 말한 그게 더 미안한 건가 하는.. 그런.

 

 

 

 

 

-

 

 

포스트 쓰는 거 어렵다.

글 쓰는 거 어렵다.

내 생각을 하는 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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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아는데.

 

4월 30일과 5월 1일에 시험이 연속으로 잡혀버렸다.

4월 30일은 별 무리 없지만(?)

5월 1일 오전이 참 애매해서,  

혹시나 바꿀 수는 없을까, 따로 시험 볼 순 없을까 해서

선생님에게 슬쩍 물어보았는데,

내가 가고 싶은 게 있다고 말을 하자,

 

"학생에겐 공부가 제일 우선이어야지!"

라고 하시며 단칼에 내 말을 잘라버리셨다.

 

공부를 하기 싫은 게 아니고-무려 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고 있는 요즘인데..-

나도 지금은 그게 우선이어야 할 것도 같은 마음은 들지만,

그게 잘 안되는 걸 어떡하라고오요@_@!!!

 

라고 짜증이 뭉클뭉클 온 몸을 감싸고 돌았지만..

 

선생님의 그런 명쾌한 말이 내게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걸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은 건지.

 

마구 헷갈리니까

나한테 짜증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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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영원한,

 

*

 

도서관 안에서 노트북을 켜서 검색을 하다가,

블로그의 음악이 스피커로 쩌렁쩌렁 흘러나와서 당황하며 음소거시켰다.

나도 모르게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다가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이거 원, 죄송해라.

 

 

*

 

검색했던 것은 최승자의 <내 청춘의 영원한> 이란 詩다.

최근의, 지금의 내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 같아서 이 시가 떠올랐는데 

전문을 외우고 있진 않으므로

네이버의 도움을 받았다.

 

 

*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문득 모든 것이 두려워진다. 내 주위를 둘러싼 나와 관계한 모든 것들이. 내 세계가..

요즘 계속해서 '어서 빨리 늙고 싶다, 지금보다 더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이상으로, 심정적으로, 늙고 싶다는 생각을 왜 했을까, 생각해보니,

지금이 괴로워서가 아닐까.

 

'바로 지금'들을 마주하지 못하고,

여기서 더 늙었을 때를, 혹은 여기서 더 젊었을 때를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지금의 괴로움을 스스로 쓰다듬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니,

어쩐지 서글펐다.

 

군대나, 해외 유학이나, 시험이나, 학생회나, 휴학이나..

무언가가 결정된 듯이 보이는(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그 모두든 그 모두가 아니든 상관없이, 내게 그렇게 보이는)

어떤 류의 상황들이 부러웠다.

내 상황과 타인의 상황을 단절시킨 채 마냥 부러워 하면서 외로워하고,

그 부러워하는 내가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성찰도 없는 게 안타까워서,

또 다른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외로웠다.

 

누군가는 내게,.

이제는 쉴 때가 되었다고. 네가 쉰다는 것에 어떤 말을 던질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있잖아,

난 지금 내가 '무엇을' 그만두고 쉬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조금 더 마주해야 할 때인 거 같아.

 

아자아자!!!!!
어쨌든 난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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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0

 

'제목을 글쓴 날짜로 대신할래요' 라는 기능이,

마치 바로 지금의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착각에 푹 빠진 채로 체크를 해버렸다!

 

나를 가득가득 메우고 있는,

혹은 나를 비켜지나가기만 하고 있는,

어떤 종류의 것들, 그것들, 바로 그것들 때문에

글을 쓸 수 없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쓰고 싶다.

는 마음이 들었다.

 

오늘 또 들어버렸다.

"그건, 그런 걸 설명할 언어가 없어서, 체계가 없어서 그래요.."

어떤 종류의 안도감과, 어떤 종류의 책임감이 동시에

내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끌었다.

 

더 이상 무 기 력

이란 말로 이런 류의 순간의 내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휘 청 휘 청

거려도 되는,

내가 '사람'이란 사실을 느낀다는 것에,

 

 

휴우(한숨쉬는소리, 어떤 한숨?)

 

 

- 권김현영 씨의 섹슈얼리티와 폭력 강연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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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찔움찔,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요즘.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면 더 깊숙이 빠져들테니 잠시 이 시기를 반갑게 맞아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은 도피하고 싶은 마음의 변명일까.

 

빠져나오려고 하는 내 조급한 마음이, 내 짜증을 돋우는 것인지,

혹은 어쨌든 내게 아직은 힘이란 게 남아있다는 걸 알리는 몸부림인지 헷갈린다.

 

제일 무서운 건,

무엇을 생각하고 떠올리든 '귀찮다'는 거다.

 

방에 몸을 돌돌 말아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설거지라고 하면서.. 샤워라도 하면서.. 컴퓨터라도 하면서..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류의 온갖 생각을 하다가 문득,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무서웠다. 정말-_-

 

마치 가위라도 눌린듯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놀라다가

발가락을 살짝 살짝 움직여봤다.

손가락도 움찔움찔.

헤에. 갓난아기처럼, 내 몸의 소소한 움직임이 기뻤다.

 

그래, 어쨌거나 살아있어.

 

담배 생각이 자주 나는 요즘이다.

난 중독되는 건 싫다.

중독되는 건 사람이란 걸로 충분하다.

담배 생각이 이전에 비해 더 '자주' 나고, 그 사실에 짜증내는 모습이 맘에 안든다.

필 수도 있고,

안 필 수도 있는 거다. (자기최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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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해지고 싶다'는 마음,

 

사람들을 대량으로,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만나게 되는 기간이 올해에도 왔다. 

시작 그리고 끝의 무수한 가닥들이 맞닿아 겹쳐지는 경계의 시기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 역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신입생 환영회 등에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라는 말들을 보고 듣는데,

이런 류의 말들이 괜시리 내 마음 속에 크게 울렸다.

 

나의 경우엔,

언젠가부터 사람들을 볼 때에,

'아, 참 좋다'라고 내 마음이 따스해지는 때는 많더라도,

'아, 이들과 너무 너무 친해지고 싶다'라고 내 마음이 달아올라 조바심이 나는 때는 많이 적어졌다.

 



 

그건

 [다가간만큼의 멀어짐을 인정하기] 라는 이전 글에서와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는데,

내가 이전의 관계들에서, 가까이 간 만큼의 멀어짐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내게 있어 무언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부단한 부딪침,

때로 그 부딪침은 서로를 감싸안아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도 하고

때로는 뜨겁게 활활 타올라서 진땀을 빼게 하는 것은 물론 데어서 아프기도 하고

짓물러서 피와 고름이 흘러넘치기도 하는,

그런 부딪침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친하지 않았을 때'라는 표현을 쓰자면,

친하지 않았을 때의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피상적이거나 가식적이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게 보인 그 모습, 내가 보인 그 모습은 그 자체로 나였고 그 자체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무언가에 있어서 '껍데기' 가려진 '본질'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내가 그닥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며,

내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지금의 관계와는 또 '다른' 무엇, 그 사람의 무엇,

그리고 나의 무엇을 발견하고 싶고 확인해나가고 싶은 일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까지 겪었던 것과 같으면서도 또 다른 부딪침의 과정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러면서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어떤 류의 감정들-사랑, 미움, 원망, 고마움, 기쁨 등등-을 상상하게 된다.

 

내게 있어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참 이중적, 다중적이다.

너무 좋지만, 그래서 미리 슬프다.

 

미래의 슬픔을 가져와 느끼는 척하면서 관계를 닫거나

더이상 새로이 맺어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굳이 '나'와 '그 무언가'가 친해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의 관계에도 감사하고 즐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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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말이야,

작은 것, 방바닥에 부끄럽게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 한 올처럼 작은 것에도 민감해지고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때가 있다.

사실은 뭐,

'작은 것'이라 불렀지만, '큰 것'이 뭐냐고 질문 받는다면 딱히 할 말도 없는 것 같다. -_-

스치는 듯한 말 한마디에,

말 한마디까지도 아니고, 문자로 보낸 말의 한음절음절에,

온라인 립흘 하나에,

내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터질듯 부풀었다가 할 때, 그럴 때 말이다.

 

 

만약 지금의 나처럼

피 흘리는 시기라면

"아 삐리리~ 생리 때문이야!"로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이유를 갖다 붙이고 합리화시키면(설명가능해지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는 착각에 빠질지도 모른다.

 



 

 

어째서 "하자"가 아니라 "해라"고 문자를 끝낸 걸까. (별 생각 없이 그랬을 텐데. 별 생각 하는 내가 싫어)

왜 하필 지금 물어볼까. (그 사람이 신도 아니고 내 상태를 어떻게 일일이 알 수 있겠냐 생각하면서도 미워)

물어보는 척하면서 사실은 일 독촉하는 게 아닐까. (이러나 저러나 종이 한 장 차인데. 평소엔 기분 나빠하지 않으면서 이럴 때만 초시니컬해진다는..)

 

 

결국 작디 작은 연약한 날개짓에

내 온 몸은 큰 파도에 휩싸여서

당장이라도 전부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때가 있다. -_-

 

 

이럴 때면, 문득,

친구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게 정말 문제가 큰 게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하기 싫어서 그렇게 문제로 보이는 게 아닐까?"

 

응.

하기 싫은 거야.

 

하기 싫은 내 목소리에 귀를 막진 말아야지.

하지만

너무 너무 하기 싫어서, 하는 순간도 있는거야. -_- 

난 성인군자가 아닌 사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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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와 나

누군가 내게 '대단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기분이 아예 나쁘다면 거짓일 것이고,

나름의 뿌듯함이나 우쭐함, '인정' 받았다는 느낌으로  

들뜨기도 했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하노이는 참 대단한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괜시리 서글퍼지고 외로워져서,

수도꼭지를 어설프게 돌려 틀어놓은 듯,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쩐지 내겐,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 

'난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거 같으니, 앞으로도 하노이 혼자 열심히 해'

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들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단하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자신과 나와의 거리를 크게 벌이는 것같은 느낌에,

괜시리 외로워졌던 게 아닐까 싶다.

나에겐 그/녀와 무언가 '함께' 하고 싶은, 그/녀가 내게 개입해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욕구들을 버렸다고, 놓았다고 생각해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마음이니, 불쑥불쑥 나타나는 일을 나도 막을 순 없잖아.  

 

대추리에 가서, 지킴이분들을 만나고 짧지만 곁에 있으면서

내가 계속해서 꿀꺽꿀꺽 삼켜 먹어야 했던 말이, '대단하세요', '멋져요' 였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경계를 뚜렷하게 하는 것만 같아서(경계는 이미 있는데도..).

 

무언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딱히 생각나는 좋은 말이 없었다.

결국은 대부분을 침묵...

 

'이렇게 잠깐잠깐 띄엄띄엄 다녀가는 나 같은 사람들이 얄밉지 않으세요?'

라는 물음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무언가가 두려워서..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공장만을 '현장'으로 생각하는 어떤 학생운동 활동가들을 보면서,

'당신들이 발 딛고 서 있는 학교라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차별에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 다른 '현장'들과 단절된 공간이 아니다'는 말걸기를 주로 해왔다고 생각하는 나는,

 

차별과 폭력으로 인한 피해조차도, 여러 권력관계들조차도 위계적으로 생각하는 듯이-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나는,

 

내 생활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다른 종류의 운동들과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것들 간의 연결지점을 찾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했다.

     

굳이 거칠게 내가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나누자면,

나는 그렇지 않은 영역에서 내가 보고 듣고 읽고 느낀 것들을 통해

내가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영역과의 연결지점-그건 나 자신과의 연결을 찾는 노력과 유사하고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을 언어화해내거나 교류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여러 상황들에 놓이번 나는 매번 이런 생각들로 갈등하고 고민에 빠진다.

대추리에서 2차 철거가 있던 전날에 대추리의 길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용역버스를 막다가 철거가 시작되기 직전, 단대 학생회 차원에서 내가 속한 단대는 철수하고 서울로 올라가 저녁에 있을 국방부 앞에서의 집회 홍보에 주력하자고 결정했던 적이 있다.

이 때 집에 가서 나는 펑펑 울었는데. 대체 서울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차라리 사람들이 모였던 바로 그곳에서 철거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게 낫지 않았을지 하는 자괴감으로, 무력감이 컸었다..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내가 평택의 평화에 '관심'이 많고, 주민분들이나 지킴이분들에게 크게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쨌거나, 그 사안에 있어서의 나의 위치를 계속해서 성찰해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자기비하를 가장한 책임회피는 그만.

좀 더 뻔뻔스럽게, 내가 할 일들을 찾아 나가고 싶다.

 

덧/

지신밟기는 보기만 해도 서럽게 흥겨웠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_-

제대로 보지 못한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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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오래될, 부탁.

나(들)를 포함한 너(희)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 지금 난 잠들지 못하고 있어.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는 지금 막 불쑥 생각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두둥실 나타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했어. 매번 다르게 나타나는 그 같은 상황(들)을 몇 십 번, 몇 백 번 떠올렸는지 너(희)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언젠가는' 내 몸과 내 심장과 내 마음 한 귀퉁이에 쑤셔넣어져, 내 일상 곳곳에서 튀어나와 내 발목을 붙잡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이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기를. 어디든지, 어떻게든, 언젠가는. 제발 내 속에서만 나만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함께 파괴되자는 권유는 아니야. 단지 나는 그만. 이젠 파괴가 아니라 마주보고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나(들) 중의 내가, "내가 너를 덮치면 어쩔려고" 류의 농담조로 말을 한다는 건, 내가 무서웠기 때문도 있다, 내 무서움도 섞여있었다는 거야. 너와 내가 매우 큰 변수라서가 아니라, 일순간 너와 내가 남자와 여자로 환원되기 쉽게 느껴지는 그 상황이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농담처럼 내 공포를 섞어 드러낸 걸지도 모른다. 반어적인 말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분명 나는 나(들) 중의 내 선택으로, 너(희)와 함께 하고 있었다. 하지만. 편안함과 즐거움, 재미와 흥분, 설렘과 함께, 공포라는 감정도 있었다는 거야. 현실에서 내가 너를 정말로 너를 덮칠 수 있는 여건과 의지가 받쳐준다면, 내가 그런 류의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닐까? 강자는 말하지 않고, 통보하지 않고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유리한 사람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자기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해주면 되는 게-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때도 많겠지-그 권력관계라는 거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농담처럼 던지는 그 말-농담이 맞지만-에서 해부되어 들릴 수 있었던 그 목소리도 들어줬으면 하는 건 너무나 큰 바람이었을까. 나조차도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계속해서 내질러 피섞인 비명이 되었을 때에야 어렴풋이 눈치챘으니까 말이지.

 

내가 농담으로 한 그 말과, 너(희)가 이미 실행에 옮기면서 "우리, xx할까?"라고 물었던 그 때 그 말. 나는 계속해서, 지금까지도, 아마도 앞으로도, 고민했고 고민할테지. 내 말이 폭력적이었을 수 있을까. 마치 젠틀하게, 여성주의적으로 동의를 구하듯 물어보는것'처럼' 여겨지는 너(희)의 말이 폭력적이었을 수 있을까. 모두 내 책임으로 넘길 수 없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그 말을 미리 함으로써 내가 너(희)에게 빌미를 던져준 것일까. 나는 차마 끝까지 쿨하게 갈 수는 없었던 사람일 뿐일까. 그 때 나는 끝까지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 십가지 갈래들을 상상하며, 끊임없이 가지를 뻗쳐나가 햇빛을 못보게 되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나무처럼, 그렇게 밤을 지샜다. 그냥 해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너(희)는 내게 원하는 걸 말했는데, 나는 나(들)안의 여러 나의 목소리들 하나 하나가 앞다투어 지껄여대는 통에,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들) 중의 나는 너(희)가 미웠다. 너(희)가, 너(희)의 흔적이.

너(희)가 그 자리들에서 소위 '진보'라고 일컬어지고 '좌파'라고 일컬어지고 '여성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따위의 말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너(희)를 그렇게 칭하며 이야기할 때, 나는, 내게 이미 행동을 취하며 "우리, xx할까?"라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의 너(희)의 모습이 언제나 어김없이 떠오른다. 나는, 너(희)의 흔적에 포함 된 진보니 좌파니 여성주의 따위 조차도 밉다. 너(희) 자체를 미워할 수 없는 마음이어서 일까. 너(희) 자체라는 게 애초에 없어서일까. 나는 그것들이 미웠다. 그것들에 함께 하려 했던 내가 미웠다.

그런 것들을 입에 담거나 관련한 행동을 한다면 보다 더 결백하라는 요구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나는 그 이미지들이 겹치건만, 너(희)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 보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

 

너(희)와 겹치는 생활공간에서 발견되는, 발견할 수밖에 없는 너(희), 너(희)의 흔적도 미웠다. 떠나고 싶었다. 내가 정말 떠난나면, 그 모든 원인이 너(희)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너(희)가 있는 그 공간이 너(희)로 인해 또 미웠다. 떠나고 싶다. 이제 학년이 높아졌으니, 여학우였으니, 공부할 게 많을테니, 졸업을 해야 할테니, 등등으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할 수도 있다. 상관있어 할 수도 있다. 너(희)가 떠나기만 하면, 마치 그걸로 내가 편히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따위는 하지도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들, 그리고 또 그런 류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의 실행에 옮기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나(들) 중의 어떤 내가 정말 '쟤(들)가 떠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더라도, 그 어떤 나의 목소리를 인정은 해도 동조하지 못하는 내 목소리들이 더 많다는 걸, 나는 알 수 있다. 그것은,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너(희)를 가장 빨리 떠올리고 가장 많이 원망했던 순간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우리, xx할까?"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 절망감. 어떤 나의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은 순간에, 너(희)의 모습이 재빨리 떠오를 때면,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너(희)를 떠올리고 나는 내 욕망의 검열을 강화하고 내 욕망을 회의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어쩌면 이러한 면들은 너(희)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 하게 된 어떤 나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다 더 신중해져서 함께 더 즐길 수 있게 될 가능성을 크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전히 잊고 싶지는 않은 일이다. 진심으로. 

 

세상이란 곳은 내 안의 어떤 나도 감히 어찌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다 해낼 수도 있는, 지랄 맞은 곳이니, 언젠가의 어떤 나는 너(희)에게 "우리, xx할까?"라고 먼저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장면도 충분히 상상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언젠가의 어떤 나는 그 때의 어떤 나와 지금의 어떤 나를 모두 포함하는 변화된 변화 중인 변화할 나일 거다. 내 변화에 너(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꽤 크게 차지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 너(희)는, 나(들)은 서로에게 세상에게 관여 중이라는 것,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좋아한다면, 이해하고자 노력을 한다면, 차이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말, 언어' 그 자체의 한 면만이 아니라, 그 상황과 분위기를, 얼핏 놓치기 쉬운, 말하고 있는 그 사람조차도 모를 수도 있는, 유령같은 타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보자고, 너(희)에게도, 나(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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