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의 한계

가뜩이나 이명박 정부 들어서 곤욕을 치루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다보니, 측은한 마음도 들고 하다만, 정작 이명박 정부의 패악질때문만이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이 뭔지가 궁금해지는 일들이 자꾸 발생한다.

3월 4일자 국가인권위원회 보도자료에 따르면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사이버모욕죄 신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다고 한다.

"최근 인터넷에서 명예훼손이나 모욕행위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고려해 최후 수단으로 사이버 모욕죄의 도입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국가인권위원회는

"표현의 자유의 위축 현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따라서 사이버모욕죄의 도입이 필요한 경우라도, 반의사 불벌죄의 형태가 아닌 친고죄...의 형태로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글쎄다... 사이버모욕죄가 도입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밝힌 바 있고, 적어도 이 논란이 불거진 계기가 되었던 모 탤런트의 죽음 이후 온라인 상에서도 격렬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그 논란을 다시 상기하지 않더라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이버모욕죄 도입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다. 특히 온라인 상의 표현의 자유 위축과 공안기관의 자의적 개입과 판단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인권과 충돌하는 문제가 심각한 정도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회는 사이버 모욕죄가 도입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왜 그럴까?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3월 12일자 보도자료에는 이번 용산 참사와 관련하여 강제철거 시 지켜야할 기본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시한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사람이 살고 있는 주택에 대하여는 퇴거 절차 완료 이후에만 강제철거가 가능하다는 원칙 확립
- 퇴거를 당하는 이들에 대한 충분한 협상기회와 적절한 보상 제공 및 퇴거 예정 시기에 대한 적절한 사전고지 시행
- 공무원(또는 그 대표자)의 입회 및 그들의 강제철거 상황에 대한 철저한 관리
- 겨울철과 야간 등 부적절한 시기의 강제퇴거 금지
- 강제철거 피해자에 대한 적절하고 효과적인 구제조치 제공

이러한 권고의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하여 국가인권위원회는, 행안부에 대해서는 입법을 통한 제도정비를, 경찰에 대해서는 철거용역업체에 대한 관리감독을 권고하고 있다. 웃기는 건 정작 재개발만이 살길이라고 설치는 것은 행안부와 지방자치단체이고, 용역깡패들과 형님아우 하면서 재잘거리는 것들이 경찰이라는 점이다. 어디 우리가 그동안 용역들한테 줘 터질 때, 그 옆에 경찰이 없어서 그렇게 터졌나?

용산참사를 비롯하여 전국 각 재개발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강제철거와 관련된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소유권의 절대적 보장 앞에서 터무니 없이 무력한 점유권의 한계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점유권에 대한 보장이라기 보다는 소유권의 행사를 하드하게 하지 말고 소프트하게 하라는 권고일 뿐이다.

더구나 이 권고사항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최초로 내놓은 획기적인 안도 아니다. 오히려 이미 김대중 정부에서부터 제기되어왔던 순환재개발 및 토착민 정주권 보장 등의 내용은 빠져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재개발의 문제가 아니라 재개발과 관련된 철거의 문제에 대해서만 권고를 했을 뿐이다.

이 두 권고를 보면서 우선 느끼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철저하게 제도적 수준 안에서 '인권'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헌법'과 '법률', 조금 더 인심써서 '국제기준'이라는 범위 안에서 '인권'이라는 것을 한정한 채, 실정법과의 관계 속에서 현상 문제를 조절하는 정도의 차원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기능이 국한된다면, 헌법재판소나 각급 법원이 있는 마당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존재해야할 필요성이 뭔가?

적어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한 이유는 발생하는 인권관련사안들에 대해 법원이 할 수 없는 뭔가를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실정법이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 이상의 인권에 대한 재구성의 의무가 국가인권위원회에는 부여되어 있다고 봐야한다. 판사들이 할 수 있는 판단을 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했다면 옥상옥도 이런 옥상옥이 없는 거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니들이 판사냐?

경험이 세계관을 지배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현상.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런 한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도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원 구성이 다분히 법조계 중심이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10명 중 6명이 법조계 혹은 법학자 출신이고, 4대에 걸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들 역시 모두 법학자 혹은 법조인 출신이다. 사무총장 역시 1명을 제외하고는 역대 모두 법학자나 법조인 출신이고.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르면 인권위원은 "인권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고 인권의 보장과 향상을 위한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그 자격을 부여한다(법 제5조제2항 전단). 이 기준을 전제로, 조금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그간 국가인권위원회의 상당수 위원은 "인권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보다는 "법률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더 많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인권위 역대 위원장이나 사무총장, 각 위원들 중에는 행인도 인정하는 인권운동가들이 있다. 문제는 각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다. 국회가 4인 선출, 대통령이 4명 지명, 대법원장이 3명 지명. 이렇게 뽑히는 위원회의 집단적 구조.

경찰과 평화시위 양해각서를 체결하라는 권고를 냈을 때도 그랬지만, 국가인권위원회는 간혹 제 살을 스스로 깎아 먹는 일들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의 규모를 축소하고 권능을 약화시켜 종국에는 완전무력화시키고자 획책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인권위원회를 지키겠다는 싸움에 나서기가 주저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을지, 그 노력을 보여준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알아서 기는 수준, 또는 하나마나한 권고를 내는 수준이라면,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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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2 12:32 2009/03/1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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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인님의 의견대로라면 지금처럼 행정부에 속하여 행정에 직접적인 권고를 하는 기능을 하기보다는 입법부에 속하거나 아예 독립하여서 입법 관련 기능을 수행하는 게 낫지 않나 싶네요.
    '헌법'과 '법률', 조금 더 인심써서 '국제기준'이라는 범위 안에서 '인권'이라는 것을 한정하지 않은 채 행정부에 속하여(국가인권위원회 관련 영은 대통령령이니 "헌법기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싶네요 -_-;)행정작용에 대한 권고를 한다는 건 말도 안돼지 않나요? -_-;;;

    • 국가인권위원회는 독립기구인데다가 실상 헌법상 설치근거가 명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3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입장임에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스스로 행정부의 한 기관처럼 행동하고 있죠. 쩌비..

  2. 국가인권위원회가 알아서 기는 건 아닐까... 명박시대에 좀 살아 볼라고...

    • 국가인권위원회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향후 정치권에서 한 자락 하고 싶은 몇 인사들이 그런 짓을 하는지도...

  3. fessee/ 박명림 교수인가가 그런 주장을 하지요. 4권 분립을 해야 한다고.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인권위

    • 그 주장은 잘 모르겠고요, 차라리 입법과 행정을 합치고 사법을 독립시켜서 2권으로 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4. "대통령령으로" 조직의 조직과 직무범위, 그밖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지만 행정부에 속하지 않은 독립된 기관이라는 개념이 좀 생소하긴 하지만 그 권한에 속하는 업무를 독립하여 수행한다고 돼 있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죠 -_-;
    개인적으로는 심히 생소한 제도인데다 -사실 권익위나 인권위가 옥상옥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관계 법령을 뒤져 보아도 공중에 붕 뜬 느낌만을 받으니 시간 나믄 함 꼼꼼히 살펴볼까 합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