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짧은 이유 혹은 변명

분석의 가치가 있고, 이를 통해 비전을 찾아볼 여력이 생길 때 글이 길어진다. 최근 행인의 글이 짧아진 이유는 소재가 된 사건들이 분석의 가치조차 없고, 혹은 분석 자체가 무의미하고, 따라서 사건의 분석을 통한 비전의 발견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매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렇다.

 

정치적 소재가 많은 뻥구라닷컴의 특성상 지난 포스트를 통해 구정권과 현정권의 상황을 비교할 수 있는데, 적어도 이런 전제에 따르면 최소한 노무현 정권에서 발생한 사례들은 이명박 정권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보다 분석의 가치가 있었고, 알량하나마 전망을 찾아볼 여력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어느 사건이든 그 맥락을 훑어보면서 나름 가지고 있는 전문성에 의탁해 조밀한 분석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귀찮다. 예컨대 오늘자 각 일간지를 뒤덮은 한 단어가 그렇다. "죄악세(Sin Tax)".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술과 담배 같은 외부불경제품목에 의해 발생하는 비용이 연간 24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자료만을 가지고도 왠만한 논문 몇 개를 만들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국가는 세수가 있어야 운영이 가능한 것. 감세를 통해 국고를 부유하게 한다는 이명박의 놀라운 조세정책은 4차원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 실증적으로 드러난 이상, 어디선가 세금은 나와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한 논리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고로 서민의 주머니를 털어 국고를 풍족하게 함과 동시에 부자들의 주머니까지 넉넉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 가외로 국민의 건강까지 챙겨주시겠다는 꿩먹고 알먹고 둥지태워 불까지 쬐는 1타 3피의 놀라운 책략은 "죄악세"라는 조어를 세간의 화제로 만들며 우리 앞에 등장한다.

 

이명박이 대통령짓을 함으로 인해 "행복추구권"을 침해받고 있는 서민들의 애환을 그나마 싼 값에 달래주던 술과 담배는 졸지에 "악"의 대명사가 되고, 이 과정에서 그 "악"을 통해 일정정도 감정이 억제되거나 혹은 발산함으로 인해 보존된 비용은 24조원으로부터 감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국가는 이제 그 "악"을 통해 풍요를 구가하고자 한다.

 

오히려 세상은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기를 강요받게 된다. 조용필을 그토록 애절하게 기다려왔던 21세기는 정작 자기의 시대가 도래하자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빨아먹으며 칼뱅의 계시를 따르는 16세기로 급회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 어차피 세금은 필요한 것이고, 이명박의 입장에서는 자기 계급성에 충실한 사회적 재분배를 획책하고 있을 뿐인데.

 

며칠 전, 작년 촛불집회를 빌미로 느닷없이 체포되었던 후배는 어제 불구속 기소가 되어 나왔다. 21세기가 가진 함의는 기껏해야 관할 서에서 잡아가던 것을 홍제동 공안 3과가 잡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로 우리에게 현신한다. 여기에 대해 어떤 분석과 전망을 논할 수 있을까?

 

어이가 없으면 귀찮아진다. 조세정책과 관련한 각종 분석, 예를 들어 조세법정주의라던가 '외부불경제'라던가 하는 것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노고가 가지고 있는 의미라는 것은 겨우 그런 노고를 했다는 것 뿐. 공안기관의 헛짓거리에 대한 논의를 한다고 해야 이를 통해 나오는 결과라는 것은 "그것들 미친 거 아냐?"라는 탄식 뿐이다.

 

이 귀차니즘을 조장하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불굴의 의지로 분석하고 전망을 드러내려 하기 보다는 그저 체념하고 얼른 2년 반이 후딱 지나가기만을 염원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성적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가 제기되지만, 감성적으로는 그것이 속 편하다는 심사가 올라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당분간 행인의 글은 계속 짧아질 거 같다. 이성이 감성을 극복하기 전까지는.

 

덧 : 죄악세는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임대소득세에 대해선 일정정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조세형평이라는 대원칙이 충분히 보장되는 한에서 그렇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속성상 이게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명박 본인이 빌딩 지어서 세받아 먹으며 청계재단 밑천을 만들었던 것을 보더라도,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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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8 15:36 2009/07/0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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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 그러니까 이게 개그용어가 아니라 시사용어였군여...=ㅁ=;;; 아까 모님 블로그에서 보고 요즘 또 유행하는 인터넷 신조어인 줄 았았다능;;;

  2. 공감되는 바가 많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예전에는 "그것들 미친 거 아냐?"라고 할 때에 느꼈던 감정이 분노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요즈음 "그것들 미친 거 아냐?"라고 할 때에 느끼는 감정은 허탈함에 가까운 것 같거든요. 이상하게 힘이 더 빠집니다. 그래도, 하여튼 서로 힘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운내세요(^-^)/

    • 엇! 감사합니다. 무연님 덕분에 힘이 불끈 솟습니다.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듭니다. ^^

  3. 죄악세와는 별개로 이번 기회에 담배랑 술을 끊는 사람이 늘까 아니면 더 담배와 술을 많이 마시며 사장님을 씹을까 하는 궁금증이 드네요. 저는 술이랑 담배를 싫어해서 별 상관없지만 (승리의 V ㅋㅋ) 근데 제가 보기에는 이거 저항이 심해서 얼마나 갈까하는 의문이 드네요.

    • 기본적으로 술과 담배를 사람들로부터 끊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조세저항차원에서 담배를 직접 재배해 피우고 술을 직접 담궈 먹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이번 죄악세 논란에는 음모가 숨어있다고 봐요. 이명박이 청기와집에 앉아 있는 한, 서민들은 하루 하루 가중되는 스트레스에 시달릴 테고,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과 담배를 찾게 되고, 자연스레 술과 담배의 판매량이 늘어나게 되는 것을 틈타 국민건강증진 및 외부불경제 개선이라는 빌미로 세금을 높이고, 이만저만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거죠. 반대로 이명박 덕분에 신경 쓸 일이 없이 언제나 오늘만 같아라 하고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야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하니 술 담배는 자연히 멀어질 것이고, 덕분에 지들은 자동빵으로 세금 감면에 건강증진까지 덤으로 획득.

      여기서도 우리는 빈익빈 부익부, 혹은 지독한 양극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ㅎㅎ

  4. '지독한 양극화' 스트레스 푸는 매개에서도 그게 나타난다니 어이상실일뿐...쩝~

  5. 와우- 직접 재배하고 담궈먹는 조세저항 좋은데요 ㅎㅎ;;;

  6. 죄악세라니

    죄악세를 술담배에 붙일게 아니라 이명박 행동하나하나에 붙여야 하는게 아닐지-_-

    • 이명박에게는 이미 "검"세와 "짭"세가 붙어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명박이 세금 한 푼이라도 더 낼까봐 그 측근을 국세청장에 앉히는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7. 야간업소에 담배판매를 허용한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저렇게 죄스러운 물건에 접근을 용이하게 만드는건 또 뭔지...

  8. 이참에 누룩 사다가 '밀주'담궈먹어보기로..ㅎㅎ 그러면 그 옛날 '밀주단속'이 다시 시작되려나? 푸

  9. 짧아져서 읽기 편하고 좋습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