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은 사기다
7월 17일 제헌절. 헌법을 전공하는 입장에서는 생일날과 같은 의미다. 나만 그런가? 어쨌든...
2009년 7월 17일의 화두는 단연 개헌이다. 김형오에 의해 촉발된 개헌론은 이제 정치권 일각을 슬슬 달구고 있다. 한나라당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야당인 민주당 역시 개헌이라는 정치적 쟁점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지만 당 차원에서 명확하게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레디앙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원고 작성이 약간 늦기도 했지만 글이 올라간 시점이 원래 예정보다는 하루 늦어졌다. 타이밍을 좀 놓친 것도 있고, 글이 좀 급하게 작성되어 완결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제헌절과 개헌론에 관련하여 이렇게라도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행인의 입장과 비슷한 글들이 몇 군데 올라왔다는 거다. 이들 글과 함께 김형오의 제헌절 축사를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약간 무색무취하게 올라온 조선일보의 한 칼럼도 같이 보면 좋을 듯 하다.
김창록 교수 - 헌법이 문제? 헌법대로 안 하는 것이 문제다!
레디앙 논설위원실 - 개헌, 담합정치동맹으로 가는 길?
행인에게 가해질 수 있는 질문은 이런 거다.
현행 헌법이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가?
개헌은 중요하지 않은가?
개헌하지 말자는 이야긴가?
간단하게 답하면 이거다. 현행 헌법은 결코 완결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이건 어쩔 수 없는 헌법의 숙명이다. 어느 시대고, 헌법이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그러한 체계를 갖추게 된다면, 그건 결코 완결적일 수가 없다. 헌법은 완결성을 추구할 뿐이지 결코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다.
개헌은 중요하다. 다만 어떻게 개헌하는 가가 중요하다. 오히려 제헌까지 가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비록 9차 개헌이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제헌에 준했던 현행 헌법도 그런 의미에서 고려해볼 수 있다.
개헌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헌이 정치집단의 정략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그건 개헌이 아니라 개수작이다. 개헌이 필요하면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필요성은 주권자인 국민이 제기하는 것이지 정치모리배들의 이해타산에 의해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틀은 결국 현행 헌법 제1조제2항이 천명하는 바,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가 헌법이라는 틀에 의해 담보될 수 있는가 없는가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모든 개헌론은, 거듭 이야기하거니와 사기다.
잠깐 시간을 거슬러 87년 6월 항쟁 당시로 돌아가보자. 거리를 메운 시민들이 주장한 구호는 매우 간단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그 무수한 군중들이 한 목소리로 "호헌철폐!"를 외치면서 헌법 자체를 바꾸자고 주장했을 때, 과연 그 군중들은 헌법 조문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구체적인 문장에 대해 깊이 고민했을까? 수백만의 인파들이 죄다 헌법과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닌 바에야 그러한 각론적 측면까지 염두에 두고 "호헌 철폐!"를 외쳤을리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호헌철폐!"를 단지 헌법의 문구를 수정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헌법으로 대변되는 체제를 변혁하자는 취지로 해석한다면 논의의 중심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의 "호헌 철폐!"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현행 헌법의 가치가 드러난다. 현행 헌법은 바로 민중들의 의지, 즉 "이대로는 안 된다!"는 처절한 각성과 변화의 바램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간과되는 한, 레디앙 기고글에서 행인이 밝혔듯이 모든 개헌론은 현행 헌법 이전의 유사헌법체계로 돌아가자는 정치집단의 사기행각에 불과하다.
물론 비판은 있을 수 있다. 현행 헌법이 결코 인민의 입장을 전적으로 대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 현행 헌법은 그 출발이야 어쨌건 간에 정치집단 간의 야합에 의하여 구성되었다는 것, 더 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헌법이라는 것은 결국 지배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술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비판을 통해 현행 헌법에 대한 가치를 격하시킬 수 있음이다.
이들 비판이 가지고 있는 적실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대로라면 헌법개정은 물론이려니와 헌법 자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 그냥 현행 헌법체계라는 것을 뒤집어 엎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헌법 조문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아니라 헌법이 어떻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인가이다. 바로 이것이 헌법해석 투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 사회 내에서 헌법해석투쟁을 제대로 수행한 부류는 좌파나 진보개혁세력이 아니라 보수 우익집단이었다. 극명한 예는 바로 2004년 이후 있었던 한나라당의 보안법 수호투쟁과 사학법 개정 반대투쟁이다. 그 투쟁과정에서 보수우익은 한국의 헌법을 반평화 냉전체제의 보루로 승화시켰고, 좌파척결의 이론적 근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좌파나 진보개혁세력은 헌법 자체의 가치를 순전히 법률적인 차원에서 언급하는 것에 그쳤다. 덕분에 이들은 언제나 헌법해석투쟁에서 보수우익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안에 갇혔고, 이론적 차원에서 방어하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보수우익이 늘상 폐지를 주장하는 헌법 119조제2항에 대해 좌파는 그것이 건전한 자유시장을 지키는 원칙이라고 주장했을 뿐, 한발 더 나가 해석적 차원에서 그것이 사회주의적 혹은 조금 수위를 낮춰 사민주의적 경제원칙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했던 거다.
최근 벌어졌던 일단의 사례에서, 이 사회에서 헌법투쟁이 가능할 수 있다는 모종의 희망을 발견한다. 지난 촛불의 물결 속에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메시지를 서로 공유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자각이 촛불 아래서 드러났다가 여명과 함께 어디론가 잠복해버렸지만, 가능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우리 앞에 현현한다.
이 가능성의 의미는 다름이 아니다. 인민들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혹은 잊고 있었던 헌법이라는 존재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준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걸 포착하고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소위 진보와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다. 아직까지는 미비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주체가 동원될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단지 가능성 차원에서 끝나게 하지 않고 실물화해낼 때, 보수우익의 헌법해석투쟁에 대응할 수 있다. 헌법의 추상성이라는 것은 어차피 양날의 칼, 보수우익이 그 칼의 한쪽 날을 휘두르는데 성공했다면 그 반대편 날의 효용을 체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개헌론에 휩쓸려 조문의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수준에서 개헌논의에 빠져드는 것은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정치세력들의 야합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당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물론 민주당은 그럴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전 정권에서 당시 열우당의 지존이었던 노무현 역시 똑같은 수준의 개헌을 제시했었으니, 그 물이 달라진 것도 아닌 바에야 민주당은 그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지만.
다시금, 그리하여 지금 논의되는 개헌론은 사기다. 김형오의 축사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그 모든 것이 비록 국민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을 지언정, 실은 한 나라의 체계를 정하는 과정에서 국민은 배제되어 있고, 국민은 결코 주권자로서 인정되지 못한다.
이 사기극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 오늘 61주년 제헌절의 의미는 바로 이런 추악한 대국민 사기극을 헌법의 이름으로 까발리는 데 있다.
행인의 [개헌론은 사기다] 에 관련된 글. 우리 헌법은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15조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제21조 ①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언론·출판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