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의 난

가끔은 뒷북이 더 요란할 때가 있다. 최근 유명한 어떤 분의 자제 때문에 불거진 21세기판 음서제도 부활논쟁에 끼어든 신림동 고시생들의 움직임을 보면 그렇다. 장관 자제의 특채문제가 공정사회를 특별히 주문하신 각하의 격노로까지 이어지자 고시제도 폐지를 선언했던 주무부처가 '엇 뜨거라!'하곤 백지화하긴 했지만, 무튼 밥그릇이 걸린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왈가왈부를 피할 길이 없는 법.

 

신림동 고시생들의 경우 청춘을 바쳐 달려가던 고지가 눈 앞에서 갑자기 증발하는 현상을 인내하긴 어려웠을 터이고, 그러다보니 사상 초유의 집단행동까지 하고 있다. '3대 고시 존치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까페까지 결성하고, 고시폐지반대 현수막까지 걸더니, 지난 주말엔 토론회까지 개최했다.

 

밥줄이 걸린 문제에 발벗고 나서는 것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아쉬운 것은 이들의 요란한 뒷북이 뒷북으로만 끝날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는 것. 이미 고시폐지안은 전격 철회되었고, 공정사회구현에 불을 밝히신 각하의 영도 하에 음서로 혜택받은 고관대작의 자제들에 대해선 제법 칼질이 이루어질 듯도 보인다. 들끓는 민심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기 마련인 거고.

 

뒷북이 항상 그렇듯이 이번 일도 쓴웃음만 남기고 표표히 사라지는 에피소드로 끝날 가능성이 큰 이유 중 하나는 '3대 고시 존치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거창한 집단이 내걸고 있는 고시존치의 논리다. 이들의 논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건이 하나 있는데, 고시존치 토론회를 알리는 보도자료가 그것이다.

 

내용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별로 그 필요함을 느끼지 못한다. 내내 언론에서 했던 이야기들인데다가 특히 로스쿨과 관련된 주장은 차라리 그동안 행인이 이 블로그에 끄적거려놨던 것을 보는 것이 훨씬 낫다. 오오, 이 자기만족이란... 암튼 그렇고. 보도자료와 관련되서 한 가지만 부탁하자면, 최소한 기자들을 대상으로 뿌리는 보도자료라면 맞춤법에 좀 더 신경을 써주길. 이게 무슨 뻥구라닷컴에 내맘대로 끄적거리는 배설물은 아니지 않겠는가?

 

어쨌든 이 보도자료의 중심적인 내용은 다름 아니라 형평성이다. 열심히 공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진 자들이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보장하라는 것. 그렇지 않은 자들이 줄과 빽을 동원하여 관직에 오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이게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사회적 제도 특히 공직자를 선발하는 과정이 불편부당하고 합리적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요구다.

 

문제는 현행 고시제도 자체가 그다지 형평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료를 선발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향후 관직을 통해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할 자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이 선발된 공무원이므로 정치인과는 달리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치적 주의주장을 선동하고 행사할 위치에 있지 않은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이들은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국민의 생활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될 터이다. 따라서 어떤 제도가 되었든 관료선발에 형평성이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연의 여지가 없겠다.

 

그러나 과연 현행 고시제도 자체는 형평성을 갖추고 있나? 고시생들 사이에 주문처럼 전해오는 당락의 구결 중에 "운칠기삼(運七氣三)"이라는 말이 있다. 시험지 딱 받아들고 봤을 때, 제법 공부한 부분에서 문제가 출제되면 합격하는 거고 빼먹은 곳에서 문제가 출제되면 떨어진다는 것. 이게 무슨 고스톱 판이나 섯다판도 아닌데 이쯤 되면 거의 도박판과 유사할 지경. 물론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수험생들은 교과서를 종류별로 구비하고 일일이 대조하며 '단권화'까지 하며 시험준비를 한다.

 

그 외에 운칠기삼이라는 천지운행의 묘를 뚫기 위해 벌어지는 천태만상의 행각 중에는 출제위원 정보파악도 한 방법으로 동원된다. 007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밀리에 출제위원이 선발되고 모처에 들어가 시험 끝날 때까지 합숙하며 외부출입과 연락도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문제출제의 방식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출제위원의 정보를 파악한 수험생들은 알고 있는 모든 인적망을 가동하여 해당 위원이 평소 뭘 강의했는지, 뭘 중요하다고 짚었는지, 성향이 어떤지를 파악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빨대를 얼마나 꼽을 수 있는가라는 능력. 출제위원으로 선발되는 사람들의 경력이라는 것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그 학교" 출신에다가 "그 지역 어름"에서 교편잡고 있는 사람들. 당연히 "그 학교" 출신이거나 "그 지역 어름"의 학교출신인 수험생들은 유리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러다보니 또다시 당연히 "그 학교" 출신이거나 "그 지역 어름"의 학교출신들이 대거 고시에 합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고시 합격생을 배출한 학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라. 그게 어디 '형평성' 있는 행위의 결과인지.

 

"대한민국 1%"라는 말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고시에 해당한다. 수험생들에게도 계급이 있고, 1%에 들어간 자와 그렇지 못한 99%는 당연히 천지차이 나는 계급으로 나뉘게 된다. 요는 이들에겐 이미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형평성과는 하등 관계 없이 줄과 빽과 운이 이미 숙명처럼 작동한다는 사실.

 

상당히 안타까운 일인데, "3대 고시 존치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곳에서 나온 저 보도자료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설득력 자체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물론 까페에 가입한 1400명 가까운 회원들과 직접 행동을 개시한 일부 수험생들의 '용기'는 가상하다만, 이 일부 수험생들이 투쟁을 선언(!)하고 몸을 던질 때 직접 이해당사자들의 절대다수인 십 수만의 수험생들은 여전히 독서실에 처박혀 법전과 영어 수험서를 외우고 있다. 그리하여 뒷북은 뒷북으로만 끝날 가능성이 가능성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수험생들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솔직하게 밝히자. 어차피 지금 그들이 분출하는 분노는 바로 그들이 붙잡고 있는 수험서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사회적 구조변환으로 이어질 가능성 자체가 없으므로. 다만, 제도적 변화라는 것을 다시금 고민해야 할 때라는 것만이라도 합의를 이루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논의라도 불붙게 된다면 뒷북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덧 : 유사한 논지의 글이 이미 미디어스에 올라와 있다. 역시 행인은 뒷북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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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4 14:50 2010/09/1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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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 행인님 논문 다 쓰셨다나봐요 ㅎㅎ
    저도 초고는 다썼는데 친한 누님께서 연필펜~선생님으로
    맞춤법이랑 문장을 지적해주시는 통에
    다시 고치고 있네요...ㅜ_ㅜ

    ps. 수험생얘기가 남일 같지 않다는 ㅠ

    • 헉... 초고는 커녕 아직 뭘 어떻게 정리해야할지도 모르고 있는데요... ㅠㅠ

      초고 다 되셨다니 부러워 죽겠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