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지대그빡, 그리고 죄와 벌
문어 머리와 낙지 머리에 카드뮴이 잔뜩 들어 있으므로 먹으면 골로 갈 수도 있다는 기사가 떴다. 아니 그럼 그동안 문어 머리와 낙지 머리에 백세주라도 들었다고 생각했던가? 대양에서 잡아 올린 참치의 머리에도 중금속이 잔뜩 들어 있으므로 주의하라는 이야기가 심심할 때마다 들려왔는데, 갯벌에서 잡아 올린 낙지와 문어가 이슬만 먹고 사는 동물이 아닌 다음에야 폐수가 콸콸 쏟아져 들어간 그 뻘에서 뭘 먹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들을 했는지...
이런 걸 자연의 복수라고 할려는지 모르겠는데, 애초부터 자연은 복수심이니 뭐니 그런 인간적 심성을 갖고 있지 않더랬다. 노자가 괜히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겠는가? 결국 이건 인과응보라고 볼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천벌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싶다.
나치 치하의 악명높던 '민족재판소'에서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의 사형을 언도했던 Roland Freisler라는 판사가 있었더랬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으로도 출판되었고,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숄 남매의 투쟁과 죽음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고.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라는 영화에서, 그 살벌한 지옥의 법정 주심 자리에 앉아 가차없이 사형을 선고하는 Roland Freisler 판사에게 숄 남매가 "내일은 이 자리에 당신이 서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운이 좋았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Roland Freisler는 전범 재판정에 서서 치욕적인 전범재판을 받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연합군의 폭격에 사망했다. 물론 이 경우 하늘 위에서 폭탄을 떨어트린 연합군을 신의 대리자라고 인정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러나 아주 가끔, 이렇게 운명은 산자들에게 인과응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한다.
문제는 이게 진짜 아주 가끔, 가물에 콩나듯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극에 야자수가 자라날 확률로 벌어진다는 거. 그러나 한 번 터지면 아주 대박인게, 바로 행인이 그토록 좋아하는 낙지대그빡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라는 실존적 고민을 하게 만들 정도다.
'업보'라고 할만한 것이 쌓이고 쌓이는 것을 내내 보면서도 그에 해당하는 인과응보가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오늘 '업보'를 쌓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길함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 업보는 그래도 좀 봐줄 여지가 있다. 개인은 그나마 자신의 감수성 혹은 양심이라는 것을 내내 붙잡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나 집단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집단적 동류의식이 발호하는 순간,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이라는 것은 집단에 결합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만큼 분할되어 그 n분의 1만을 남기게 된다.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죄의식이나 양심의 부피와 무게는 점점 줄어들고, 종국에 가서는 오히려 그것이 정의로 둔갑한다.
마땅히 죄의식을 느껴야할 일이 정의로 둔갑하는 상황에서 그 심리전환에 동참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난처하거나 혹은 혼란해한다. 그렇게 어라, 이게 뭐지 하고 있는 시간이 흐르고 흘르면 어느 순간 갯벌에서 카드뮴을 잔뜩 머금은 낙지 대그빡과 문어 대가리가 식도를 타고 흘러 넘어온다.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벌어진 어떤 부조리는 비록 그것에 동참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막아내지 못한 모두에게 죄의 과실을 분배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을 죄다 알고 있어야 하고 거기에 한 푼의 치우침 없이 개입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을 그냥 지나치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간만에 햇볕이 좋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다. 삽질 4대강은 잘 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