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받을 자격

군사독재라는 암흑의 시간이 있었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대대손손 먹고 살 수 있는 부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황금기였을지 모르겠으나 그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돌이켜 생각하기조차 싫을 정도로 막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입조심, 사람조심 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모른척 세상을 지나쳤다.

 

권좌의 그늘 아래서 과실을 탐하던 사람들이야 언급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들이 침흘리며 독재의 과육을 탐닉할 때, 그 열매를 맺게 했던 거름은 다름 아닌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던 어떤 사람들의 살과 피였다. 이렇게 피해를 당했던 사람들 중에는 '조작간첩'들도 있다.

 

최근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인되는 사례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조작간첩'들의 경우 그들이 '간첩'이 되었을 때와 무죄가 확인되었을 때 사회가 반응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이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포승에 묶여 법정에 섰을 때, 언론은 다른 모든 사회적 문제들을 제쳐놓고 그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돌렸다. 반공방첩의 대의가 대문짝만한 글자로 초중등학교 건물에 정확한 4칸 구획으로 설치되었던 그 시대에, 이들은 권력의 정당성을 부각하고 '북괴'의 호전성을 재각인 하기 위한 효과적인 제물이었다.

 

그 덕분에, 그들이 '간첩'이 되었던 덕분에 국민은 여전히 공포에 떨 수 있었고, 그 공포의 강도가 현저하게 강화될 수록 정권은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다. 반공의 전초선에 위치한 한반도 이남은 시시때때로 양산되는 '간첩'들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아이러니.

 

'조작'을 통해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자들과는 달리, '조작'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위치로 추락했다. 애초 '조작'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이미 그 이전에도 이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주로 배운 것도 없고 기댈 곳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국가에 의해 어느 순간 '간첩'이 되었어도, 애초부터 자신이 왜 '간첩'이 되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 물어볼 대상조차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고문과 협박과 조작의 한 가운데에서 간첩이 되었던 그들은 자신들만의 삶이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삶이 박살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가산은 풍비박산하고 절대 지워지지 않는 빨간 딱지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손가락질의 원인이 되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남은 한 방향마저 휴전선으로 갈라져있는 이 절대고도에서 그들은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제 그들은 국가로부터 자신들이 무죄임을 확인받았고, 일정한 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로 그들의 상흔이 아물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으로 그들의 과거를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간첩'이 되었을 때 그토록 난리를 치던 언론은, 이제 그들이 아무 죄도 없다는 사실이 수십년만에 밝혀지고 있을 때 침묵한다.

 

침묵만의 문제는 아니다. 명실상부, 국가폭력의 전위를 자임하며 '조작'의 선봉에 섰던 공권력들은 오히려 반발한다.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을 때 검찰은 또다시 항소한다. 그들에겐 결코 반성이라는 단어를 용인할 의지가 없다. 직접적으로 고문과 협박과 회유를 했던 수사관들은 증언을 거부하기도 하고 숨어버리기도 한다. 때론 할 일을 했던 것이라며 항의한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저질렀던 그 흉포하고 파렴치한 짓들을 아예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하다.

 

법원 역시 마찬가지다. 사법부의 권위를 동원하여 '조작간첩'들을 단죄했던 법원은 재심의 무죄선고로 모든 책임을 면하려 한다. 거기엔 사과와 반성이 없다. 과거의 성찰을 판결문에 비출지언정 그 성찰은 결코 법원의 반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의아한 것은 과연 이 '조작간첩' 사건들의 피해자들이 사회적으로 명성 높고, 그것이 도래할 예정이건 아니면 이미 도래했건 간에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과연 이들이, 있으나 없으나 사회적으로 아무런 관심을 끌 수 없는 위치에서 살아가던 장삼이사가 아니라 그래도 동네 어귀에서 한 소리라도 할 수 있었던 유지라도 되었더라면 과연 이들은 '간첩'이 되었을까?

 

만약 그랬으면 애초부터 이들은 간첩으로 조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조작간첩' 사례들을 보면 바로 드러나는데, 언급했던 것처럼 '조작간첩'의 거의 절대 다수는 아무런 힘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이보다 더 명징한 증거가 어디 있는가?

 

혹은, 백보 양보해서 그렇게 한 자리 하는 사람을 '조작간첩'으로 몰았다고 할지라도, 이제 세월이 흘러 그가 재심에서 무죄가 되었다면 언론, 수사기관, 검찰, 법원이 이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 과연 지금처럼 반성의 자세는 접어두고 끝내 자신들의 정당성만을 고집했을까?

 

이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며칠 전에 나왔다. 전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류근일이 근 50년만에 민통련 사건과 관련한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류근일의 행보에 대해선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으나 주목할 것은 이번 재심 판결과 관련한 법원의 행태다.

 

법원은 재심판결에서 "비록 계엄 상황에서 이뤄진 재판이기는 하지만 불법적인 수사와 분명하지 않은 증거에 의해 류 고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이를 50년간 바로잡지 못한 것은 법원의 책임"이라며 "과오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법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덧붙였다.

 

류근일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재심법원이 법원을 대표하여 잘못되었던 과거의 행위에 대해 반성을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법부의 용기라고 칭찬할 일까지는 없겠지만, 이러한 반성의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로 인해 부당하게 피해를 받았고, 아직까지 살아남아 고통의 연장 속에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적어도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들에게 망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참회하여야 한다. 그게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러므로 류근일에 대한 법원의 반성과 사과는 합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류근일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법원의 자세다. 류근일이야 이미 그 당시, 그러니까 민통련 사건이 일어나고 당사자가 무기징역을 받을 당시에도 저 어느 벽촌 어장에서 고기잡이로 삶을 영위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후 류근일은 승승장구하여 대한민국 대표보수일간지 조선일보에서 주필까지 지낸 사람이다. 법원은 이 류근일에게 그토록 진중한 어조로 사과를 했다.

 

반면 가진 것 없는 사람들로부터 생명까지 앗아갔던 '조작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해 법원이 이토록 장중하게 사과한 바를 아직은 보지 못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의 고통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이 법원일진데, 어찌 법원은 이들에 사과에는 그토록 인색한가? 반성도 대상에 따라 강도가 달라지고 사과를 받을 사람도 자격이 달리 있다는 것인가?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구현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는 세상인지라 이러한 기현상이 달리 놀라울 것도 없을법 하건만, 기사를 본 순간 구토가 느껴졌던 이 불균형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랄 수밖에 없다. 형평의 저울을 손에 든 정의의 여신이 법원에 서 있는 것이 다시금 모순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조작간첩' 사건 뿐만 아니다. 또한 단지 사법부의 문제만도 아니다. 어쩌면 내 옆의 사람들이 살가죽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못본척 눈감고 지나갔던 모두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임을 져야 할 존재들은 분명히 가려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합당한 처분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처분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고통은 여전히 고통으로 남아 있으며 고통을 준 자는 고통 없이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의 차원에서, 반성해야 할 조직은 반성해야 한다. 사과해야 한다. 누릴 것을 다 누린 사람에게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조차 사과할 일은 사과해야 한다. 동시에 하염없이 모든 것을 다 잃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도 사과해야 한다. 공정사회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다시금,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9/12 14:20 2010/09/12 14:20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1316
    • Tracked from @se7ensign
    • At 2010/09/13 00:58

    http://blog.jinbo.net/hi/1316 "사과받을 자격"

  1. 무전유죄 유전무죄...
    무권유죄 유권무죄라고 해야 옳을까요?

    어쩐지... 마음 한켠에 씁쓸함이 듭니다.

    행인님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