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싸웠나?
트위터를 알게 된 건 오바마가 트윗질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였는데, 적어도 한국 안에서는 얼리 어댑터가 될 수 있었던 계기를 버린 이유는 단 하나, 이거 하다보면 중독성이 가관일 거 같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삼국지 3로 인해 인생이 뒤바뀌어버린 행인, 온라인 구라질 하다가 하세월 보낸 기억도 있고, 그리하여 과감하게 트윗에 손도 대지 않기로 결심한 터. 해서 여지껏 트윗을 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최근 관심을 끈 일이 있었는데, 그게 허지웅과 고재열의 트윗 논쟁. 원래 싸움질 구경하는 것이 인생의 낙 중에 하나인지라 흥미롭게 지켜봤는데, 어째 결론은 영 흐지부지. 그러던 중 오늘 또 김규항이 이 말싸움의 한 귀퉁이에 슬쩍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어떤 블로그에서 보게 되었다. 그래서 또 김규항은 뭔 소리를 했나싶어 그 동네 나들이까지 하게 되었고.
노회찬이 당직자에게 스마트폰 뿌리면서 트윗으로 소통하겠다고 기염을 토했을 때, 굉장한 이질감을 느꼈었는데, 그 이질감은 도구의 활용이라는 것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전환되는 조짐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문제. 6.2 지방선거 당시 진보신당의 슬로건은 "휴(休) 한국사회"였다. 맞나? 어쨌든 거기 "휴(休)" 들어가는 건 확실한데, 공약의 내용은 슬로건에 부합하게 노동시간 단축을 비롯하여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노대표가 당직자에게 스마트폰을 나눠주면서 밝힌 소회를 보면 이게 영 매치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더랬다. 미국에 갔더니 시도 때도 없이 시민들이 스마트폰 꺼내들고 이메일 확인하면서 업무를 보던 모습에 감동을 먹었다나? 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면서 쉴 틈도 없이 삶에 부디껴야 하는 환경을 조성해보겠다?
물론 스마트폰이 그런 용도로만 쓰이는 건 아니다. 눈뜨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어플들이 온갖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고, 사용자들은 그러한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노동시간의 제한을 없애고 위치추적의 최적조건을 만들기도 하는 스마트폰의 부정적인 측면을 사용자들로 하여금 과감하게 수용하도록 하는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선히 이해할 수 없었던 불편한 이질감은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던 노대표의 발언이 다름 아니라 진보정당 대표의 발언이었다는데 있다.
트윗도 마찬가지. 노회찬 뿐만 아니라 심상정 역시 트윗을 하고, 이젠 왠만한 정치인들은 죄다 트윗을 하고, 애초 트윗을 하니 마니 하면서 실정법 위반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 눈치보던 청와대도 이젠 트윗을 한다. 오바마야 트윗해서 대권을 먹었다고 하지만, 어디 트윗이 투표장에서 기표지에 인주를 박았겠는가?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전도현상이 발견된다. 트윗을 왜 활용하려 했는가? 아니, 트윗은 활용할 무엇이 아니라 활용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허지웅과 고재열의 투닥거림을 보면서 느낀 의아함 중에 하나는 바로 "세상을 바꾼다"는 구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 고재열의 경우, 세상을 바꾼다는 것에 대해 트윗 사용자의 일단이 모종의 합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듯이 보인다. 허지웅 역시 이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인데, 트윗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일단 세상을 바꾼다는 어떤 행위 혹은 목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요컨대 행인이 의아해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트윗이 세상을 바꾸건 바꾸지 않건 간에, 또는 트윗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 논쟁을 촉발하게 된 계기, 즉 바뀌어야 할 세상 혹은 바꾸고 싶은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과연 어떤 합의가 존재하고 있긴 한 건가 하는 것.
이 부분에서 김규항은 행인이 가지고 있는 의문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바뀐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혹은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두 사람의 논쟁에서는 전혀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 김규항의 말대로 그것은 견해차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조금 더 나갈 필요가 있다. 즉 차이를 보이는 견해가 제대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서로 자웅을 겨뤄본 일이 있었는가?
촛불을 보면서 항간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여기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거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촛불이 가지고 있던 함의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세상을 바꾸는 어떤 것으로 승화될 거라고 섣부르게 판단하는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미국산 쇠고기를 한우로 대치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면, 또는 이명박 정권을 노무현 후계자의 정권으로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면 그 섣부른 판단 또한 부당한 판단은 아닐 수 있으나, 더위먹고 주저앉았다는 소들이 진짜 더위때문에 그런 것인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도축하여 판매가 되어버리는 상황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한우고기로 바꾼다는 것은 그닥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구호에 적절하게 조응하는 것이 아닌듯 보인다.
결국 트윗이 세상을 바꾸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논쟁 이전에 필요한 것은 세상을 정말 바꾸고 싶은지, 정녕 그렇다면 어떤 세상으로 바꾸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리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정의사회의 구현, 공정사회의 도래, 뭐 이런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외에 또 다른 어떤 세계상이 따로 그려지고 있는 것인지 이거 도통 모르겠다.
횡설수설이 더 장황해지긴 하는데, 덧대어 본다면, 친이계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는 것은 친박계에 있어서 세상을 바꾸는 거. 한나라당을 군소정당으로 만들고 집권을 하는 것은 민주당에 있어서 세상을 바꾸는 거. 어라? 그런데 이건 뉘뮈럴 친박이 되던 민주당이 되던 내 사는 데 전혀 바뀐 게 없네? 이렇게 되는 사람들에게 있어선 친박도 아니고 민주당도 아닌 뭔가가 확 뒤집어 엎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거.
여기서 또 발생하는 궁금증은 그럼 현재 트윗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길 소원하고 있는가라는 것. 수천 수만의 팔로워를 자랑하는 '파워트위터'들이 있다는데, 그들이 말하는 '파워'가 어떤 것인지 알수도 없거니와, 도대체 그렇게 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트위터리안들이 바꾸려는 세상에 대해 뭔가 알려진 것이 있나?
그러다보니 고재열과 허지웅의 논란 아닌 논란은 싱거울 수밖에 없는 거. 그들이 각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일정한 상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트윗논쟁을 바라보는 관전자의 입장에서는 그들 각자가 가진 바뀐 세상의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김규항도 마찬가지고 행인도 마찬가지지만 비판적으로 관전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이 바라는 바뀐 세상이 무엇인지 그 구획을 정리해내는 것은 또 어렵다.
김규항의 견해처럼 "세상을 바꾼다"고 할 때, 이 구호를 "본래적 엄중함"에 부합되도록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행인은 느끼지 못한다. 삼성이나 엘지가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들의 양식이고. 더불어 이명박을 조롱거리로 삼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김규항의 논리에도 별로 동의하진 않는다. 조롱할 것은 조롱하는 것이 맞다. 조롱할 수준의 것을 학술적으로 논의한다는 것, 이거 코메디다. 그러므로 이명박을 2MB라고 한들 문제될 것은 없다.
반면 견해의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가 어떤 건지 좀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그 차이에 대해 논쟁이 될 때 사실 트윗이 세상을 바꾸니 마니 하는 이야기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거나 아예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 부분에서 김규항은 정보의 내용과 방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것의 중요함은 물론이려니와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내용과 방향을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각축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도실용이라는 현 정권의 노선은 명백히 이데올로기적인데, 이데올로기 투쟁을 낡은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그렇다면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싸움을 해야 하리라.
물론 수단이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는 일도 있다. 우연이 필연으로 전환하는 현상을 납득할만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우연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않았던 현상을 원래의 필연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후의 예언이나 다를 바가 없다. 트윗이 세상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면 그것은 바뀌어야 할 세상에 대한 동의와 그렇게 되어야 할 당위가 있었기 때문이지 트윗이 우연찮게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나저나 진짜 세상이 바뀌긴 하는 거여 어쩐 거여...
제 글에 남기신 댓글을 보고 답글을 달려다 님의 글에 댓글을 다는 것이 적당한 것같아 이리로 왔습니다. 제 글은 굉장히 거칠고 단순한 주장인데 좋은 글이라고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블로그는 글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과 트위터는 말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제가 트위터를 모르니 이렇게 얘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글과 말 중 어느 것이 우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도 트위터를 사용하니까요.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이게 뭔가 혁명적 도구라는 뜻인데(질적인 단절을 가져오는) 아직은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웹의 바다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인터넷이 혁명적 도구라고 믿습니다. 인터넷 덕분에 팔레스타인, 이란, 그리스에서 벌어진 봉기에 네티즌들이 실시간으로 결합하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과거에는 불가능했습니다.
김규항씨의 견해에도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기술의 진보가 가져오는 생활양식의 변화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인간은 항상 주어진 조건 속에서만 살 수 있으니까요. 제가 님의 블로그에서 제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다만 댓글을 쓰고 트랙백을 걸 수 있을 뿐입니다. 아마 고재열씨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만 트위터에서 자신이 가진 힘에 놀라움을 느끼고 좀 과장을 하는 것 같은데, 제가 주목하는건 파워트위터가 아니라 오히려 팔로워들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 파워트위터들은 이들에게 오히려 구속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파워트위터이고싶다면.
기술 그 자체가 "혁명적 도구"죠. 문제는 "도구"가 "혁명"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도구"는 여전히 "반동의 도구"일 수도 있겠죠.
치치님의 글을 보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의 결이 거치냐 곱냐는 것은, 글쎄요, 제 기준에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도 하구요. 님의 글이 거칠다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강물이 흘러야 세상이 바뀐다!
000-2010-911
트윗도 아닙니다.
웹도 아닙니다.
씨티라운드 이웃과 함께 따릉,따-르-릉........
그 논쟁은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가 핵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재열은 스스로를 '파워트위터러'라고 했고, 그의 말처럼 파워트위터러는 트위터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알리기 위해 그에게 RT를 부탁하는 사람들도 많죠.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트위터라는 도구가 아니라 그 권력을 가진 사람, 이라는 것이 허지웅의 의견이었던 것 같은데, 고재열은 기자라는 타이틀이 우습게도 논쟁의 핵심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뭔가 멋진 말을 만들어내려고 해서 논쟁이 논쟁이 아니게 되더군요. 뭐, 그게 트위터의 특성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140자 안에 각인될 만한 말을 만들어라..
여하튼 글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