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집어 던지다...
원서를 보는 순간 뇌활동이 정지하는 현상을 보이는 입장에서 번역서가 가지는 가치라는 것은 책값으로 환산할 수가 없는 거다. 그리하여, 외국어가 현저하게 딸린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필요한 자료가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에는 번역자에 대해 일단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때때로는 이게 도대체 제대로 번역된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라도 대게는 그 경우, 번역서를 읽고 있는 본인의 난독증이 발동한 것이리라 간주하며 제 머리를 쥐어 뜯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간혹 이건 진짜 원문과 대조해보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가 불끈 솟구치더라도, 특히 원서가 유럽 언어로 씌여있을 경우 맥을 놓아야만 한다. 사실 쬐끔 볼 줄 안다고 생각하는 영어나 일어로 된 책 역시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
그럴 때는 그저 '내가 번역하는 것보다는 이 번역서가 더 나을 거야'라는 자위를 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 어찌되었건 간에 이렇게 힘들게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준 사람들이 있는 덕분에 남의 나라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겪어볼 수 있는 거 아니겠나. 그래서 항상 번역하는 사람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정말 어쩌다가 한 번씩은 분노하게 되는데, 이번에 구매한 한 권의 책이 딱 그런 분노를 솟구치게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어떤 작업의 완성을 위해 여러 자료가 필요한 터에 마침 어떤 책이 번역되었다고 하길래 냉큼 온라인 구매를 했는데 그 책이 바로 "반동의 길".
Herman Finer의 1946년 저서인데,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였던 Finer가 Hayek의 The Road to Serfdom(국내에는 "예종의 길" 혹은 "노예의 길"로 번역되어 있음)에 뿔받아서 이를 비판한 책이다. 원 제목은 "Road to Reaction".
노예의 길을 써서 계획경제를 악의 근원으로 규정하고 시장만능과 자유경쟁을 지고지선으로 승격시킨 Hayek는 Keynes를 비롯한 당대의 적수들을 실날한 어조로 비판했었는데, 그런 Hayek조차도 이 책을 증오와 독설로 가득찬 책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이 책을 통해 Finer는 Hayek를 '원색적'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주어 팬다.
워낙 오래된 책인지라 이후 Hayek의 이론적 진척까지 다루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일군의 사회주의자 그룹이 Hayek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고전에 속하는 책이 이 책이다. 바로 그 책이 번역되었다고 하니 Hayek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일파의 이론들을 열심히 씹어먹고 있는 입장에서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리하여 책을 구입하게 되었고, 밤중부터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곤파스의 바람끝이 나무뿌리를 밑둥째 흔드는 새벽에 이르러 행인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따위 번역을 해놓고 책까지 출판해서 권당 13000원을 받아먹을 생각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의문과 분노가 책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게 만든 거.
띄어 쓰기나 단어표기 등의 맞춤법을 수시로 틀리는 것은 예사고, 이미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외래어나 인물명의 표기를 틀리게 하는 것도 다반사. 여기까지는 그래도 용서해줄만 한데, 정작 비문 투성이에다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것에는 대책이 서질 않는다.
워낙 성질이 고약한 행인, 처음에는 황당하다가 점점 승질머리가 곤두서더니 나중에는 허무하기까지 해서, 보던 책을 던지고 온라인 검색을 시작했다.
일단 원서가 존재하는지를 검색했다. 검색능력의 부족인지는 몰라도 국내 도서관 어디에도 이 원서 Road to Reaction은 소장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온라인 서점을 물색해봐도 기껏해야 아마존에 중고책의 가격이 올라와 있긴 한데 이걸 팔겠다는 건지 어떤 건지 확인이 안 된다.
해서 관련 논문들을 검색했더니 일부 논문에서 원서의 인용문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인용문들을 검색해본 결과 이 번역서의 번역은 완전히 엉터리였다. 몇 건의 인용문들을 번역해본 결과도 그렇고, 기왕에 한국에서 번역된 Hayek 관련 서적들에서 Finer의 책에 인용된 Hayek의 글들을 비교해본 결과도 그렇다. 비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미 자체가 달라져버리는 경우가 매 페이지마다 발견된다.
이렇게 확인한 결과, 첫째 번역자가 이 분야에 대해선 전혀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이고, 둘째 필수적 관련서적-예를 들자면 Road to Reaction과 대조되어야만 할 The Road to Serfdom-과의 대조조차 해본 바가 없으며, 셋째 아예 번역 자체를 해본 적이 없거나 해본 경험이 현저하게 부족한 상황이고, 넷째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과정에서 번역자는 물론 출판사의 편집인조차 퇴고를 하지 않았다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과연 이 추측이 합당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번역자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번역자인 "정환용"이라는 사람은 영국 Sheffield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데다가 현재 전남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영어로 된 Road to Reaction을 번역할만한 충분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분 전공이 지역개발학이다. '개발'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함의는 물론이려니와 그 '개발'이 특히 개인의 인성에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물질에 관계된 것이다보니 신자유주의 이론과 아예 관계가 없는 분야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어렵겠다. 이건 이 분야에 대한 행인의 무지때문이기도 한데, 어쨌든 그렇다 치고.
따라서 이 번역자는 충분히 번역을 할 자질을 갖추고 있고, 해당 분야에 대해 일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해당 지식을 갖출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만 하다.
더불어 역자 서문을 살펴보면 "본 역서와 하이에크의 역서를 비교평가하여, 계획의 경제적 적법성 논거확립에 일조하고, 계획인론의 정립에 보태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라고 번역의 변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이 사람은 Hayek의 The Road to Serfdom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몇 가지 추측 중에 첫째, 둘째, 셋째 부분은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더구나 역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학과교수들이 도움을 주었고 특히 번역자의 아내가 초고를 교정까지 해줬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넷째 가정, 즉 퇴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번역자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행인이 추측했던 위 네 가지 조건은 다 아니라는 것이 정황상 나타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이따위 번역서가 나오게 되었는가? 결론은 단 하나다. 이거 본인이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이 번역자의 프로필과 그의 말(역자 서문)을 믿는다는 전제에서 보자면, 이 책은 본인이 번역한 것이 아니다. 혹시 대학원 석사 1학기 수업 과정에서 원서 하나 교재로 정해놓고 원생들에게 번역발표 시킨 다음에 그 원생들의 번역문을 묶어서 자신이 번역한 것처럼 발표한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번역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원인이 설명되긴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이름을 건 행위 자체가 용납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초벌번역이라고 하기에도 영 어설픈 이 번역서에 대해 번역자 본인은 "본서를 번역함에 있어 우리말로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급적 의역을 삼가고 직역하여 저자의 뜻을 전달하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건 심하게 말해 직역도 아니고, 거의 구글 번역기에 돌린 수준이다.
그냥 손가락 빠는 것도 이젠 지겨워서 가끔 소금과 설탕을 번갈아 찍어 빨아먹을 정도로 궁핍에 적응되기 시작한 백수 3년의 행인이 거금(!)을 들여 구매한 책이 이따위라는 건 너무나 화가 나는 일이다. 번역자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이건 거의 거지 똥구녘에서 콩나물 대가리 빼먹은 거 아니겠나...
이 책을 구매하는데 소요된 비용이며, 책을 읽다가 뇌가 가열되어 상당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입은 것이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을 잠도 못잔채 웹서핑을 하느라 날려버린 것 등등에 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고픈 생각도 있으나 일단 그건 참기로 하고.
다만, 혹시라도 이 블로그의 글을 번역자나 또는 책을 출판한 전남대학교 출판부 관계자들 중 일부가 보게 된다면 부탁이 있다. 학자적 양심을 걸고, 또는 교육계와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걸고 이 책 전부 수거해서 다시 찍던지 아니면 그냥 폐기하던지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물론 당연히 이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은 혹여라도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하시더라도 쌩돈 13000원 주고 사서보실 생각 마시고 가까운 도서관에 가셔서 열람하시기 바란다. 열람해 보다가 급 흥분하거나 좌절하여 책을 집어 던짐으로서 발생하는 파본은 당연히 본인이 책임지셔야할 것이고.
더불어 만일 블로그 보시는 분들 중 이 책 원서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제본을 해서 한 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다. 번역할 능력은 되지 않지만 유용하게 잘 보도록 하겠다고 약속드린다.
아우... 돈 아깝고 시간 아깝고...
행인님의 [책을 집어 던지다...] 에 관련된 글. 나도 최근에 쓸까말까 하다가 안 썼는데...;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 내 젊음의 자서전 마르크 샤갈 다빈치, 2004 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책이!!!! 세상에 이런 책이 있다니!!!!!! 사실 샤갈을 굉장히 좋아하고... 잘 모르지만... 옛날에 봤을 땐 색깔이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날 우연히 본 그림이 너무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깜짝 놀랐던 것이다. 그런데 서점에서 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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