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을 추억하며...
뎡야사마의 불질독촉덧글에 삘받아 올리는 포스팅...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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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가 어언 00년 전...
행인이 콧물 찔찔 흘리며 허옇게 버즘 핀 얼굴로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서울 변두리 산동네 어귀(물론 지금은 과거의 모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찾기 어려운 곳으로 변했다만)의 한 국민학교(요샌 초등학교이나 걍 과거 삘을 살려 국민학교로 표기 ㅡ.ㅡ)엔 그분이 있었다.
말 그대로 지존...
이름은 가물가물하니 기억이 나지 않으나 어차피 이름이 뭐였는지는 상관이 없다. 그넘은 그냥 지존이라고 표현하면 될 넘이었으니까.
무슨 지존이냐 하면...
연필 따먹기의 지존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넘은 전 세계의 연필과 볼펜을 다 따먹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불철주야 연필따먹기의 비급을 연마한 끝에 당금 최고수 연필따먹기 지존의 반열에 오른 넘이었다.
참고로 연필따먹기 혹은 볼펜 따먹기에 대해 설명하자면.
1. 책 올려놓고 공부하라고 만들어놓은 책상의 윗면을 깨끗하게 치워놓는다.
2. 깨끗하게 치워진 책상 위에 일전을 벌리기로 합의한 당사자가 각자 연필 혹은 볼펜 등 필기구를 하나씩 꺼내 놓는다.
3. 경기 방식은 매우 간단한데, 1대1 혹은 다대다 매치플레이로 자신의 필기구를 손가락으로 튕겨 상대방의 필기구를 먼저 책상 아래로 떨어뜨리면 승리!
4. 각각 한 번씩 손가락으로 튕길 기회가 주어진다.
4. 승리자는 상대방의 필기구를 가볍게 취득한다.
일종의 돈놓고 돈먹기...가 아니라 펜 놓고 펜 먹기 게임인데, 이걸로 재벌될리는 만무하다만, 어쨌든 선생님들의 일제단속에도 불구하고 초딩들의 전의를 불사르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는 게임이었던 거다.
이 피튀기는 연필따먹기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넘이 있었으니 그넘이 바로 다름 아닌 그넘, 불멸의 킹왕짱, 지존이었다. 이미 저학년때부터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이넘은 학교 성적은 바닥을 바득바득 기는 주제에 연필이나 볼펜 한 자루 달랑 들고 전교를 누비며 교내의 필기구를 종류 불문하고 자신의 수중에 넣고 다니기 바빴더랬다.
이넘에게 각종 필기구를 따먹힌 자들의 눈물이 도합 몇 말이더냐...
그저 한 번 이겨보겠다고 제 아버지 비장의 만년필을 들고왔던 넘이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던 적도 있었고, 기필코 한 번은 이겨보리라고 아예 모나미 볼펜 몇 타스를 들고 왔다가 앉은 자리에서 손을 털고 일어났던 넘도 있었더랬다.
언제나 득의만면 의기양양하던 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거나 학교에서 공로상이나 모범상 같은 거 받아본 일은 없다만, 암튼 남들이 관심두지 않는 분야에 일찌감치 관심을 두고 성실히 노력한 끝에 그넘은 그넘 나름대로 어린 나이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자부심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때는 바야흐로 국민학교 말년병장이라고 할 6학년의 어느날.
지존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일대 사단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 때 6학년은 13반 까지 있었더랬는데, 행인은 9반, 그넘은 8반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날도 그넘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촌음을 아껴가며 이반 저반을 넘나들면서 볼펜을 수거해가기 바빴었다. 그리고는 룰루 랄라 휘파람 불며 집으로 갔던 것이었다.
문제는 그 며칠 전에 학교에서 성적표를 나눠줬다는 거.
성적과는 아예 친분관계를 두지 않던 녀석인지라 당연히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않았음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맹모삼천지교를 교육의 지표로 삼아오던 우리의 부모님들이 예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을 턱이 없다는 거. 분명히 성적표 나올 때가 되었는데 성적표를 보여주지 않고 있던 이넘의 행적을 면밀히 살피고 계시던 지존의 어머니께서 하필 그날 당신의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신 것이다.
즐거운 얼굴로 집에 돌아온 놈과 어머니는 이런 대담을 나누셨더란다.
어머니 : "아들, 성적표 나올 때가 지났는데 왜 성적표는 안 보여 주는 건가?"
지존 : (흠칫, 화들짝, 깜놀...) "어... 성적표, 안 나왔는데..."
어머니 : "딴 넘들은 받았다는데 이녀석이 거짓말을. 가방 이리 내놔봐."
지존 : "헉... 그건 아니되옵니..."
어머니 : "어라? 요넘이 왜 이래? 가방 내놔!"
지존 : "죽어도 가방은 못 내드리겠사와..."
어머니 : 퍽! 퍼퍼퍼퍽!!!
두 팔과 두 다리로 가방을 감싸안고 방구석을 데굴거리며 어머니께 가방만은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했건만 중과부적이로다...
이리하여 지존은 어머니께 가방을 빼앗겼는데... 아뿔싸...
가방에 어찌하여 교과서며 노트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고 오로지 있는 것이라곤 연필이며 볼펜이며 각종 필기구들 뿐이 없단 말이냐... 이넘이 한석봉 흉내를 내려 글씨 연습만 했다고 하더라도 삐뚤빼뚤 휘갈겨 쓴 종이쪼가리라도 있어야 정상인데, 이물질이라곤 아침에 싸가지고 간 빈 도시락밖에 없고 어찌 이리 순수하게 필기구만 가방에 잔뜩 있더란 말이더냐...
놀라 기절직전까지 가신 어머니, 이 어린 녀석이 혹시 동네 문방구라도 털었던가 싶어서 닥달을 하시기 시작하는데, 너 이 많은 연필이며 볼펜이 다 뭐냐, 어디서 났냐 물으셨단다. 그랬더니 이넘이 처음에는 "줏었어요..."라고 변명을 했다나?
어머니가 아무리 학교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다고 하실지라도, 그래 전교생이 모월 모일 모시에 한데 모여 운동장 한 구석에 자기 필통의 내용물들을 죄다 쏟아놓고 가지 않는 이상 이 많은 필기구를 입학할 때부터 6년 간 모으지 않고서야 줏어서 모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터.
출처모를 필기구의 양에 압도당한 것도 잠시, 이젠 자식이 도둑질에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싶어 분노게이지 급상승한 어머니가 결국 사랑의 매...라기 보다는 빗자루 몽둥이를 거꾸로 쥐고 후드려 팰 기세를 보이자, 상항 급박해진 우리의 지존, 도둑놈으로 몰리느니 이실직고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결국 연필따먹기로 축적된 재산임을 고하게 되었더라.
도둑질 하는 거나 준 도박이라고 볼만한 연필 "따먹기"를 하는 거나 어머니 입장에선 기가 차고 어이가 상실될 일이었을 거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런 짓을 하다뉘 이건 대명천지에 용서가 되지 않는 일. 그리하여 그 이후 상황은 안 바도 비됴. 아무튼 밤 새 주어 터진 것이 분명하긴 한데.
암튼 진짜 사단은 다음날 벌어졌다.
아침에 등교를 하는데 멀찌감치서 우리의 지존이 어머니에게 끌려 학교 정문을 통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장면을 부연 설명하자면, 멀리서 보더라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어머니께서 한쪽 어깨엔 온갖 필기구로 가득차 있던 그넘의 가방을 둘러 메시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지존의 귓볼을 잡아 끌고 계셨고, 보기에도 처량맞기 이를 데 없이 불쌍한 표정으로 우리의 지존은 귓볼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머니의 손끝에 끌려 질질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부터 열끓는 이마 위에서 바로 계란 후라이라도 만들어낼 만큼 분통이 터진 어머니께서는 자식의 귓때기를 잡아 당기면서 6학년 교실을 1반부터 돌아다니시기 시작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긴 하나 성실히 조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학생의 본분을 다지며 책상앞에 앉아 있던 행인. 그러나 얼마 후 행인의 반으로도 지존과 어머니 일행이 들어오게 되었다.
여지없이 귓때기를 붙잡혀 질질 끌려들어오는 지존과 울그락 푸르락 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면서 이건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는데, 아무튼 교탁 앞까지 지존을 끌고 오신 어머니께서 거두절미하고 딱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한테 볼펜하고 연필 잃은 애 있어? 있으면 나와서 자기 거 찾아가."
아마 1반부터 계속 이렇게 돌아다니셨나보다. 얼마나 많은 넘들이 자기 필기구를 찾아갔는지는 모르겠으되, 어머니 심정으로는 이렇게라도 해야 분이 풀리셨으리라. 암튼 자기 필기구 찾아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무도 그 앞으로 나가진 않았다.
행인만 해도 그넘하고 연필 따먹기를 수차...가 아니라 수십차 했으되, 때론 연필이나 볼펜을 잃은 적도 있지만 때론 따먹은 적도 있고, 따져보면 그넘이나 나나 한 짓이 거기서 거긴지라 낯짝 두껍게 이게 제 거에요 하고 찾으러 나갈 심사가 서지도 않았더랬다. 아마 다른 넘들도 다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했으나...
역시 어딜 가나 이상한 넘이 있기 마련이다. 뒷쪽에 있던 넘 하나가 머쓱하니 일어나 "저 볼펜 잃었었는데요..."하더니 앞으로 주섬주섬 걸어나가고 있었다. 어라, 이거 봐라...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가방 뚜껑을 벌려 보여주며 "자, 찾아봐"하시니 그넘이 슬슬 볼펜 더미를 뒤지다가 요거, 요거, 요거 하면서 서너개의 연필과 볼펜을 골라냈다.
다음 순간, 어머니가 "얘, 그거 이리 줘봐." 하시더니 선별된 몇 자루의 필기구를 받아 지존에게 보여주며, "이거 얘 거 맞아?"하며 확인을 요구한다. 어차피 확인해봐야 지존이 따먹은 볼펜이 몇 백자룬지 연필이 몇 천자룬지 계산도 되지 않는 통에 그게 누구 볼펜이었는지 연필이었는지 알래야 알 수가 없는 거. 대충 살피는 척 하더니 우리의 지존, 맞는 거 같다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러자 어머니,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볼펜과 연필로 지꺼 찾겠다고 나간 놈 머리통을 사정없이 주어패며, "너도 이노무 쉐키야, 앞으로 이따우 짓 할 거야 안 할거야? 앙?" 하시며 훈계를 하신다.
이 난리를 한바탕 치루고 어머니는 또다시 지존의 귓때기를 잡아 당기며 다음 반으로 넘어가셨다. 아침 댓바람부터 생난리가 한 번 터지고 나서 좀 잠잠해질까 했는데, 잠시 후 상황이 어떻게 되나 싶어 복도를 내다보니 조회하러 들어오시던 선생님들 몇 분이 무슨 구경거리 난 것처럼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지존의 담임선생님께서 어머니와 뭔가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던 우리의 지존은 그 옆에서 고개를 떨구고는 말이 없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조회를 했고, 흥분을 가라앉힌 가운데 수업을 기다리고 있던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면서 지존이 들어왔다.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교탁 앞으로 간 지존은 가방 안에서 필기구를 되는 대로 한 뭉텅이를 꺼내더니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야, 니들 거 알아서 찾아가."
아아... 그넘이 드디어 연필따먹기 지존에서 산타클로스로 변신한 것이었다. 물론 전적으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었을 터이나 어쨌던 한 순간 사건으로 개과천선한 그넘이 자신의 평생의 전리품을 그렇게 아무런 댓가 없이 13개 반에 걸친 6학년 전원에게 골고루 분배했던 것이었다. 물론 그넘은 아마도 속으로는 이를 악물고 통곡을 했으리라. 자신의 분신과 같았던, 그 애지중지하던 연필이며 볼펜 등등을 그렇게 세상에 내보내야하는 아픔이 어디 보통 아픔이었겠는가...
오늘 불현듯 그넘 생각이 왜 났는지는 모르겠는데, 괜실히 그넘이 보고싶네... 중학교 들어가면서 헤어지고설랑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영 소식도 모르겠고. 뭐 어쨌거나 그 사건 이후 졸업할 때까지 연필따먹기 하러 각반을 돌던 짓을 완전히 끊었던 걸로 기억되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훌륭한 청년...이제는 장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은 된다만.
아아, 어머니에게 귓때기 붙잡혀 학교로 끌려들어오던 녀석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제는 00년 전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구나. 약간은 좀 슬픈데 이거...
ㅎㅎ 그게 진짜 그 연필 쓸 생각은 없는데 그 연필 전체에 대한 집착은 이해가 가요, 연필이라기보다 연필이 가져다 준 승리감< ㅎㅎㅎㅎ 무려 국민학교 때 얘기군요< ㅋㅋ
저 그리구, 프린트하는 예시로 이 글 가져다 예시로 좀 쓸게염 싫으시면 말씀해 주세연
사용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ㅎㅎ
그나저나 아직도 불질 적응도가 매우 낮아서 쑥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