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가 아니다, 혹은 아닐까?

어느 모임, 어느 장소에서 생판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전 아무개라고 해요"라고 인사하고 악수를 하더라도 "우리 사이 좋게 민쯩이나 까볼까요?"라며 서로 그놈이 진짜 그놈인지 확인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사실 이건 좀 미스테린데, 앞에서 지가 아무개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넘을 뭘 믿고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걸까? 마빡에 지 이름을 문신해넣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5인 이상 인우보증인을 항시 대동하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세상은 별 문제없이 돌아간다. 이런 안정적 구조가 의심되고 신원확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은 대부분 이권때문이다. 뭐 가끔은 꼰대싸움에 나이 따지느라 민쯩까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돈이 걸린 문제가 발생하면 신원확인을 해야 하는데, 간단하게는 쯩을 까는 거고 뭐 더 필요하면 각종 등초본에 인감까지 떼어가거나 집안 식구들 호구조사까지 해야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각종 등초본에 인감증명까지 떼어온 넘이라고 할지라도, 까놓고 그게 그넘 건지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까지 해도 문제가 생기면 그때부터는 공권력의 범위다. 공권력이 개입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법적으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범죄라는 것이 벌어진 것. 신원도용, 신분위장은 그 자체로 각종 법률에 범죄행위로 규정되어있다.

 

공권력이 동원되어 그 진위를 확인하고 위법행위에 대해 처벌까지 할 정도라면 이미 상황 끝이다. 범죄행위를 하고자 마음먹은 자는 얼마든지 지 하고픈 대로 할 수 있다. 내가 아닌 남이 되고 싶으면, 한국처럼 신원인증에 거의 세계 최강급의 수단들을 동원하고 있더라도 쏠리는 대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후에 벌어진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지가 지면 된다.

 

범죄의 발생 원인을 전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만 돌려버리는 것은 아주 편한 방법이긴 하다만, 여전히 구조자체가 범죄를 가능하게 하거나 쉽게 범죄를 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경우를 배제할 수는 없는데 신원위조가 그런 경우다.

 

행안부가 전자주민증을 만들어야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주민증 위변조를 들고 있는데, 특히 변조의 경우 절대다수가 청소년, 즉 만 19세가 되지 않은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얘네들이 민쯩에 뽀샵질을 해서 벌어지는 '범죄'라는 것이 기껏해야 유흥업소출입이나 술 담배 구입 정도인데, 어쨌건 현행법 상 이것도 범죄는 범죄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당연히 '애들'은 유흥업소에 출입해서는 안 되고 술 담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결의 때문이다. 아직 "판단력이 떨어지는 청소년"들을 보호하자는 숭고한 취지를 십분 이해는 하지만 솔까말 동의가 되지는 않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

 

자칭타칭 국보 양주동이 십대도 되기 전에 호주가의 길을 걸었다는 건 그 사람이 국보니까 괜찮고, 21세기 고삐리들은 판단력이 떨어지므로 술마셔서는 안 된다는 거, 이거 뭘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닌 말로 강남 유흥업소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성접대까지 받아가며 술처먹는 사회 고위급 인사들은 "판단력"이 출중해서 그런 건가? 이건 뭐 전형적인 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삽질...

 

암튼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말이 옆으로 새는 걸 여기서 그만 두고 하던 말 계속 하자면, 신원확인 수단이라는 것이 워낙 강력하다보니 신원확인용 쯩 하나만 제대로 뽀샵질 하면 내가 아닌 남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이라는 거.

 

이걸 박경신은 "신뢰성의 패러독스"라고 표현하던데, 표현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서 민쯩 하나로 상대방의 모든 것이 확인된다는 신념이 뿌리박혀 있는 한, 신분증에 IC칩을 박던 몸 안에 그걸 박던 근본적인 현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거.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예가 하나 생겼는데, 신원절도를 밥먹듯이 하며 다른 이의 행세를 하며 범죄를 저질렀던 자가 잡혔단다. 이 사건의 중요 키포인트는 신분증의 위변조가 아니라 '변장'이었다는 거.

 

앞서 포스팅에서 언급했지만, 전자주민증이 도입될 경우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모든 업소에 주민증인식기가 설치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현재까지 행안부의 주장대로라면 칩에 저장된 주민번호 확인과 신분증 진위여부 확인 정도가 그 인식기의 성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보듯이 전자칩에 내장된 정보가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변장'엔 대책이 없다. 결국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선 각 업소마다 지문인식기까지 설치되어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이 도출된다. 오호라... 본질은 이거였던가...

 

전자주민증에 대한 집착의 강도가 다분히 농후한 덕후기질로 나타나고 있는 행안부의 입장에서 이번 사건이 전자주민증을 도입해야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지 아니면 전자주민증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가 될지는 두고 봐야겠다.

 

여기서 고전적인 질문 하나는 여전히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사람은 누구? 전자주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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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9 12:52 2010/10/29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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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얼굴근육운동시키는 행인님의 글 잘 읽고 갑니다.^^

    • 웃는 근육을 자극시켜드려야 하는데 혹시라도 화내는 근육을 자극시키지는 않았는지 걱정이네요. ^^;;

    • 넘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칼날같이 곤두서지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님의 글에 마음이 남도의 산등성이같이 유유하고 잔잔해지네요.^^

  2. 전자주민증 문제의 본질은 국민의 신상정보를 전자화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생활에 대한 전자기록을 남기도록 강제하는 데 있습니다. 행안부는 이러한 본질을 호도하며 법률언어의 모호성을 이용하여 온갖 말장난, 안하무인, 대국민 기만을 하구 강행하는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면서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도록 온갖 술수를 다 쓰겠죠. 반드시 무산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