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단상
신앙인과 정치인이 구별되는 지점은 윤리의 형태이다.
신앙인의 윤리는 지향의 종점인 동시에 타협의 여지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신앙인은 자신의 신념이 종국에 가져올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한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 그가 질 책임이란 오로지 귀의한 종교가 약속한 내세의 어디에 있기 때문에 현세의 상황에 그의 신념이 미치는 영향이란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신앙인은 자기 윤리에 대한 타협이나 절제를 할 수가 없다. 할 필요조차 없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자가 불교신자에게 부활과 윤회의 절충점을 찾을 일이 없다. 서로 건드리지 않겠다는 정도가 최선이라고나 할까.
정치인의 윤리는 완전히 다른데, 그는 자신의 신념이 가지고 온 결과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져야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확신이 깊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정치적 과정에서 실현하기 위해선 일정한 타협이 필요하게 된다. 신앙인이 천당과 지옥의 어느 한 곳을 자신이 져야할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정치인은 정치행위로 인해 야기된 결과에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혁명가'들은 정치활동을 하지만 윤리관에 있어선 신앙인에 가깝다. 제도 자체를 부정하고 그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 굳이 현 체제의 정치집단과 타협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아마추어리즘을 원칙이라고 강변하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혁명이 완수되기 전까지 그 아마추어리즘이 아마추어리즘인지를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도권 정치구조 안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은 자신들의 윤리적 신념을 관통하기 위한 과정에서 수위를 조정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래에 어떻게 하겠다는 구도는 당연히 전제되어야 하지만, 지금 당장 대척하고 있는 온갖 정치세력과의 선명성만을 앞세워 언제 올지 모르는 종국의 세계를 현실에 풀어놓을 수는 없다. 그건 혁명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면 신앙인은 그 세계를 풀어놓을 방법도 없다. 왜냐하면 신앙인이 이야기하는 훗날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인류가 비석아래 잠 들 때에야 가능한 일이니까.
그래서 정치인이 어떤 정책을 내놓을 때는 백 보, 이백 보 앞선 정책을 낼 수도 있지만, 실제 그런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기껏 한 발, 혹은 두 발 나가거나 반 발짝 나가는 이야기를 할 때도 있다. 이 경우 혁명가들이 볼 때는 개량이거나 변절이거나 혹은 굴복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혁명가들의 비판은 과감하게 무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반 발짝이 되었든 한 발짝이 되었든 그것이 전체적인 그림을 뒤집는 방향이 아닐 때에 그런 의지가 가능하다.
후퇴가 아니라면, 위축될 필요가 없다. 다만 두려운 것은 그것이 진짜 앞으로 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방향을 바꾸는 것인지를 알 수 없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