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남기는 잡상
일기장에 낙서하듯 긁적이는 글이라도 뭔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해본다.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이렇게 쉬운 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안타깝다. 일방적인 관계의 단절은 일정한 책임의 방기를 동반한다. 그렇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단절을 겪어야 하는 상대방은 나에게 무책임하다거나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돌이켜볼 때,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던 어떤 책임들은 사실 없어도 되는 책임이었던 게 대부분이었다. 금전적인 계약관계도 없었고, 내가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도 없었다. 그저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면서 해주면 좋았을 그런 일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관계가 끊어지게 되는 순간, 상대방은 내게 기대했던 것들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게 됨을 먼저 생각한다. 모든 책임은 내게 돌아오게 되며, 상대방은 졸지에 피해자가 된다. 그게 두려워서 지금까지 관계를 정리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 한다. 기왕에 책임이라는 것은 상호성에 기반해야 하는 것. 나는 책임을 지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은 모든 관계를 더 이상 붙들고 있지 않겠다. 더 나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제 마음에 겨워 스스로 책임을 떠맡는 짓은 이제 결단코 하지 않으련다. 내 지나온 시간들 중 3분의 2 이상이 그 짓 하다가 날아갔고, 그 결과 내 모습은 오늘날 여기 머물러 있다.
이런 마음을 처음 이야기한 상대방은 불필요한 비난을 받게 될 거라며 우려했다. 괜찮다. 이젠 그따위 비난 쯤이야 얼마든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엔간한 일들에서 전부 손을 떼기로 하는데 별다른 공포감은 들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경로로 나의 현재 상황과 심기를 전달받은 어떤 사람은 이해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이해한다면 그냥 이해만 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 거다. 그리고 난 나를 이해해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정녕 지금의 나를 이해해줄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따위 행동들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므로. 나도 그가 왜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고로 그도 나를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한다는 헛소리를 할 이유도 없다.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 중 하나는 통신수단이다. 온라인의 sns, 스마트폰 등 모든 것이 다 방해물이다. 전화는 계속 오고, 메신저의 알람은 수시로 울린다. 받아보면 결국 마음을 돌리려는 소리이고, 그 소리의 뒷면에서는 너만 힘드냐는 힐난이 깔려 있다. 힘들면 다 관 두든가. 왜 나에게 힘듦을 요구하는가. 귀찮기도 하려니와 때로는 화가 난다. 이 경우 방법은 모든 통신수단을 폐기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될 경우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린다. 쓰잘데기 없는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도, 창자를 채워야 살아남을 거 아닌가?
블로그로 다시 돌아오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페북이고 텔레그램이고 메신저고 간에, 불필요하게 말을 나누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고 싶지도 않다. 전화는 더욱 그렇고. 듣기 싫은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말을 맞춰주고 싶지도 않다. 그리하여 글은 블로그로, 전화는 당분간 몇몇 사람들과 통신선을 유지하다가 연말쯤에는 아예 없애버리는 것도 고려 중이다.
나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건지 결정되기 전에 구태의연한 관계를 다시 만들지는 않겠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겠지. 리셋기능이 부여되지 않은 인생은 그래서 버겁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시작하는 것이 부당하진 않으리라. 그렇게 다시 시작해보는 과정에서 과거에 얽혔던 것들이 별무소용이라면 차라리 다시 그 관계들을 복구하는 시간의 낭비는 하지 않겠다. 정 안되면 그냥 홀로 고립되는 것도 무방하다. 사실 나는 그 편이 훨씬 더 몸에 익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