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multitude)의 함정

9월 1일자 경향신문에는 임혁백 교수의 주장이 실렸다.
관련기사: 임혁백-촛불 다중의 균열 - 경향신문

요지는, 촛불은 다중(mutlitude)이 주도했는데(임 교수는 '촛불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혁명'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지만, 촛불은 결코 혁명이었던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촛불에 의해 만들어진 현 정권이 다중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함에 따라 정권에 대한 지지가 떨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임 교수는 '다중연대'의 특징으로 "전통적인 계급, 시민, 민중과는 달리 탈권위, 탈집중, 저항성"을 꼽고 있다. "다중은 ... 대표를 통하지 않고 온.오프라인을 통해 직접 참여한다. 다중은 대표들이 만든 정책의 일방적인 소비를 거부한다. 다중은 정책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생산.공급하는 프로슈머다. 다중은 정치적인 평등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평등한 권리, 경제적 이익, 정보, 그리고 여가의 사회적 소유를 주장한다."라고 임 교수는 지적한다.

2008년 촛불 이후 한참동안 '다중'에 대한 이야기가 횡행했다. '다중지성'이라는 말도 돌았고, 하트, 가타리, 네그리 등 자율주의자들의 논리가 다시 부각되기도 했다. 일일이 찾아볼 시간은 없지만, 아무튼 그 당시 내로라 하는 당대의 지식인과 논객들이 다중에 대해, 다중지성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 논의들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어디론가 다 사라졌었다.

애초 '다중'이라는 집단적 존재양식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시의 촛불은 기존의 운동적 관점에서는 설명이 곤란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다중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증식되었던 건 일종의 수순에 가까웠다. 그러나 당시 논의에서 '다중'의 성격을 정립하고 정의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고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 다중은 이런 거다라고 했던 거의 모든 논의들은 기왕에 나왔던 인민, 민중, 대중 등에 관한 정의의 변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임 교수의 이번 칼럼이 당시의 기억을 더듬게 만드는데, 앞서 인용한 다중에 대한 그의 성격규정은 실상 저것이 다중의 특징이라고 할 뭔가가 없다. 대표를 통하지 않는다고? 그게 가능한가? 다중이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가끔 직접민주주의의 효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와 상통하는 듯 보인다. 직접민주주의는 대표를 통하지 않는다! 정녕 그러한가? 그건 마치 시장이 수요와 공급의 적정선에서 가격을 형성하는 시장주의자들의 환상과 비슷하다. 시장이 오로지 하나만 존재한다면 보이지 않는 손의 가동이 가능하겠지만, 다종다양한 시장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이 서로 상호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민주주의가 아무리 당사자의 이해관계를 직접 관철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할지라도 그 방안이 오로지 일대일의 관계에서가 아닌 한 교조적으로 실행될 가능성은 없다. 다중이 아무리 직접 뛴들, 대표자 없이 스스로가 대표자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외에도 말할 부분은 많지만 생략하자. 좀 더 볼 것은 임 교수가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이질적인 다중들의 다양한 요구를 맞춤형으로 수용하고 실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다중연대를 구성하고 있는 집단들의 분리주의적 이탈을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앞서 다중의 정의가 별반 실익이 없는 것임을 보았는데, 그에 따르면 임 교수의 이러한 현상진단은 결국 아무짝에도 쓰잘데기 없는 말잔치에 불과하다. 저 지적 중에, "다중"이라는 말을 "사람들"로 바꾸고, "다중연대"를 "지지자"로 바꿔보자. 분리주의적 이탈이라는 어려운 말에 현혹되지 말고, 그냥 지지자들이 떠나고 있다고 바꿔보자. 정리하면 저 말은 "이질적인 많은 사람들의 여러 요구를 다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지지자들이 떠나고 있다"가 된다.

맞춤형 요구라고 하는데, 이거만큼 이상한 것이 없다. 말 그대로 촛불에 합류했던 '다중' 중에는 자신도 누구 못지 않게 자녀들에게 돈 쏟아 부어서 평민 이하 계층은 꿈에도 꾸지 못할 과외 시켜주고 뒷바라지 했는데, 누구는 과외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줄 하나 잘 잡아 말 한 마리 끼워주면 이대를 가더라는 현상에 빡친 강남의 부유층도 있다. 이들 중에는 집값이 오르길 바라고, 건물지대를 높일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맞춤형 요구라면 어디까지 가야 할까?

"여성차별의 철폐, 임금차별, 빈부와 신분의 양극화 해소, 갑을관계 등과 같은 사회적 차별과 특권을 철폐해 달라는 이질적인 다중들의 요구"는 과연 이질적인가, 아니면 그와는 관계 없는 다른 이질적인 요구를 가진, 예컨대 강남의 집부자, 건물부자들이 그 촛불의 다중 속의 일원이었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이질적인가? 결국 문제는 계급과 계층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고, 이를 부정한 채 다중의 개념을 가져오는 순간 오히려 문제는 다중의 다양한 요구를 맞춤형으로 다 못 들어주는 것이 부담 스러워 다 들어주려고 애쓰다가 망해가는 문재인 정부의 현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임 교수는 컬럼 말미에 "미투 가해자를 처벌하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며, 구입 가능한 주택을 제공해주고, 교육 양극화를 시정하며, 갑을관계를 철폐하는 등"이 '집 나간 다중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선 '다중'이라는 개념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파성을 명확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 촛불의 다중 속에는 이 따옴표 안에 들어간 일들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다중의 일원들이 있었다. 503을 밀어내는데까지는 이들의 이해관계가 합치되었을 수 있겠지만,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부터 이들의 이해관계는 합치하지 않았을 수 있고, 갈수록 더 벌어졌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정황을 무시한 채, 촛불을 '다중'으로 퉁치고, 이해관계를 맞춤으로 들어주라고 하면서, 동시에 당파성을 벗어날 수 없는 대안들을 제시하는 건 실천적으로 수렴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앗쌀하게, '다중'이라는 개념을 굳이 여기서 찾을 이유가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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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1 13:14 2018/09/0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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