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광하지 않을 것이다

내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이 그다지 냉소적인 인간형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나름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비관보다는 낙관을, 포기보다는 도전을, 부정보다는 긍정을 더 가치있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열광하지 않기로 한다.

난 저 촛불들 혹은 태극기들이 결코 어떠한 집단적 소통도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예감한다. 저들이 회한과 눈물로 서로를 얼싸안고 이해하면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줄 날은 오지 않는다. 저들보다 더 큰 위력의 무엇인가가 중재를 하지 않는 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 Deus Ex Machina, 혹은 먼치킨의 강림. 물론 나는 이따위를 기대하느니 그냥 술이나 한 잔 빨면서 내 정신이 나가는 걸 바라는 게 훨씬 현실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 결국 광화문의 태극기와 서초동의 조국수호는 융해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양극의 대립이 초래하는 기적은, 이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거. 발화의 주체와 발화의 주제와 발화의 내용은 상극인 듯 보이지만, 그들의 행태와 그들의 이상과 그들 행위의 종착점은 같은 곳으로 이어진다. 합리와 이성의 상실, 그리고 감정의 고양과 적대의 극단으로 인한 내전. 이 기적의 한계는 그것이 종교적 환희의 고양으로 이어지는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종말론이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 지금의 대한민국에 한정된 정치적 대립에 국한된 이야기일까. 기실 이러한 융화될 수 없는 대립은 세계 곳곳에 번져 있으며, 지리와 역사와 인종과 국가와 경제상황과 교육과 그 밖의 수많은 요소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대립들'이 도착할 종점의 양상은 다르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생태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 거기 상호 달리 이해관계를 가지는 자들의 대립이 과연 21세기 내에 인간들의 각성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난 대안의 제시와는 별개로 때로는 인류의 절멸만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 될 수밖에 없음을 피력하게 되는데, 어쩌면 이러한 생각은 점점 더 사람들 사이에 번져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이런 이야기들.

INSIDER: Teens are pledging not to have kids until the government takes climate change seriously

그렇다. 한국 국민이 지구환경에 기여하는 가장 큰 방법으로 민족적 자연소멸을 택한 듯한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숭고한 이상이 세계적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마침내 국제사회의 보편적 지향이 될 것임을 조심스레 예측했던 바가 있었는데, 이러한 예측이 현실로 드러나게 되니 놀랄 수밖에.

궁극의 해결책. 비로소 실현 가능한 생태위기의 해소방법이 나왔다고 보지만, 나는 이에 대해서 역시 결코 열광하지 않겠다. 

Deus Ex Machina, 혹은 먼치킨이 등장하지 않는 한, 지구환경 따위 돈 앞에 뭔 소용이냐는 입장을 가진 갈등의 한 축은 이들의 도전을 붕괴시키기 위한 물리적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이에 대응하는 다른 한 축은 멸종의 위기 앞에 두려움에 떨면서 진영을 해소하게 될지 모르겠다.

내가 만일 지금 이들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이들의 의지에 경의를 표하고 동시에 이들의 행동에 열광하였는데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처럼 사태가 경과한다면, 나의 열광은 얼마나 겸연쩍은 일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열광하지 않은 채, 이렇게 기사를 링크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10/07 09:39 2019/10/07 09:39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