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호치민 4 - 여성의 날

호치민에서 본격적인 뚜벅이질을 시작한 건 18일이었다. 금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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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아침, 숙소에서 본 호치민 시내 전경

이곳도 스모그가 장난이 아니다. 이 날은 그나마 아침 공기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서울 하늘처럼 하늘에 뚜껑을 씌워놓은 것처럼 검은 막이 보인다. 높은 건물에서 보는지라 더 심하게 보일 수도 있었겠다.

호치민 시내 자체에는 거대규모의 공장시설이 그리 많지 않지만, 워낙에 이 동네는 오토바이가 많고 낡은 차량도 많이 다니기 때문에 대기질이 상당히 좋지 않다고 한다. 이번 여행은 그냥 휴양이며, 그래서 별다른 계획이 없고, 오로지 걸어서 호치민 일대를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하자 친구는 "겁 없는 관광객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그 말 뜻이 뭔지를 불과 한 시간 안에 실감하게 되었지만서도...

거리를 걷다가 조금은 낯선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떤 까페에 들어가려는데 미소년이라고 할만큼 깔끔한 청년들이 투명한 비닐로 감싼 장미꽃 한송이씩을 들고 있다가 들락거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남성에게는 주지 않고 여성에게만 나눠주고 있었다. 그 까페에서 무슨 이벤트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인 토요일, 이런 모습이 더 많아졌다. 무슨 날인가 싶어서 궁금했는데 이건 뭐 베트남 말을 할 줄 알아야 물어보지. 영어공부라도 열심히 했어야했다는 후회가 꼭 이럴 때마다 밀려온다. 아, 다시금 서울 가면 영어공부를 시작해봐야겠다. 뭐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어차피 안 된다, 그거. 지금 이렇게 정리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갔다 온 다음부터 영어책은 커녕 할리우드 영화 한 편 보길 했냐. 헐...

그렇게 궁금해하다가 친구에게 물었더니 여성의 날이 다가와서 그렇게 한단다. 여성의 날이라니? 3월 8일 말고 여성의 날이 또 있나? 10월 20일은 베트남 여성의 날이란다. 베트남은 세계 여성의 날은 물론 베트남 여성의 날도 성대히 치른다고 한다. 국경일 + 축제일 정도로 생각하면 될라나? 암튼 그렇다고 한다. 이런 정도도 모르고 있었다니...

1930년 10월 20일에 베트남 여성연합이 출범을 했는데, 베트남 여성의 날이 바로 이 날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면, 예전에 하노이에 갔을 때 통역을 하던 베트남 학생이 자랑스럽게 베트남은 여성들이 주체로 사는 나라라고 했던 게 얼핏 기억난다. 약 2천년 전에 베트남이 중국 후한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할 때, 그 맨 앞에 섰던 지도자가 쯩 자매라고 한다. 그로부터도 용맹 무쌍한 여성 장군들이며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고 이를 기리는 전통이 있다.

그런 설명들보다도, 불과 몇 십 년 전 베트남이 대미투쟁을 하던 당시, 베트남 여성들의 활약상은 놀라울만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없었고, 그 이전부터 여성 영웅들에 대한 독특한 존중의 의식이 전쟁을 거치면서 국가의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연대의식과 존중이 제도적으로 자리잡는 가운데 여성의 날을 성대히 기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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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 여성 전사들의 활약상

중국과 싸우고 프랑스와 싸우고 미국과 싸우는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의 동맹군이었고 혁명동지였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국가 차원의 감사의 표현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도 여성은 언제나 베트남의 여성과 같은 역할을 했을 터인데, 한국은 글쎄다, 3.8 여성의 날에도 요식적인 행사 빼곤 뭔 축제 비스무리한 게 있는지 모르겠다. 

당일인 20일 일요일. 불과 3일의 뚜벅이 생활로 발등과 뒷굼치가 까지는 부상을 입고, 무릎관절과 발목관절에 통증이 온다는 핑계로 택시로 이동을 하기로 하였다. 마침 친구가 사무실에서 처리할 일이 있고 만날 사람도 있다고 하여 같이 나가기로 했다.

숙소 로비에 나갔더니 화려한 공주 옷 같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들이 여럿 보인다. 엄마나 할머니로 보이는 주변의 어른들 역시 꽤 깔끔한 옷을 차려 입고들 있었다. 손에 손에 꽃을 들고 있었고, 어디 행사라도 나갈 듯한 분위기에 매우 밝은 표정으로 환하게들 웃고 있었다. 여성의 날에는 다들 화사하게 차려 입고 행사에 나간다고 한다. 토요일까지 일을 하는 베트남 회사에서는 어제 토요일에 여직원들에게 꽃과 선물을 돌렸다고 한다. 흥미롭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

조사를 해본 것은 아니므로, 베트남에서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평등하게 보장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2017년 자료를 보니 당시 성 격차지수로 한국이 144개국 중 118위였는데, 이 때 베트남의 성 격차지수는 69위였다고 한다. 친구 말로는 한국에서보다는 훨씬 여성의 지위가 높은 것 같고, 그에 대해서 국가적인 노력도 상당하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베트남 여성의 날은 그냥 평소에 대접받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하루 정도 보상해주는 그런 의미의 차원이 아님은 분명해보인다. 과거의 투쟁에 대한 고마움과 앞으로 더욱 평등한 사회를 향한 다짐 정도가 베트남 여성의 날에 담긴 뜻이 아닐까 싶다. 한국도 한국 고유의 여성의 날을 만들진 못하더라도, 3.8 여성의 날이 축제처럼 기려지고, 매일매일이 여성의 날인 것처럼 성평등한 세상이 되었으면, 소수자를 포함해서 모두가 평등한 그런 날을 만들어가기를 바라본다. 

베트남 여성의 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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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4 22:15 2019/10/24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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