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와 기본소득
이 기사가 돌길래 봤다. 좀 지난 기사이긴 한데, 눈에 번뜩 띄는 구절이 있다. 이걸 이제야 보다니...
'타다' 브랜드가 요즘 말썽이다. 어제는 재판도 있었다. 한때 '공유경제'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에게 어필한 바가 있다. 요새도 이 말을 쓰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이 '타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쏘카의 이재웅 대표가 작년 이맘때 쯤 시사인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더랬다.
Q: 어떤 사회계약을 생각하나?
A: 정부가 기본적인 사회안전망과 기본소득을 보장할 필요가 커질 것이다. 플랫폼에서 2시간씩만 일해도 기본 생계는 유지할 수 있게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적어도 기본적인 생활은 국가가 보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회가 지속 가능할 것 같다. 이게 안 되면 변화를 감당하기 어렵다. 혁신을 일으켜서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의 세금도 더 늘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을 보면서, 이재웅이 원하는 사회가 '사회주의국가'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거다. 이재웅은 전형적인 자본가인데, 전형적 자본가가 사회주의세계를 원한다는 건 아주 희박한 확률일 터이니까. 엥겔스 정도라면 모를까 싶지만, 이재웅을 엥겔스와 비견할 점은 찾을 수 없다. 어쨌건 그건 아니고.
이 대목은 기본소득을 바라보는 자본가들의 가장 교과서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기본소득이 가지고 있는 맹점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구절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분배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할 책무가 없다. 사람의 생계(기본적인 생활)은 국가가 수행하는 재분배에 기초할 것이며, 자본가들은 이 재분배가 기능할 수 있을만큼의 부담만 지면 된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더 이상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의 생존을 책임질 필요가 없게 된다.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임금을 주면 그만이다. 이때 국가에 의한 재분배는 보충성의 원칙을 벗어나게 된다. 즉 국가에 의한 재분배는 국가 이전의 사회관계에서 발생하는 분배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라는 본연의 의미를 탈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가능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생산수단이 사회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이를 바라지 않고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권력도 이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국가가 생산수단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행하는 재분배라는 것은 자본이 제공하는 재원의 크기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최고의 복지국가조차도 국가의 재분배기능만으로 국민들의 생계를 부족함 없이 보장할 수 없다. 보다 풍요로운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때 더 많은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야만 현재의 삶을 유지할 가능성이 생긴다.
"플랫폼에서 2시간씩만 일해도 기본생계는 유지할 수 있게"할 의무는 원천적으로 이들을 고용한 고용주에게 있다. 고용주가 노동자의 기본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려고 노력한 후에야, 다른 노동자들과의 형평 등을 맞추기 위해 국가의 재분배가 작동하는 거다. 이재웅이 요구하는 것은 이 기본을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피고용인의 생계를 책임지지는 않지만 이윤은 확보할 수 있는 자본가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재웅의 논리이며, 이 논리를 위해 효과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누차 이야기하는 거지만, 기본소득론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은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만 할 뿐이다. 그런 망상은 이 인터뷰를 잘 들여다본 후에 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