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목욕탕의 유쾌함과 불쾌함
강화 고려산을 한 바퀴 돌았다. 흥미로운 산이긴 한데 곳곳에 군사시설이 박혀 있는 터라 영 껄끄럽다. 입산을 하지 못하게 하든가 아님 군부대를 어떻게 정리하든가. 산에서 이처럼 극과 극의 유쾌함과 불쾌함을 동시에 느꼈는데 내려와서도 마찬가지.
등산이라고 하긴 좀 뭐한, 어쩌면 산책이라고 하는 게 딱 어울릴 듯한 산행을 마쳤는데 살짝 돋은 땀이 갑자기 차갑게 부는 바람에 식어버리고 순간 소름이 오른다. 약간 한기도 들고 해서 목욕을 하고 가자고 강화 시내로 나갔다. 원래 강화에 오면 노상 들리는 초지대교 근처의 사우나가 있는데, 가끔은 구석에 남아 있는 옛날식 목욕탕을 다니기도 한다.
어제 선택된 곳은 강화 중앙시장 A동 건물 옆의 '유성 목욕탕'이다. 뭐 그렇다고 치고, 동네 한바퀴를 둘러보다 발견한 목욕탕이 있었다. 저녁 9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안내문이 붙어 있다. 보아하니 상당히 오래된 목욕탕인 듯 해서 오늘은 여길 가자 이렇게 결정을 했다. 저녁을 먹고 들어갈까, 아니면 목욕을 하고 난 후 저녁을 먹을까 선택의 기로에 섰다. 산을 내려 오면서 간식을 살짝 해서 배가 아주 고픈 건 아니니 목욕부터 하자고 들어갔다.
입욕료는 1인당 7천원. 카운터를 보고 있는 분은 연세든 아주머니였는데 입욕료를 냉큼 받더니만 7시 전후로는 영업을 끝내야 한단다. 들어간 시간이 6시 35분인데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조금 연장을 해줄 수는 있다고 한다. 이게 뭔 소리냐, 아니 그럼 문을 닫아야지. 돈을 받기 전에 말을 하던가. 불만의 표시를 하자 그럼 1시간 정도 있다 나오면 되겠냔다. 어이가 없어서 그냥 나오려는데 짝꿍이 1시간만 있다 나오자고 하는 통에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내가 말여, 딴 건 모르겠는데, 내 몇 안 되는 삶의 즐거움 중 하나가 바로 목욕인데 말여, 이건 좀 아닌데... 뾰루퉁한 기분이었지만 일단 탕에 들어갔다. 완전 옛날 탕이다. 나 빼고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이 달랑 두 명 뿐이었다. 어릴 때 동네에 있던 그런 탕. 사우나시설이 되어 있었는데 들어가보니 역시 그 옛날 동네 목욕탕에 있던 조그만 사우나 공간. 난 이런 조그만 공간에 들어오면 아주 그냥 옛 추억에 폭 잠기게 된다. 특히 두 가지 경험.
하나는 매너에 관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그 조그맣고 밀폐된 공간은 어른 두어명이면 앉을 자리도 없이 꽉 찰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더랬다. 한쪽에는 스팀이 돌아가고 있는 파이프라인이 있었는데, 각목으로 안전장치를 해놨다고 하더라도 그쪽에 서 있게 되면 몸이 쪄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뜨거웠더랬다. 어쩌다 자리가 하나 나서 앉게 되더라도 어른이 들어오면 일어서서 자리를 비켜주던 그런 곳이었다.
좁고 좁은 그 장소에서 서로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밀리면 스팀파이프에 몸이 데어버리니. 그러나 이런 류의 매너는 당연한 거였고, 더욱 심각한 매너가 있었는데 절대로 그 공간 안에서 방구를 꾸면 안 되는 거다. 간혹 누군지 모르게 방구를 꾸고 나가버리는 일이 있었는데 재수 없게 냄새 고약한 것을 만나면 그 안에 있을 수가 없게 된다. 거기에 더해 냄새 빠질 때까지 환기를 해야 한다. 아주 그래서 그 좁은 사우나 시설에서 방구를 꾸는 건 대역죄에 버금갈 죄악인 것이었다.
어릴 때 몇 번 그런 방구에 당한 후 나는 방구를 싸지르는 어른들을 저주했고 경멸했더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 괄약근 조절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가끔은 사우나 찜질공간에서 항문을 개방하게 된 이후로 어릴 적 그 어른들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내가 방구를 놓게 된 때에는 사우나들이 제법 커져서 뭐 방구 좀 꾼다고 한들 큰 문제가 되지도 않을 뿐더러, 나는 그래도 매너가 있는 자이므로 일단의 신호가 올 때에는 아예 들어가질 않으니 괜찮다.
또 하나의 추억은 친구놈하고 객기를 부리던 거였다. 어릴 때 뭘 그렇게 서로 지기가 싫어서 티격댔는지, 유독 그놈하고 둘이 사우나에 들어가면 서로 더 버티는 걸 무슨 내기처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둘이 캡틴 큐 큰 거 한 병을 들고 그 좁은 공간에 들어갔다. 그때는 제법 머리가 굵은 후였던데다가 나와는 달리 그놈 쌍판이 건드리면 칼부림 낼 거같은 인상이었던지라 둘이 그 안에서 술을 빨았는데 누구 한 사람 뭐라고 하는 일이 없었다.
서로 연신 캡틴큐 뚜껑에 따른 술을 마시면서 네가 먼저 나가라, 아니 난 괜찮으니 힘들면 먼저 나가라 이 쥐랄을 하다가 기절을 하고 말았다. 뭔가 훅 하고 찬바람이 부는 듯해서 눈을 떠보니 목욕탕에 있던 사람들이 그놈과 나를 밖으로 꺼내놓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둘러보니 그놈 역시 기절을 한 모양인데, 마침 눈을 뜨고 나처럼 주변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때 그 녀석이 갑자기 자기 옆에서 쳐다보고 있던 아저씨의 팔뚝을 붙잡으면서 "아저씨 누가 먼저 나왔어요? 저 쉑히가 먼저 나왔죠?" 이 지랄을 하는 거다. 욕만 드럽게 처먹고 샤워도 못하고 쫓겨났는데...
아, 옛날이여 하면서 그 옛날 동네 목욕탕과 똑같이 생긴 사우나에 앉아 희희덕 거리다가 나와 냉탕에서 몸을 식히고 온탕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아주 기냥 몸이 확 풀린다. 으슬으슬하던 기운도 싹 빠져 나가고. 이렇게 온기를 즐기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시계를 보니 벌써 30분이 넘었다. 와, 이거 뭐 목욕탕 들어와서 물만 묻히고 나가야 할 판이니... 짜증이 다시 났으나 어쩔 수 있나, 비누칠 하고 샤워 하고 몸 말리고 옷 갈아 입고 대충 1시간을 채워서 나왔다. 이미 그 사이 먼저 왔던 객들은 벌써 다 나간 터라 원래 이 목욕탕이 이런가보다 했다.
그 이후에도 카운터 계시는 분과 소소하게 불쾌한 일이 있었으나 생략. 암튼 추억의 목욕탕은 좋지만 이렇게 영업하면 좀 곤란하다. 다음번에는 오지 않겠다. 흥!
저녁나절인데 동네가 좀 괴괴할 정도다. 일요일 저녁의 시골이니 그렇기도 하지만 강화군청이 근처인데다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성공회성당, 인천노동사목과는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천주교성당 등 유수의 종교건물과 철종의 추억이 담긴 용흥궁이며 고려궁지 등이 있어 관광지로도 알려진 곳임에도 이상하게 텅 빈 듯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일까.
강화는 은근히 정이 가고 생각이 많이 나는 곳이다. 여기 어딘가에는 연전에 돌아가신 이모가 모셔졌을 것이고,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이종사촌형들과 으쌰으쌰 하면서 갔던 전등사도 있고, 짝꿍이 차를 처음으로 몰게 되었을 때 간장게장 먹자고 왔던 곳도 여기고, 교동도, 석모도 일주를 하면서 이것 저것 놀기도 참 많이 놀았다. 동네 목욕탕들도 꽤 남아 있고.
아, 그러고보니 동네 목욕탕 기획 투어를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강화에서만 벌써 몇 군데 그런 곳을 발견했는데, 재밌기도 하려니와 쇠락해가는 그 모습들 속에서 세월의 변화라는 걸 실감하기도 괜찮고. 세월이 가는 게 이렇게 서글픈 면도 있겠지만, 그러면서도 또 그 옆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모습들을 보면 마치 물이 흘러가는 것과 비슷할 듯하다. 앞의 물은 흘러 가고 뒤의 물은 다가 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