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의 함정

뭐든 단순하면 확 온다. 하지만 그런 것이 한 번에 훅 간다.

기본소득론을 보면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 기본소득 찬성론자들의 논리는 매우 직관적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단순명쾌하다보니 사람들이 확 빨려들 여지가 많다.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충분성, 정기성, 현금지급의 원리. 얼마나 간단한가?

그런데 구멍이 너무나 많다. 원래 인류는 의심이 많은 영장류다. 처음엔 그럴싸 한데 자꾸 들여다보면 뭔가 허전하다. 기본소득이 그렇다. 몇 가지 질문에 답이 막혀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예를 들어 충분성. 도대체 얼마를 줘야 충분한가? 이게 답이 나올 수가 없는 질문이다. 75억 인류는 자기만족을 위한 75억개의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문이 하나 둘 제기되다보면 결국 논리의 명쾌함은 논리 자체가 허접한 것이었음으로 드러난다. 계속되는 문제제기에 답변을 못하거나 지체되면 기본소득 논리 자체가 붕괴한다. 이걸 막아야 한다. 그런데 애초부터 논리 자체가 구멍이 많은 상태에서 점점 커져가는 구멍을 막아야 되니 결국 한계에 봉착한다. 그 한계에 다다를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아무말 대잔치다.

한겨레: [2030리스펙트] 기본소득의 시간/이은지

필자는 문학평론가라고 한다. 문학평론가로서의 소양은 잘 모르겠으나 경제/사회/복지/정책 분야의 소양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칼럼이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어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이 칼럼이야말로 기본소득론자들이 펼치는 아무말 대잔치의 전형이다.

"사회주의자와 생태주의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했다고 필자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오히려 자유주의자들과 시장주의자들이 더 강력하고 더 치밀하게 기본소득을 주장해왔다는 건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르면서 그랬다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정도의 소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게으름을 비판받아야 할 거고,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면 그건 그냥 아전인수일 뿐이다.

이 칼럼에서도 오랜 세월 논란이 되는 문제가 서두에 제기된다. 바로 '그림자 노동'에 대한 대가를 임금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가사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는 건 뭘까? 가사노동을 위해 제공된 노동력은 임금으로 환원된 후 해당 임금에 준하는 어떤 대가를 어디선가 받아야 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밤중에 일어나 야식을 해달라고 해서 나름 솜씨를 발휘하여 자녀에게 맛있는 밤참을 먹인 후 설겆이를 하였을 때, 이 때의 '그림자노동'은 얼마의 임금으로 환원해야 그 가치에 부합할까?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고 힘들 때, 건강보험을 비롯한 각종 사회보험이 환자 본인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도록 작동하는 것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손을 붙잡고 간병하며 밤을 샜을 때, 이 때의 행위를 '그림자노동'으로 간주하고 임금으로 환원한다면 그 임금은 얼마여야 할까?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의 불안정한 생계를 뒷받침하는 건 기본적으로 고용관계를 명확히 하고 그에 합당한 임금을 직접 주는 것이다. "자본의 이윤 추구와 기술 혁신"이 지들 멋대로 "일자리가 급속도로 줄어들"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주어진다고 할 때, 그 '기본소득'의 세원이 자본으로부터 나올 때, 결국 당연히 선행되어야 할 '기본'이 흔들린다.

칼럼이 이야기하듯 기본소득은 가난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는 그냥 패스하자. 이건 뭐 더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기본소득이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이 누릴 당연한 권리라는 논리 역시 그냥 넘어 간다. 이거 금민이 또 책을 써서 횡설수설하고 있던데, 공유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는 계급투쟁의 장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논의를 진행할 수 없는 거다. 그냥 그게 다 우리 권리에요 하면 자본가가 그 권리 나눠주나? 자본가들이 "아 그래서 내가 세금 내잖아" 이러면, 세금 좀 더 내달라는 거 외에 뭘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암튼 뭐 그냥 이 수준에서 정리하자.

이 칼럼의 말미에는 아무말 대잔치의 백미를 보여주는 구절이 나온다. "기본소득을 실현한다는 것은 우리의 비대해진 욕망의 크기를 줄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나 참, 듣다듣다 별 정신나간 소리를 다 듣겠다. 이 말은 기본소득의 기본적인 존재이유를 부정한다.

원래 기본소득이라는 건 비대해진 욕망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를 해소해놓고 시작하자는 취지에서 등장한 거다. 우선 먹고 자고 입는 것에서 적어도 짐승수준에서는 벗어난 후 그때부터 알아서 욕망을 만족하라는 거다. 그런데 욕망은 커녕 최소한의 필요도 감당하기 어려워지니 기본소득으로 이걸 해결해보자고 기본소득을 내세우는 거다. 그런데 뭐가 어떻다고?

기본소득을 아예 복지국가원리와 상충하는 이야기라고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프레시안: "기본소득과 복지국가 원리는 상충한다"

이 칼럼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거다.

"기본소득론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주의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적으로 모든 이가 급여를 받아야만 성립한다. 반면에 복지국가의 보편주의는 '보편적' '보장'을 뜻한다. 내가 건강하다면,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면, 아이도 없다면 당장 복지혜택을 못 받는다. 그러나, 아플 때, 실직했을 때, 아이가 생겼을 때 누구든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보편주의가 성립한다."

기본소득의 가장 큰 특징인 '보편성'에 대해 그 성격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기본소득론자는 "누구나 차별없이 조건없이"를 보편성의 의의로 제시했다. 그런데 그것이 위 인용문에 나오는 보편주의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물론 난 프레시안의 칼럼에서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원리를 대척점에 세우는 것에 대해선 다른 견해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최소한 이런 글들은 좀 본 후에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크다. 그냥 자기들 머리에서 상상으로 직조된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말 대잔치를 하면 어떻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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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4 18:55 2020/05/0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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