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잘 밤에 잡생각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할 줄 아는 사람이 부럽다. 쉽게 정 주지도 못하지만 한번 준 정을 쉽게 끊어내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내 단점이니.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그 땐 세상이 흑백과, 명암으로 선명하게 갈려져 있었다. 아니 그렇게 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절엔 관계를 끊는 것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쉬웠던 듯하다.
하지만 이 세상이 온갖 색깔로 가득차 있고, 그래서 섣부르게 모든 걸 양자로 구획했다가는 그 어느 쪽에서도 서기 어려움을 알게 되면서 나는 회색분자가 되었고 개량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철이 덜 들어서인지, 웬만한 사람들보다는 나름 구획짓는 게 제법 빠른 편인데다가 입장이 서면 그거 여간해서는 잘 안 뒤집는 건 여전하다만.
허나, 글쎄다. 물론 나는 법원 안에 주차한 조국의 차를 물티슈로 닦아내는 저 사람들과 일면식도 없으면서도 그 행위의 구차함에 슬몃 비웃음을 짓기도 했다. 언젠가는 써먹으리라 생각하며 짤방도 떠놨으니.
헌데 지난 조국 사태를 지나면서 "세상에, 이 사람이 어찌 이런 말을"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오게 한 꽤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난 놀랐고, 혹시 내가 뭔가 사고가 틀려먹은 게 아니었던가 자책하기도 했고, 내 저런 사람들을 동지라고 믿고 살았던가 자괴감에 쩔기도 했다. 비웃음은 나오지 않았더랬다. 그보다는 생각할 수록 화가 치솟았다. 페북을 접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난 그들과 깔끔하게 지난 인연을 정리하고 훌훌 털 깜냥이 없다. 김규항은 그들이 날 배신한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오해한 거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변했는데, 난 그들이 변하지 않을 거라 믿어왔던 것일 뿐이다. 정말 그런가?
난 아직도 평등과 정의로 무장하고 세상을 비판하던 사람이 갑작스레 실정법주의자로 변모하여 "조국이 무슨 법을 위반했느냐?"라며 목소리를 높일 때 뒤통수를 후려 패던 그 골때림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김규항의 말과는 달리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진정한 동무가 삼성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이율배반이 어떤 문제가 되는지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조국을 지지하면서 김용희를 지지하는게 왜 모순인지를 알지 못하니까.
그럼 나는 김규항의 말마따나 이들과 훌훌 털고 정리하면 끝나는가? 그냥 그들은 그렇게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그렇게 살 거 같으면 나는 왜 운동을 해온 거지? 혼자 그렇게 살 거 같으면 진작에 보살계를 지키다가 해탈을 하든지 아니면 선도를 수행하다 우화등선 하든지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평론가의 사고방식과 내 사고방식이 다를 수는 있겠다만, 나는 아직도 훌훌 털고 갈 길 가라는 김규항의 덕담이 영 탐탁치가 않다. 지지고 볶아도 서로 부딪쳐야 피떡이 되어 주저 앉든 뭔가 수를 내든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