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유로 2008이 기대된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네델란드는 '토탈 사커'라는 혁명적인 전술을 구사했고, 세계 축구계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토탈 사커'의 원류인 네델란드는 사실 1974년 월드컵 출전조차도 불투명했던 상황이었다.

 

원래 당시 네델란드는 국대경기보다 클럽경기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아약스와 페헤노르트의 리그 양분과정에서 엄청난 세력싸움이 있었고, 선수들이 클럽팀에서의 위치 때문에 대표팀 소집을 거부하기까지 하는 등 국대조직 자체가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월드컵 참가를 위한 경비조달도 어려워서 모금으로 경비를 충당했고, 지역예선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본선 5개월 전에 급거 감독이 바뀌었다. 게다가 국대에 뽑힌 선수들은 보너스를 요구하면서 협회와 충돌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휘봉을 맡은 사람이 리누스 미헬스(Rinus Michels)였다. 리누스는 전원공격, 전원수비라는 말 그대로 포지션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 전술은 전 세계의 축구팬을 경악시키면서 오렌지 군단의 위상을 한껏 드높혔다.

 

물론 토탈 사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감독의 탁월한 전술기획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미축구에 못지 않은 개인기를 구사하면서 '하늘을 나는 네델란드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요한 크루이프,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공이 있는 곳 어디나 출몰했던 요한 네스켄스, 루트 크롤 등 선수들의 기량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공을 가지고 있는 선수와 공을 갖지 않은 선수간의 빠른 이동과 공수 전환, 공을 가진 상대편 선수에게 순식간에 4~5명의 선수들이 달라붙는 민첩함과 집요함, 무엇보다도 요한 크루이프의 중량감. 토탈 사커는 이렇게 서독 월드컵이 선보이는 새로운 축구의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현재 축구는 실제 과거 오렌지들이 구사했던 토탈 사커처럼 포지션 분업을 완전히 폐기한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토탈 사커의 기본적 맥락, 즉 모든 선수가 전 시간 동안 한결같이 뛰어다닌다는 그 핵심은 오히려 더욱 확고한 틀로 자리잡고 있다.

 

74년 서독 월드컵 이후 20여년이 지나 벌어진 이번 2006 월드컵은 토탈 사커의 새로운 버전이 등장했다. 2006 월드컵에서 각국 축구가 보여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감독의 전술기획능력이 그라운드 안에서 벌어지는 쟁투의 내용을 확연히 결정짓는다는 것, 둘째는 '수비'라는 포지션을 가진 선수들의 활약이 '공격'이라는 포지션을 가진 선수들과 거의 같거나 오히려 더욱 활동적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이번 월드컵을 보는 새로운 맛이었다. 물론, 4백 시스템이 하나의 전형처럼 세계축구계를 지배하면서 수비를 담당한 선수들이 전방공격에 쉴 새 없이 가담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보여준 플레이는 이러한 상식선의 이야기를 넘는 수준이었다.

 

반짝반짝하는 대머리를 종횡무진 번뜩이던 칸나바로, 상대 선수들을 정신없이 만들면서 그라운드를 누비던 네스타, 최종수비지역은 물론 미드필드를 사정없이 흔들어놓은 잠브로타...

 

말루다와 접전중인 칸나바로... 쫘식... 잘 생겼단 말야... 쩝...

 

이들의 포지션은 모두 수비다. 그러나 월드컵 경기를 보신 분들은 모두 알겠지만 이들의 플레이는 사실 자기 포지션이라는 것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것이었다.

 

프랑스 팀은 또 어떤가? 갈라스와 아비달의 공격가담력은 미드필드의 태풍같은 존재였던 마케렐레만큼이나 역동적이었다. 그 숨도 쉬지 않고 달리는 듯한 이들의 플레이는 시종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미드필더들의 전방위적인 경기운용 역시 수비수들과 마찬가지다. 현재 첼시에서 뛰고 있는 가나의 에시엥은 공격과 수비에서 전천후 활약을 보여주는 미드필더다. 그의 발끝에서 경기가 이루어진다는 평을 받는 마케렐레 역시 공수 양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다.

 

이렇게 따지자면 수도 없는 선수들이 호명될 터이지만, 어쨌든 이들의 플레이는 단지 그들이 어느 포지션에 있는 선수냐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단지 이들의 플레이가 멀티플레이어로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만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기 위치, 즉 원래의 포지션에서 그 포지션이 담당해야할 임무를 충실히 소화해 내는 기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닌 말로 프랑스의 왼쪽 윙백인 아비달이 자기 위치에서 뻥뻥 뚫리면서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아비달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떻게 보면 자기 위치에서 충실한 자가 그 밖에 다른 분야에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가 다시 거론된다. 지 위치에서 쥐뿔 암 것도 못하면서 여기 저기 오지랖 넓은 행동을 해봐야 아, 저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구나 하는 평가보다는 쥐랄 옆차기하고 있다는 욕을 먹는 현상. 바로 그거란 말이다.

 

어이쿠... 그러고 보니 행인은 지금 자기 위치에서 충분히 제 역할 하면서 이렇게 온데 별 희안잡다구리한 것까지 참견질 하고 있는 것인지... 반성해볼 일이다... 뒌장...

 

암튼 2006월드컵을 보고 난 후, 2008 유로를 기다리는 기대감이 더 커졌다. 많은 선수들이 바뀔 것이고 이번 월드컵에서 선보였던 신예들과 또 어딘가 숨어있을 선수들이 대거 등장하게 될 2008년 유로. 거기서 또 다른 전술과 또 다른 플레이들이 어떻게 눈앞에 펼쳐질까를 기대하는 것. 이것도 축구를 보는 또다른 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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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6 06:33 2006/08/26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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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돈벌게 되면 ... 행인님이랑 스포츠 잡지나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 ... 아 ... 저도 한 때는 축구를 좋아했는데 ... ... 네덜란드는 요한 크루이프 이래로 참 좋아했던 스타일의 팀이라는 ... ^^*

  2. 손윤/ ^^;;; 제 글 때문에 잡지 안팔릴 겁니다... ㅜㅜ

    참 궁금한 것은 한국에서 야구팬과 축구팬이 서로 싸우는 이유가 뭘까 하는 겁니다. 축구 좋아하는 저도 어쩌다가 야구보면 참 재밌던데...

    네델란드는 행인이 즐기는 플레이를 하는 팀이라서 좋아합니다. 요즘들어 약간 맥이 빠진듯 하지만요... ^^

  3. 이게 아마도 야구와 축구를 제로섬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 이분법적 사고 ... ... 양극단만이 존재하죵 ... 일상적인 사고방식 속에는 ... ... 독재 정권이나 흑백의 논리에서는 상당히 파급력이 커다는 효과도 있지만 ... ...

  4. 손윤/ 그러게 말이에요... 모든 스포츠는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는 건데... 저는 골프를 극도로 혐오하지만 골프경기를 가끔 TV로 볼 때 그것도 상당한 재미가 있더라구요. 룰을 알면 더 재미있고 그렇죠.

    행인은 사실 야구가 어려운데요, 그건 아마 꾸준히 보면서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축구는 쬐끔의 데이터라도 있으니 짱구를 굴리면서 볼 수 있어 더 재밌는 거구요.

    스포츠에 대한 극단의 분리적 사고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상당히 경직되어 있고 여유가 없다는 징표가 아닐까 합니다. 넘 심한 비약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