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법 위의 존재

2004년,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 역사의 한 획을 그으며 원내 입성을 했던 그 해 연말, 정확히 11월 16일, 국회로 들어가던 천영세 의원의 차량이 경찰에 의해 강제수색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튿날, 행자위에서 이영순 의원이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이었던 허성관을 앞에 두고 질의를 했다. 경찰이 불법적 행동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였다. 허성관은 당당하게 적법절차였다고 주장했다.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절차를 위반한 것이 아니냐고 하자, 허성관 왈, "법을 잘 몰라서..."

 

그러나 곧 허성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형사법까지 다 알아야 하는 겁니까?"

 

이정도 대답이 나오게 되면 어이가 없어지는 법이다. 누가 지더러 형사법까지 다 알라고 했나? 경찰의 행위가 불법이었고 이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것일 뿐. 경찰의 행위가 불법이었는지의 여부, 그거 물경 500개 조문에 달하는 형사소송법을 "다 알아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공무원이, 그것도 행정자치부 장관씩이나 된 사람 정도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영장주의원칙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될 일이다. 이사람, 어떻게 장관씩이나 되었을까?

 

문제는 경찰의 불법행위에 있다. 법을 수호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경찰이 임의로 법규를 위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 OECD 회원국가의 경찰이 할 짓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도 버젓이 이런 행위는 국회의사당 정문에서 벌어지고 있다. 천영세 의원의 경우는 그나마 의원이었으니까 이렇게 불법성 여부가 도마에 오를 수 있었던 거다. 의원뱃지도 달지 못한 불쌍한 인민들은 국회 의사당으로 차를 몰고 들어갈 때마다 왜 왔는지를 확인당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선 수색조차 감수해야 한다.

 

허성관이 잘 모르겠다고 잡아 떼던 형사소송법에는 영장주의원칙이 선명하게 규정되어 있다. 매우 상세한 규정을 두어 영장의 청구와 발부, 집행에 대한 절차를 정하고 있는 것은 인신에 대한 구속이나 개인의 생활영역에 대한 국가공권력의 개입을 최소한의 범위 내에 두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공권력의 행사로 인해 개인이 받아야 하는 권익의 침해를 줄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사소송법에 정하고 있는 이러한 규정들은 시시때때로 휴지조각이 된다. 그 법률 규정의 최종 집행자가 되어야 하는 사법당국이 버젓이 규정을 어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20일, 부산 경찰청 소속의 경찰들은 전교조 부산지부 건물을 새벽에 들이닥쳐 전교조 부산지부 통일위원회 자료집 <통일학교> 조사를 명목으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1) 당시 사무실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2) 문은 잠겨 있었으며 (3) 경찰은 영장을 제시하지 않았고 (4) 건물 관리인을 입회인으로 세운 채 압수수색을 진행했으며 (5) 압수목록에는 애초부터 사무실에 없었던 자료들이 압수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형사소송법 규정을 좀 보자.

 

형사소송법 제118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압수 수색 영장은 처분을 받은 자에게 반드시 제시하여야 한다"

 

경찰은 "보안과 저항을 우려해 출근시간 전에 압수수색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원천적으로 경찰은 압수수색영장을 전교조 관계자에게 보여줄 생각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즉, 경찰은 형소법 제118조의 규정을 지킬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법집행을 하는 사람이 법규에 정해진 사항을 아예 지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충격스러운 일이다. 지들이 무법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집행절차에 위법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왜냐 하면, 관계인에게 영장제시를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형소법에 정한 절차를 제대로 지켰기 때문이란다. 뭘 지켰을까?

 

예컨대, 형소법 제123조에는 영장 집행에 책임자를 참여시키도록 되어 있다. 제2항에 보면 "타인의 주거, 간수자 있는 가옥, 건조물, 항공기 또는 선거내에서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함에는 주거주, 간수자 또는 이에 준하는 자를 참여하게 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번 사건에서 경찰은 "건물관리인"을 입회인으로 세우고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그럼 건물관리인이 이 규정에서 말하는 "주거주, 간수자 또는 이에 준하는 자"에 해당 되는가? 일단 주거주는 아니다. 주거주라 함은 소위 "주인"이거나 그 성격에 준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건물관리인을 주거주로 볼 수는 없다. 간수자라고 한다면 그 간수자는 최소한 시설의 운용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건물관리인이 시설의 운용에 어떤 책임을 가지고 있을까? 단지 경비업무나 잡다한 일상업무를 전담하는 건물관리인이.

 

더구나 중요한 사안은 경찰이 압수수색을 진행한 이후 작성한 압수목록에 있다. 전교조의 주장대로라면 이 압수목록에 있는 <력사원전>은 해당 사무실에 존재하지 않던 자료라 한다. 경찰은 <력사사전>을 <력사원전>으로 잘못 기록한 실수라고 했으나 전교조는 <력사사전>이라는 자료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사전이냐 원전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교조의 주장은 결국 경찰이 없는 사실을 꾸며냈다는 것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레퍼토리 아닌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내지는 간첩 사건이 터졌을 때, 존재하지 않던 조직의 이름이 나오거나 황당한 증거물이 쏟아지거나 하던 그 아련한 "조작의 추억"들...

 

참여정부의 경찰이 유신정권의 공안기관과 같은 행동을 하려고 그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경찰, 스스로 많이 변했다고 자신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경찰이 낯간지럽게 공안사범 만들어 반공태세 강화하고자 이런 식의 장난질을 쳤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어쩌나... 자꾸만 "조작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솟구치는 것을...

 

어쨌든 경찰이 압수한 자료라는 것들, 이거 적법절차를 위반하여 입수된 것들이므로 어차피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 게다가 있지도 않은 물건이 버젓이 목록에 올라와 있는 이 현상은 경찰이 뭔가를 조작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 참에 또 한 번 행자부 장관을 다그쳐볼 필요가 있다. 혹시 아나, 공무원 노조 파괴를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이용섭 현 행자부 장관 또한 "제가 법을 다 알아야 합니까?"라는 희안한 반론을 제시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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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2 10:45 2006/09/2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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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법도 모르는 경찰에 절망했다!

    절망했다

  2. 조커님 역시 대단하세요 ^^b 얼마전에 대추리 진입 시도하다가 막 따지는데 정보과 형사들이랑 간부들이 그 허성관씨랑 비슷한 말 하길래 낭패였던 적이 있었지요 ㅠ 전의경은 그렇다치고 일선 경찰관이... 법도 모르면서 어떻게 경찰 시험을 붙은건지 원 ㅠ

  3. 다들 시험 많이 봐바서 잘 알겠지만....
    벼락공부라는 단기 기억효과 최고의 공부가 있잖아요..

    쩝...

  4. 조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네요 ㅎㅎ

    에밀리오/ "제가 형사법까지 다 알아야 합니까?" ㅋㅋㅋ 누가 다 알라고 했나요? 상식으로 대답하면 될 일을 그 상식을 거부하고 싶다보니 엉뚱한 말이나 하게 되는 거죠. 바부팅이들...

    하늘아이/ ㅋㅋㅋ 시험 끝나면 다 까먹는... 그거 말씀하시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