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 퇴치

그렇다. 뺀질거리고 남에게 빌붙으면서 지 주머니에서는 고린내 나는 동전 한 번 나오기 힘든 인류를 가리켜 우리는 "빈대"라 했다. 어렸을 적, 나무 그늘 아래 멍석 깔아놓고 자다가 불현듯 등이며 옆구리에 급속한 신경질을 동반한 가려움이 몰려올 때 우린 그렇게 멍석을 털었다. 그러면 피를 빨아 탱탱해진 빈대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거다. 가차없는 응징이 시작되었고, 온 사방엔 빈대의 핀지 내 핀지 알 수 없는 붉은 액체가 빈대떡처럼 퍼지게 되었다.

 

간만에 보는 빈대... 다음 백과사전에서 펌


저 빈대,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되 한참 전부터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빈대라 불리는 인간군상은 수시로 주변에 출몰하여 마빡에 핏줄을 세우게 한다. 밤 꼴딱 새고 쬠 있다가 의원실에 들어가야 하므로 절대 잠을 자서는 안 되는 지금 이 시점에, 잠을 깨기 위한 방편으로 빈대를 추억한다...

 

다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서 행인이 공장에 다닐 때. 7년 선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생전 처음으로 진짜 사람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 사람이었으니까. 어쨌든 이 사람과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짠돌이 빈대짓을 해도 그냥 친하게 지냈을 정도니까.

 

인천출신의 이 선배는 "인천 짠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주머니에서 동전 한닢 나오는 꼴을 못봤다. 대강 이 선배가 하는 일이 이런 정도다. 후다닥 점심을 먹고 매점에 들려 자판기 커피를 하나 뽑는다. 커피잔을 들고 돌아서면 귀신 같이 그가 서 있다. 밥은 먹었냐 어쩌구 하면서 다가온다. 같이 먹어놓고선...

 

암튼 그 다음 수순은 동료가 들고 있는 커피잔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고는 슬며시 손을 뻗는다. "한 모금만 마실께..."라는 말과 함께. 한 모금 마시고 돌려 준다. 돌려받은 동료는 다시 한 모금 마신다. 그러면 슬며시 다시 손을 뻗는다. "한 모금만 더 마시자..."라고 하면서...

 

그까짓 자판기 커피, 양이 많아봐야 얼마나 많겠는가? 후딱 남의 입으로 두 모금의 커피가 넘어가면 자기 마실 커피는 얼추 반으로 줄어든다. 동전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 커피 그냥 주고 새로 하나 뽑아 마시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밥을 사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하다 못해 지나가는 말이라도 "야, 오늘 내가 밥 살께"라는 소리는 입밖에도 나오지 않는다. 아침은 집에서, 점심은 구내 식당에서, 저녁은 빈대로가 이 선배의 철칙이었다. 공장 근무하는 500명 가까운 사람 중에 이 선배에게서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적이 없다.

 

그런 인간이 술을 사겠는가... 그런데 이 선배는 술자리마다 빠지는 적이 결코 없다. 1차는 물론 2차, 3차에 노래방까지 여지 없이 달린다. 하지만 결코 술값을 내는 적은 없다. 몇 번이나 사람들이 술값 덤탱이를 씌워보고자 시도를 했으나 기름묻힌 미꾸라지 손아귀에서 놀듯이 절묘한 타이밍에 절묘한 방식으로 술값 물 위기를 요리조리 빠져나간 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구두쇠 노릇을 한 덕분인지는 몰라도 서른 하나에 인천에서 큰 아파트 한 채를 장만했다. 뭐 빚얻어서 마련한 걸수도 있지만 실제 이 선배의 집이 못사는 집은 아니었던 듯 하다.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는데 별로 공부는 하고싶지 않고, 해서 일찌감치 산업전선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빈대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나. 해서 술자리를 가도 될 수 있으면 떼어놓고 가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 선배, 개코만 수백개 삶아 먹었는지 냄새는 귀신같이 맡았다. 사실 이 선배가 없는 술자리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술자리에 껴서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고 사라지고 이튿날은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타난다.

 

어느 초겨울이었는데, 이 선배가 '직장'이라는 직위를 얻은지 거의 1년쯤 되어가는 때였다. 직장이라는 직위는 다른 공장에서 반장보다 조금 높은 위치쯤 되는 거였는데, 그 위세가 실로 대단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동료들의 입장을 잘 헤아리는 것처럼 행동하던 이 선배, 직장이 되자마자 그 어떤 악질 상사보다 더 악날하게 부하직원들을 갈구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성질 더러운 행인, 그 꼴을 못보고 사사건건 부딪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달은 그냥 아, 저 사람이 자기 위치도 있고 하니까 좀 뭔가 해보려고 그러나보다 이렇게 이해하려 했는데, 날이 갈수록 안하무인에다 어찌나 개폼을 잡는지 점점 눈꼴이 시려지기 시작했다. 그게 몇 달 가니까 이젠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서 드잡이에다가 욕지거리에다가 한 판 붙자고 쌈질 직전까지 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행인만 그렇게 느꼈다면 모르겠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그 선배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둔 사람이 여러 명 생겼다. 문제는 그런 현상이 자신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그 선배였다. 그리하여 작업장 안은 항상 언제 싸움질이 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죄다 그 선배를 기피하기 시작했고, 이런 현상이 계속 되자 자기도 뭔가 찝찝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던 가보다. 게다가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개기는 행인에게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던지 하루는 같이 술 한잔 하잔다. 행인, 일단 튕겼다. 별로 술이 안 땡긴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를 들이댔다.

 

그러나 계속해서 술 한 잔 하자는 선배의 권유가 이어졌다. 한참 선배를 쳐다보던 행인, "형이 술 산다면 생각해보죠, 뭐." 이렇게 어깃장을 놓았다. 이 원초적 빈대가 지돈 내고 술 사라고 하면 술마시자는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술사란 말에 잠깐 얼굴빛이 흐려지는 듯 하더니, 그래 까이꺼 오늘 내가 쏜다 하며 큰 소리를 친다. 오호라... 이게 왠 일이냐?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구나...

 

퇴근 하자마자 통근버스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서 술을 빨아볼까, 이렇게 짱구를 굴리고 있는데, 기껏 100주년 기념탑 앞에 버스가 서자마자 내리잔다. 얼래? 연안부두로 갈라고 그러나? 그렇다면 오늘 회 한 접시 땡기는 건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얼른 따라 내렸다.

 

그러나 그 빈대를 보며 회 한 접시를 상상한 것은 과대망상이었다. 슬금 슬금 걸어가더니 바로 앞 아파트 단지 안에 치킨집으로 들어간다. 뒌장... 결국 치킨이냐...

 

일단 자리를 잡고 앉자, 이 선배, "내가 쏘는 거니까 메뉴는 내가 고르마" 이러는 거다. 까짓거 그러시던지 하고 앉아 있자, 이 선배, 주인을 부르더니 주문을 한다.

 

"소주 한 병 하구요, 한치회 한 접시 주세요..."

 

한치회... 회는 회로되 회값도 못하는 회 아닌가... 당시 한치회 한 접시에 2000원. 치킨 한 마리가 3000원인가 하던 때였는데, 아닌 말로 치킨집에서 한치회는 왜 팔고 쥐랄인가... 거야 주인맘이지만서도...

 

소주 한 병이 후딱 비워졌다. 소주 한 병이 또 기어 나왔다. 그런데 이 인간, 한치회에는 손도 대지 않고 기본안주로 나온 뻥과자만 줏어 먹는다. 한치회 한 점 먹을라치면 괜히 이말 저말 시키면서 태클을 건다. 그러는 사이 소주 또 한 병 추가된다.

 

내키지도 않는 술자리인데다가 쫌생원의 자린고비짓에 비위가 상해 소주 3병을 마시고, 접시에 있던 한치회를 젓가락으로 똘똘 말아 한 입에 쑤셔넣고는 이제 그만 마시자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 빈대청년이 계산할 생각은 않고 자꾸 눈치를 실실 보는 거다. 행인, 독하게 마음 먹었다. '저 눈빛에 넘어가면 안 된다...' 그러고선 신발신고 냉큼 술집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선배가 나왔다. 볼이 퉁퉁 불어 있다. 혹시 술값 없다고 뻗대다가 주인에게 싸대기라도 맞았나... 그러나 그건 아니었나보다. 갑자기 씩씩하게 다가오더니 어깨에 손을 얹고설랑...

 

"야, 2차는 네가 쏴라~!"

 

옘병할... 그 알량한 한치회 한 접시 사놓고 2차를 쏘라고?? 기가 막혀서리 원...

 

피곤해서 아니되겠사오이다 하고선 기숙사로 들어가려는데, 한사코 난리다. "야, 형이 술 샀으면 니가 또 술 사야되는 거 아니야?" 이러고 자빠진다. 뒈길... 그래 어디 함 해보자 싶어서, "아, 그럼 3차는 형이 살거요?" 했다. 그랬더니 이 인간이 "당연하지 쫘샤~!" 이러는 거 아닌가? 어쭈? 좋아, 그렇다면 또 생각이 달라지지...

 

2차는 맥주집으로 가잔다. 아주 가지가지로 놀고 있다. 그래, 어디 엿 한 번 먹어봐라. "2차는 내 맘대로 쏠거유" 그러고선 신포시장 안에 닭발 집으로 갔다. 술은 당연히 소주.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신 퍼마시다 보니 이 선배, 어지간히 술기운이 오른 것 같았다. 자... 이제 시작이다.

 

"자, 3차 갑시다"하고 일어나 계산을 마치고 나니, 이 인간 또 눈치본다.

 

"야, 오늘은 그만 하지?"

"뭔소리여? 3차 산뎀서?"

"그거야 아까 멀쩡했을 때 얘기고 이젠 왠만큼 마셨는데 다음에 하자."

"아니, 형, 이거 뭐하자는 플레이여? 그렇게 못하겠어. 갑시다, 3차~!"

"마, 형이 오늘은 돈도 없고 그러니까 다음에 하자니까?"

"아 쒸, 다음에 언제 살 줄 알고? 내가 그렇게 순진해 보입디까?"

"뭠 마 그런 게 아니잖아?"

"안이고 밖이고 간에 3차 갑시다!"

"야 이쉑갸, 다음에 마시자고~!"

 

아주 통사정을 한다. 어쩔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갈 수록 괘씸해진다. 그래서 수를 내기로 작정하고는 "알았어. 3차도 내가 쏠께!"하고 선언해버렸다. 이 인간, 갑자기 눈망울이 똘망똘망해지더니, "정말이야? 정말 네가 3차 쏘는 거야?"하고 묻는다. "당연하지. 내가 형인줄 알아?" 하고선 휘적휘적 앞장을 섰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새 또 제까닥 따라 온다. 시장통 입구에서 택시를 잡아 타곤 후다닥 달려서 자주 가던 호프집에 들어갔다. 일단 메뉴판에서 젤루 비싼 안주 하나 시켜놓고 술은 양주로. 갑자기 이 선배, 태도가 달라진다. "야, 너 오늘 과용하는 거 아니냐?" 아주 고양이 쥐생각을 하늘만큼 땅만큼 해주고 자빠졌습니다...

 

"괜찮아~! 싸나희가 이정도는 돼야 싸나희쥐~!" 뭐 이런 식으로 떠들면서 과감하게 술을 빨았던가 보다. 그렇게 한참을 마셨을까, 이 인간이 드뎌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계속 횡설수설을 하더니 그만 술잔을 앞에 놓고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고 있다. 몇 차례 깨웠는데도 어어 하면서 내처 잠을 잔다.

 

행인,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취객을 버려두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이튿날, 왜 사람 버려두고 혼자 갔느냐고 노발대발이다. 같이 가자니까 대답도 없더라 했더니 그래도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란다. 뭐 어쩌란 말이냐 항의를 했더니 아무튼 내 너랑 다시는 술 안마신단다. 얼쑤 다행이로다...

 

그러고선 며칠이나 흘렀을까. 현장에 있는데 급히 센터로 와서 전화를 받으란다. 무슨 일일까 싶어 달려와 전화를 받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왜 마른 하늘에 눈썹 휘날리는 일이란 말인가? 그날 그 호프집 주인이 전화를 한 거다.

 

"아니 성님이 어쩐 일로 전화를 하셨습니까?"

"얌마, 내가 전화 안 하게 생겼냐?"

"왜요?"

"너 임마 술값 주기로 한 날 술값은 줘야될 거 아냐?"

"엥? 제가 형 집에 외상 쌔린 게 있어요?"
"이 쉑 봐라... 너 지난 번에 니 선밴지 뭔지 데리고 왔던 적 있지?"

"..."

"임마, 중간에 너 어디로 새고 그 선밴지 뭔지만 남아 있었던 날 말여."

어이쿠, 이게 뭔 일인가...

"그날 니 선배가 니 앞으로 외상 그어놓고 갔어. 돈이 한 푼도 없다면서 말이야."

맙소사...

 

저녁 교대 시간에 그이가 왔길래 물었다.

"형 그날 술값 안 냈어요?"

"마, 당연하지. 그거 니가 사기로 한 거잖아!"

아니, 이 인간이 그날 안 취했던 건가?

"니가 3차 쏜다고 해서 니 앞으로 외상 달아주고 나왔지."

 

아아... 내가 감히 하느님 코털을 빼먹지, 이 빈대 주머니를 털려고 했다니...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한없는 절망감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이 인간, 그날 한 번 산 2000원짜리 한치회 이야기를 행인 퇴사할 때까지 써먹었다. 한치 얘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저 "회" 한 번 쐈다고 이야기한다. 남들은 행인이 엄청나게 비싼 회를 얻어 처먹었는지 알고 있더라...

 

그날 이후에도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봐왔지만 이런 빈대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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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5 09:17 2006/09/2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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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 먹고 잘 살고 있을듯..ㅎ

  2. "빈대의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군요. 저런 사람은 "빈대"라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_- 아.. 좀 더 널리 빈대의 도를 펼쳤어야했거늘.. 7년전이면 이미 정립이 되어 있을때였는데.

  3. 크 >_< 장난아니로군요; 제가 겪은 최고의 빈대는 대학 동기가 자기가 술 산다해놓고 계산 할 때 나 돈 없어 하던 케이스;; 그 떄 다들 시껍했었던;

  4. 그 양주 마실 때는 참 맛났을텐데...

    * 교훈 : 술값 뒤집어 씌우려면 아는 술집에는 가지 않는다.

  5. 한 가지 실수했구만요. 주인장한테 단단히 일러두고 갔어야죠. 그 빈대가 술값 낼 것이고, 안 내면 경찰서 신고하라고 말이죠^^. 행인 님도 모질지 못하군요...ㅎㅎㅎ...

  6. ㅎㅎ.. 나도 요즘 주머니가 빈궁해서 자주 얻어먹는데 좀 심하군요... 저런 저런....

  7. 산오리/ 그렇겠죠? ㅎㅎ

    지각생/ "빈대의 도"라... 하루 속히 정립하여 강호 빈대들에게 귀감을 주시길...

    에밀리오/ ㅋㅋㅋ 그런 사람 알고 보면 흔해요...

    말걸기/ 별로 맛도 없더라...

    곰탱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지라 그 사단이 벌어졌군요... 쩝...

    하늘아이/ ㅋㅋㅋ 님이 하시는 건 빈대가 아니라 애교가 아닐까 싶네요.

  8. 빈대도 아무나 못하는건데...무섭다, 저런 빈대들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