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치

97년인가였다. 현장활동과 관련한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대전의 모 대학에 갔다. 여차저차한 과정을 통해 연락이 된 것이라 회의를 주재하는 측에 대해선 전혀 인적사항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회의 장소에 가서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낯설은 곳인지라 회의장소 뒷편 깊숙한 곳에 가서 자릴 잡고 앉아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 워낙 옷을 가려 입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닌지라 아마도 한 달은 입었음직한 청바지에 너덜너덜한 남방에 끈 풀린 쭈글쭈글한 전투화 신고 땟국물 줄줄 흐르는 모자까지 쓴 상태였다. 암튼 그렇게 앉아 들고갔던 자료며 기타 등등을 훑어 보고 있는데, 건장한 학생 두엇이 다가왔다.

 

"잠깐 밖으로 나오시겠어요?"

아주 정중한 말투였지만 왠지 경직되어 있는 분위기였다. 그렇거나 말거나 사태파악을 못한 행인, 무슨 일이 났나 싶어 밖으로 따라 나갔다. 밖에는 몇 명의 남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를 주재하던 여학생 하나가 같이 서 있었다. 그 때까지도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판국인지 전혀 감을 못잡고 있었던 멍청한 행인, 불러냈던 학생에게 물어봤다.

 

"왜 그러는데요?"

 

밖에 서 있던 학생들 중 인상 험악하게 생긴 학생 하나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신분증 좀 보잔다. 그제서야 이게 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감지한 행인, 일단 신분증이 없다고 이야기를 한 후 사람을 불러냈으면 용건을 이야기해야지 니들이 경찰이냐고 따졌다. 그제서야 험상궂던 표정의 이 학생, 굳은 인상을 조금 풀고 나더니 무슨 일로 왔느냔다. 회의 참석차 왔고, 어디의 누구며 오늘 발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자 그제서야 지들끼리 킬킬거리고 웃는다.

 

꾸벅 인사를 하면서 사과를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 복장도 어디 노숙하다가 기어들어온 것처럼 하고 와서는 사람에게 얼굴도 보이지 않게 모자 푹 눌러쓰고 뒷자리에 파묻혀 있으니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프락친줄 알았다는 것이다. 같이 웃으면서 그러냐고 하고 말았지만 기분이 영 께름칙 했다. 아니, 내가 프락치로 보였단 말인가?

 

신촌의 모 대학에서 똑같은 일을 당한 적이 있다. 그날도 역시 회의를 하러 갔었는데, 모처럼 회의시간보다 일찍 회의장소에 도착했다. 학생회관 밖을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왠 넘들 두엇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반말을 찍찍하면서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기가 막혀서 뭐 이런 녀석들이 있나하고 째리고 서있자니까 완전 시비조로 나온다. 괘씸한 생각에 한 대 쥐어 박을까 하고 있는데, 마침 같이 회의를 하기로 되어있던 사람이 행인을 발견하고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해서 여차저차 하다고 했더니 시비걸었던 학생들에게 회의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해명을 하고는 행인을 붙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깓뗌스러운 넘들, 사과도 하지 않더라...

 

프락션에 대해 이토록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뭐 나아진 것이 있겠는가만은 아무튼 프락치 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던 것은 그들 역시 시대가 낳은 슬픈 자화상이라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비정한 정권에 대한 증오가 프락치에 대한 분노를 낳아 결국 프락치로 의심되던 사람을 구타 살해한 사건마저 벌어질 정도였다면 그 상황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상황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프락션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프락치는 공안기관 근무자들보다 더 얄밉게 느끼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들은 표도 나지 않는다. 어디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와 뭔 짓을 하는지 당한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고, 그것도 정확하게 누가 뭘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 신원불상의 어떤 넘이 뭔가 했지 않겠느냐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라서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니다. 특히 활동을 하는 입장에서 공안기관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프락치들은 거의 암적 존재다.

 

당 사무부총장을 하던 사람이 '일심회'라는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했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 그가 넘겨준 문건이라는 것들이 간첩질을 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들도 아니다. 350명에 달하는 민주노동당 당직자들과 지역위 사람들의 신상명세를 조선노동당에 넘겨주었다고 하는데, 그게 국가기밀사항도 아니고 왠만한 경우에는 포털사이트 검색을 해도 어느 정도 나올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그걸 가지고 간첩질이니 뭐니 하는 것은 오바질도 한참 오바질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당 내 인사들의 신상명세를 작성하고 성향별로 분류해서 다른 조직에게 넘겨주었다는 것, 게다가 그것도 그들의 이해를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은 명백히 프락션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민주노동당 내 인사들의 신상명세와 성향별 분류 자료를 열우당에게 넘겨주었다고 가정해보자. 이건 상식적으로 용납이 될 수 없는 일이다. 민주노동당에 당적을 두고 있고, 민주노동당의 이념에 따라 강령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움직여야할 책임을 가진 사람이 조선노동당의 이해를 위해 자기가 속한 정당의 인사정보를 함부로 흘렸다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제시되자 정책위의장이라는 자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건 의리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순간 폭소를 터뜨릴 뻔 했다. 조선노동당에 대한 의리를 위해 자기 정당에 대한 의리는 무시하는 이런 개코메디같은 의리가 무슨 얼어 죽을 의리란 말인가?

 

조선노동당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빨리 조선노동당으로 가던지 조선노동당 남한 지역위를 건설하던지 하는 편이 낫다. 괜히 민주노동당에 들어와 기생하면서 암세포처럼 지 덩치를 키우고 결국 숙주까지 사망하게 만드는 짓을 하는 것은 '의리'에 맞는 일이 아니다. 자위권 행사를 위해 준비한 자랑스런 핵폭탄 가슴에 안고 조선노동당의 깃발 아래 굳게 뭉쳐주는 것이 훨씬 명예롭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게 또 '의리'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할 게다.

 

암튼 프락치짓 하는 이 얌생이들이 당 내에서 암약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집권을 운운하는 것은 미친짓이 아닐 수 없다. 꿈도 야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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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3 14:36 2006/12/1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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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상명세에 성향분류까지 넘겼다고라고? '간첩' 맞네. 실정법상 간첩은 아니더라도... 프락치가 간첩이지 뭐여.

  2. 크 >_< 프락치 하니까 생각난게... 예전에 경희대에서 지갑에 있는 돈 다 털린적도 있고, 이래저래 프락치에 대한 이야기 말로만 들어왔었는데... 연대에서 예전에 문건 들고 가다가 프락치 한 분을 붙잡은 적이 있었는데... 돈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됐지만 너무 안타깝더라는 ㅠ.ㅠ

  3. 그사람들 의리 대단하군요..ㅎㅎ
    헌법은 '대한민국은 의리공화국이다'로,
    당 강령에는 '민주노동당은 의리당이다'로 바꾸는게 저들의 꿈일까요?

  4. 모 파업집회때, 집회에 늦게 도착했다가 절 프락치로 오해한 조합원들에게 욕 한바가지 쳐먹고... -_-ㆀ 조끼꺼내 입고 명함건네고 겨우겨우 상황을 모면하고서리... 하루종일 기분 잡쳤던 기억이...

  5. 행인, not/ 모두 프락치에 대한 아픈 추억이 ㅋㅋ
    그런데, 네이버가 친절히 알려주신 아래 글자는 도무지 어느나라 말인지-_-;
    "fraktsiya"

  6. 말걸기/ 이거 분명히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것임. 조만간 가만 두지 않겠음

    에밀리오/ 그게 안타깝긴 한데 괘씸한 것도 어쩔 수 없더라구요.

    산오리/ 민족의리통일당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ㅎㅎ

    not/ ㅋㅋㅋ 프락치로 몰리면 그거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쥐. 근데 암만 생각해봐도 나나 not이나 프락치로 볼만한 풍은 아닌데 말여. ㅎㅎ

    정양/ frakchi 라는 건 영언데, 저건 뭔지...

  7. fraktsiya는 러시아어입니다. 원래 프락치라는 말도 러시아어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죠. 키릴문자로는 фракция입니다. 소련에서는 분파의 뜻으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언제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저도 프락치로 의심받은 적이 있는지라 공감이 가는군요.

  8. 대부분 한번쯤은 이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더 동감이 간다는 ... ... 아 저는 이주노동자로 오인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답니다. ^^;;

  9. 독고다이/ 오오... 감사함돠~~!

    손윤/ 허거... 그러시군요. 이주노동자로 오인(?)된다는 것은 결국 이주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는 이야길텐데,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