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살아 남는 거였엄...(1)
또또님의 [대학이 그렇게 중요해?] 에 그럭저럭 관련된 듯도 보이는 글 ^^;;;
저 먼 남녘 어드메 붙어 있는 공고에 입학지원을 했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였다. 학비도 면제였고 기숙사비도 면제였다.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지방에 있는 학교를 가기 위해선 부모님의 동의서를 받아야 했다. 학교에 오신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 눈 앞에서 원서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은 보내주겠다"라고 하시면서 인문계 진학을 종용하셨다. 그 때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발했다. "저는 집안 식구들 배곯는 소릴 들으면서 대학다닐 자신이 없어요." 부모님을 무척이나 힘들게 했을 이 한 마디로 아버지와 타협을 했다. 실업계를 가도 좋으니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것으로...
그렇게 우겨서 들어간 학교였는데, 두어달 생활하다보니 더 이상 학교 다닐 마음이 없어졌다. 허구한 날 선배들은 옥상집합을 걸었고, 군 생활 때 받았던 얼차려는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마스터 했다. 사실 군대에서 받았던 한따까리 등등은 고등학교 때 선배들에게 당했던 것에 비하면 약과였을 정도다.
그건 뭐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어차피 행인 역시 그런 분위기에 아주 적응하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진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학교가 학생들에게 해주는 것이 뭔지를 모르겠다는 거였다. "공고"는 "공(空)치는 날이 많아서 공고"였던 것이다.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학생이나 별로 공부를 하겠다는 의욕이 없었다. 실험실습시간엔 그럭저럭 수업받는 분위기도 났지만 다른 수업시간, 예를 들어 국영수 시간 같은 때는 과연 이게 학굔지 뭔지 분간이 가질 않을 정도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반년이 되질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고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들었다. 마음이 떠나자 몸도 딴 짓을 하기 시작했다. 1학년 때는 그나마 막내 입장이라 근근히 버텼지만 2학년 때부턴 무소불위 안하무인 시쳇말로 "꼴리는 대로" 살았다. 학교 근처 파출소로 담임선생님도 숱하게 불려왔더랬다.
자퇴도 생각을 해봤는데, 그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아버지의 말씀도 어겨가며 어거지로 들어온 학교 아닌가. 그런데 내가 싫어 자퇴한다고 하면 자존심이 심하게 구겨지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자퇴는 싫다. 차라리 퇴학을 당하리라.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허구한 날 사고를 쳐도 학교에서는 짜르지를 못했다. 학교의 구린 구석을 낱낱이 알게 되었으니까. 결국 사고를 쳐도 학교는 그러려니 하면서 이 쉑이 하루 속히 졸업하기를 바라는 형국이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3년 내내 출석한 시간이 출석하지 않은 시간보다 적다. 그런데도 3년 개근상을 받았다는 거 아닌가...
퇴학당할 뻔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2학년 초겨울이었다. 제대로 걸렸는데, 몇 차례 학생부 끌려갔다가 죽이려드는 학생부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담배를 피우다 걸렸다.(어... 쪽팔려...) 교련선생들의 전투화발을 온 몸으로 받다가 엉덩이로 마포자루를 구타하고 캐비넷을 모자처럼 머리에 쓰는 등 육체적 고통을 받다가 더 이상 못 맞겠다고 개기자 눈 앞에 자퇴서가 떨어졌다.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는 김00 선생님(이라고는 하지만 님자는 참 붙이기 싫은 거시기한 사람이었음)은 담배연기를 풀풀 풍기면서 자퇴서를 쓰라고 호통쳤다. 같이 걸린 넘(근데 어째 이넘도 이름이 기억난단 말이냐...)이 거의 울상이 되서 말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행인을 쳐다봤다. 행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퇴서를 썼다. 친구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퇴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생각해보니 그 때는 지문날인 반대운동을 하지 않았을 때였다... ㅋㅋ) 너무 시원하게 자퇴서를 써서일까? 김00 선생이 오히려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덩치도 곰같고 얼굴도 킹콩같이 생겼던 김00선생, 자퇴서를 보더니 더 화가 난 듯 덜덜 떨면서 집에 전화해서 당장 부모님 오시라고 하란다. 사실 그 시간엔 집에 전화해봐야 8순의 외할머니만 계실 뿐 부모님이 계실 턱이 없었다. 먹고 살려면 일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비록 자퇴서라고는 하지만 학생과 선생의 강요(?)에 의해서 쓴 거니 퇴학이나 진배 없고, 행인이야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지라 걸릴 것이 없었다. 전화 못하겠다고 버텼다. 전화하라는 호통이 떨어졌다. 왜 전화해야 하냐고 물었다. 내가 내 의사에 따라 자퇴서를 썼는데 부모님은 왜 오시라고 하냐고 따졌다. 니가 미성년자니까 어쩔 수 없다, 부모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럼 그냥 퇴학시키지 뭐하러 자퇴서 쓰라고 했냐고 개겼다. 귀싸대기가 얼얼했다.
부모님 모시고 올거냐 말거냐 계속 묻길래, 자퇴서는 썼으니 내일부터 학교 안나오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내일부터 학교 안나올테니 집에 절대 전화하지 마시라고, 집에 전화하면 그 땐 진짜 가만 안 있겠다고 하자, 김00선생, 눈에 불이 번쩍 이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행인, 진짜 죽을라고 환장을 했던 것이 아니었나... 덜덜덜덜...
그 때, 학생주임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암말 안 하고 있었는데 김00선생이 이러고 저러고 하면서 뻥을 산더미처럼 붙여서 우리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던 학생주임, 김00선생을 데리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얼굴이 벌개진 김00 선생, 행인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다가 행인이 쓴 자퇴서를 북북 찢더니 "어이 썅, 내 더러워서..." 어쩌구 하곤 나가버렸다.
학생주임이 전화를 들더니 담임선생님께 알렸다. 그리곤 과실(科室)로 가보란다. 갔다. 담임선생이 몰골을 보더니 낼 보자고 하신다. 이튿날 과실에 가자 회초리를 한다발 마련해 놓으셨다. 회초리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목공실에서 두께 1cm정도로 일정하게 깎은 나무였다. 공고는 회초리도 기계로 다듬는다.
몇 대나 맞겠냐고 물어보신다. 때리실 만큼 때리라고 했다. 그랬더니 내 맘껏 때리면 넌 오늘 죽는다고 하신다. 다시 몇 대나 맞겠냐고 물어보신다. 100대만 맞겠다고 했다. 100대 다 맞을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 다 맞겠다고 했다. 맞는 대로 숫자를 세라고 하신다. 숫자를 세다가 틀리거나 제대로 발음이 안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맞는다고 하신다. 알았다고 했다. 그리곤 맞기 시작했다. 50대 넘게 맞았는데 확실히 몇 대를 맞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맞다가 선생님이 오늘은 그만 하잔다. 감각이 없는 종아리 위로 끌어올렸던 바지가랭이를 내리고 돌아보자 선생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있고 땀을 줄줄 흘리고 계셨다. 나머진 내일 맞으러 오라고 하신다. 알았다고 했다. 담임선생님께만큼은 개길 수가 없었다. 이런 꼴통도 제자라고 파출소 왔다갔다 하시면서 고생하신 분인데 그런 생각을 하니 그냥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다시 과실로 갔다. 담임선생님이 왜 왔냐고 물으신다. 조금 당황해서 어제 남은 매 다 맞으러 왔다고 말씀드렸다. 담임선생님께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른 선생님들을 쳐다보더니 왁자하게 웃으신다. 다른 선생님들도 따라 웃으신다. 행인은 행인대로 어안이 벙벙해서 이 사태가 무슨 의밀까를 고민했던 듯 싶다. 한참 웃으시던 담임선생님, 됐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거 참 희한한 놈일세 하신다. 담부터 그러지 말라신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3학년 여름이 되서 취업을 하게 되었다. 구로공단을 갔고 그해 겨울에 인천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와중에도 대학이라는 곳엘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취업을 하면서 큰 소리를 쳤다. 대학 나오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사는 거 보여주겠다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2편에 계속... ^^;;;)
행인님의 [중요한 건 살아 남는 거였엄...(1)] 의 시리즈. 공장생활을 하면서도 대학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군복무를 하기 전에도 그랬고, 군복무를 할 때도 그랬고, 막 전역해서 다시 복직했을 당시만 해도 대학에 대한 욕구는 없었다. 반면 대졸자들에 대한 분노는 많았다. 학력이라는 것이 공장 안에서 위계의 구분을 만들고, 그 학력을 밑천으로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시덥잖은 짓거리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당연히 그들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