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날의 혈투?!

신입사원 환영식 자리에서 신고식을 진행했던 선배, 술잔돌리기를 명령했던 그 선배는 K였다. 이 선배는 덩지가 엄청 컸고, 무엇보다도 힘이 장사였다. 100Kg짜리 바벨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이었다. 한 세트 20번 바벨 들기를 한 후에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천하 장사였던 거다. 게다가 술이 말술이었다. 한도 끝도 없이 술이 들어간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사람이다. 이후 몇 년간 행인과는 악연 아닌 악연으로 이어져야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다들 아시다시피 사람이 술을 마시면 힘이 곱절로 늘어난다. 천하장사 K선배 역시 안그래도 힘이 철철 넘치는 인간이 술만 마시면 한층 업그레이드된 파워를 자랑한다. 초절정 고강도 수퍼 파워를 보이게 되는데 이 힘이 간혹 엉뚱한데 쓰이는 바람에 여러 명 피봤다.

 

K선배는 술을 많이 마시지만 술이 쎈 편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술은 엄청 마셔대는데, 어느 순간 이미 필름이 다 끊긴 상황에서 무조건 반사처럼 술잔을 들게 되는 것이다. 술이 쎄다고 하려면 적어도 술자리가 끝난 후 자신이 어떻게 술을 마셨으며, 술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해야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과도한 음주 후에 필름이 끊기는 요사스런 현상을 경험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 선배는 좀 빨리 필름이 끊어지는 편이다. 그런데 같이 술을 마시는 동안에는 언제 필름이 끊겼는지 알 도리가 없다. 전혀 표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완전히 맛이 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 터지게 되는데...



신입사원에 대한 구타다. 참 묘한 것이 이 선배는 입사 2년차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구타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신입사원들에게만 술취한 김에 구타를 하는 것이다. 구타를 하기 전에 먼저 터뜨리는 일성이 있다.

"야 이 개쉑덜아~! 너거덜 낼 당장 사표 쓰고 나가서 공부해! 공부해서 대학가란 말이다~! 엉!!"

이 소리가 터져 나오면 일단 긴장을 해야한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사정거리에서 잽싸게 멀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팬더가 되어 며칠간 계란이 눈 주위에서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거나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다니는 일이 발생한다.

 

7년 선배였는데, 공고 나와서 현장 노동자로 살아가며 학력차별로 겪은 한이 골수에 맺힌 것이었다. 사람 맘도 참 좋고 성실하고 사람 잘 웃기고 가수 뺨 칠 정도의 노래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 해서 주변의 기대도 많이 모았더란다. 집안 형편 때문에 공고 가서 이 직장에 들어오게 된 건데, 이 회사에서 받은 차별과 멸시가 무척 마음을 괴롭혔나보다.

 

그건 다 인정하겠는데... 그렇다고 후배 구타하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일이다. 행인도 예외없이 몇 차례 주어 터졌고, 눈치없는 다른 동기들은 멀뚱 멀뚱 하다가 아주 골로갈 뻔 한 애도 있다. 이 선배가 술 취해서 힘을 쓸 때는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팔을 잡은 넘, 다리를 잡은 넘 모두 예외 없이 몸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 미터 이상, 때로는 십 수미터까지 날라가버린다. 곰탱이가 따로 없었다.

 

이 선배와 같은 작업조가 되어 일을 하게 되는 기간이 있다. 원래 사람을 무서워하지는 않는 행인이지만 일단 그 시기만큼은 조심한다.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뭐 술을 피하지는 않았다. 이 선배도 술만 마셨다 하면 사고를 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사고를 치면 약 한달간은 자성을 하는 묘한 주기가 있었으니 그 때만 잘 살피면 술 마시는 것도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초겨울이었다. 11월 말쯤이었는데 바닷바람 부는 곳이라 그런지 꽤 쌀쌀했다. 행인은 워낙 추위에 강한 사람이어인지 몰라도 인천 바닷바람이 그렇게 춥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나중에 호되게 당하긴 했지만서두... 암튼 그 쌀쌀한 어느 저녁, 같은 작업조가 끝나는 날이었다. 한동안 같이 고생했으니 마지막 날 소주 한 잔 해야하지 않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언젠 술 안마셨나? 허구한 날 같이 술마셔 놓고 뭘 또 새삼스레 마지막 날이 어쩌구 저쩌구... 암튼 이 주당이라는 종류의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술 마실 건수를 만드는데 도가 튼 인간들이다.

 

좋다, 가자~~! 의기투합, 용기백배해서 인천 시내로 나갔다. 거기서 식사 겸 1차를 거나하게 진행했다. 2차 갈 때쯤 같이 있었던 사람 중 서너명이 집으로 돌아갔다. 동기 한 넘과 K선배와 행인, 이렇게 3명이 남았다. 2차는 언제나 그렇듯이 입가심으로 맥주. 션한 생맥주 몇 천씩 들이키니 소주가 싹 깬다. 3차 간다. 이 때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는 굳은 우정의 맹세를 평소에도 서너번씩 날리던 동기넘이 기숙사로 들어간단다. 왜 그러냐 했더니 오늘 기분이 매우 우울하단다. 그리고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단다. 아니, 그렇다고 너 혼자 들어가면 난 뭐가 되냐, 죽더라도 같이 죽자 그랬더닌 이넘 왈, 니가 물귀신이냐, 난 죽기 싫으니 너나 죽어라 어쩌구... 에라 될대로 되라 싶어서 그래 먼저가라 하고는 K 선배와 단 둘이 3차를 갔다.

 

죽으나 사나 뭐 어찌 되겠지 하고 간 건데, 의외로 분위기가 좋았다. 그래서 참 이얘기 저얘기 하면서 술잔 좋이 빨아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선배가 행인을 다정히 부르더니만 가까이 와서 앉으란다. 가까이 가서 앉자 순식간에 귀싸대기가 얼얼해졌다.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니 뭐하러 돈 벌라고 그라노?" 대답을 못하고 있자 다시 싸대기 한 대 추가. "뭔데 니 돈 벌라고 그라노, 으이?"

 

아 쉬파... 그럼 넌 왜 돈 벌라고 그러는데? 하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순간 이번에는 반대편 싸대기 충돌. "니 와 대학 안가노?" 아, 이걸 정말... 성질이 퍽퍽 나고 있는 순간인데, 갑자기 마빡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이 선배가 헤딩을 한 거다. 0.1ton을 넘는 몸뚱이의 체중을 모두 이마에 실은 후 날리는 그 머리통에 행인의 마빡이 정면 충돌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행인의 두개골은 상당히 뛰어난 강도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탈은 없었지만 골이 딩딩 울리는 느낌이 들면서 기껏 마셨던 술기운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형, 나가시죠.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나가긴 어델 나가노? 이 쉑기가 미친나?"

"아, 형 요기 나가서 이야기하자니까요?"

"옹야 좋다. 나가자. 함 나가서 니 뭐라카는지 함 들어보자"

그 취한 상황에서도 이 선배 알뜰하게 술값 계산 끝마친다. 그런 걸 보면 진짜 취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취한 척을 하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아무튼 밖으로 나갔다. 선배는 술이 취해서 갈지자로 비틀비틀 걸으면서 따라왔다.

행인은 계속 걸어갔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배 앞에서 계속 걸어갔다.

"야, 일마야, 니 거기 안서나? 이 쉑기 이리와봐~!"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오는 선배를 뒤에 두고 뒷골목 공사판 쪽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이판 사판이다. 공사판 흉측한 철골 구조물 위로 찬바람이 을씨년스럽게 지나갔다. 여기서 만일 더 때리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는 것이 행인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힘으로는 택도 없고, 별 수 있나, 술 취한 사람하고 티격거리고싶지는 않다만 안 되면 다구리라도 떠야지...

 

이 선배가 다가오더니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쳤다. 워낙 취한 사람이라 동작이 굼떠서 얼른 피했다. "어쭈, 요 문디이 섹기가..." 그러면서 또 쫓아왔다. "아, 형 제발 정신 좀 차려봐요~~!" 성질난 김에 소릴 질렀다. "뭐이야? 햐, 이 쉑기가, 요 와바라. 요 와봐~!"

내가 미쳤냐, 거길 가게. 이 선배 갑자기 몸을 날려 덮쳐오는데 그 속도가 무진장 빨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행인, 뭔가를 집어 던졌는데... 그게 무슨 쇳덩어리였던가보다. '억'소리가 나더니 이 선배가 자빠졌고, 일어나질 않는다. 놀라서 가봤는데, 피가 나거나 그런 것은 없고 암튼 술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진짜로 맞아서인지 일어나질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서는 일으켜 세워볼려고 했는데, 아... 안그래도 100kg이 넘는 거구가 술에 젖어 물먹은 하마가 되어버렸으니 도저히 안아 일으킬 방법이 없었다. 가까운데 병원이나 파출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어쩔까 고민을 했다. 첨에는 그냥 버리고 갈려고 했다. 얼어 죽던 말던 그동안 당한 걸 생각해보면 고생 좀 해야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참 좋은 형인데... 술이 웬순걸...

 

계속 깨워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일어나질 않았다. 외진 곳인데다가 그나마 있던 상점들도 이미 모두 문을 닫은 상황이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몸을 계속 흔들면서 깨기만 바라고 있었다. 날은 점점 추워져가고 술은 다 깨고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였다. 낑낑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 인간이 몸을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무려 1시간여가 지난 다음이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서 마구 흔들었다. 그랬더니 "야, 자는데 와이카노~!" 하면서 신경질을 버럭 내더니만 몸을 돌려 모로 누우면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다. 아,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 "형, 일어나요... 얼어 죽어요~~!!" 계속 깨웠다.

 

결국 몸을 일으킨 이 형, 갑자기 화들짝 놀라더니 "여기가 어디고?" 하는 거다. "정말 기억 안나요?"하고 물었더니만, "아야... 큰일이데이..."하는 거 아닌가? "뭐가요?" 그랬더만, "야, 내가 여서 자고 있더나?"하는 거다.

 

앗싸~~! 역쉬 기억을 못하는군... "아, 형 갑자기 없어져서 한참 찾았는데 여기서 자고 있음 어떻게 해여?"하고 되려 성질을 냈더니, "이런 일이 엄썼는데... 술먹고 아무데서나 안자는데"하면서 갸우뚱 거리고 있는 거다. 어쨌든 빨리 들어가자고 보채서 택시를 타고 기숙사로 들어왔다. 택시를 내리는데, 이 형 지나가는 말처럼 "뉘캉 싸운거 같기도 하고..."하는 거다. 뜨끔했지만 입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후 이 이야기는 행인 혼자만 아는 비밀로 간직하고 있었다.

 

흠흠... 이 블로그엔 들어오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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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7 14:49 2004/09/0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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