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환영식 진압사건

거 이상하게도 예전에는 술 못마시면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다행히도 말술을 마다하지 않는 행인은 술자리라면 어딜 가나 대우를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매우 고생이 심각했다. 회식을 거부하는 자는 공동생활에 부적격한 성격을 가진 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고, 회식자리에서 상사의 술잔을 거부하거나 뺑끼를 치는 부하사원은 직장생활 상당히 괴로워지는 그런 시기였다. 몇 년 후배들부터는 이러한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술자리를 거부하는 후배들을 처음 만났을 때 행인 역시 무척 당황했었다는 거다. 지금이야 되려 그 후배들의 용기가 가상하게 여겨진다만은...

 

첫 직장 때려 치고 나서 바로 새로운 직장을 찾았다. 인천 연안부두 지나 해변가 철책 앞에 위치한 식용유공장이었다. 굴지의 재벌 계열사(지금은 분리되었지만)였기 때문에 기대가 컸었는데, 처음 발길을 들여 놓을 때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이건 말만 인천직할시(지금은 광역시) 소재이지 완전히 유배나 다름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색이 식료품 공장인데, 주변이 석탄 하치장이어서 바람만 조금 부는 날이면 얼굴이 검게 변하는 그런 곳이었고, 바다가 바로 옆에 인접해 있어서 바람도 무쟈게 쎄게 부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행인, 불과 한달만에 이 회사가 내 평생직장이 될 것으로 착각하고 말았으니, 바로 월급봉투때문이었다. 입사 초기라 오리엔테이션을 3개월간 받아야하기 때문에 매일 칼같이 8시간 근무를 하게 되었다. 토요일은 반나절 근무. 3개월간 야간근무는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가끔 몇 시간씩 잔업을 하는 일도 있었지만 3개월간은 가물에 콩나듯 그렇게 잔업을 하게 되었다. 그랬는데, 한달이 지난 후 받은 월급은 무려 24만원~~!!

 

앞서 근무하던 공장에서 3개월 일하고 받았던 월급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을 단 한달만에 받았다는 거 아닌가? 게다가 작업환경도 그 회사에 비해서는 월등히 좋은 것이어서 순진한 행인은 이 회사가 그렇게도 찾아헤메던 유토피아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게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별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암튼 이 회사가 맘에 들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젖과 꿀도 모자라 술이 펑펑 흘러내린다는 것이었다. 전에 일하던 회사는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형편이어서 소주 한 잔 받아먹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고, 회식이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는데, 아 글쎄 이 회사는 일 시작한지 이주일만에 신입사원 환영식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기쁠 수가, 얼씨구 절씨구~~!!!



신입사원환영식은 시내 고기집에서 이루어졌다. 회식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총 30명. 야간작업조는 빠진 인원이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인가 말이다. 기대에 가득찬 행인은 퇴근버스 안에서부터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거였다.

 

예약된 자리라 턱 들어서자마자 화려하게 펼쳐진 음식들의 향연을 볼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고기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대빵이었던 실장님의 선창에 따라 브라보 한 번 큰 소리로 외치고 술을 빨기 시작했다. 사실 고기는 주 목적대상이 아니었다. 오로지 투명한 몸빛으로 조용히 세상을 관조하고 있는 그놈의 소주가 행인의 목표물이었다. 그러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웬만하면 조용히 술을 마시려고 꽤나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한 선배사원 중 입이 무척 걸지고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부산출신 노동자가 있었다. 이 선배가 벌떡 일어나더니 "야, 신입사원들. 신입사원들이 이래 패기가 움써서 우짜노? 오늘 여 있는 사람들한테 쏘주 한 잔씩 받아묵지 않으면 너거덜은 죄다 죽는기야~~!!"하고 큰 소리로 오더를 내리고야 말았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하랴...만은 행인까지 총 4명의 신입사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와중에 행인만큼 술을 빨아본 역사를 자랑하는 넘이 없었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 아닌가...

 

결국 행인이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장하신 선배사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신입사원 대표로 행인이 술을 돌리겠다. 이걸로 다른 신입사원들을 용서하시라. 다만 행인이 소주잔이 아니라 밥공기로 술을 돌릴테니 받으시는 분은 지체없이 원샷 하시고 행인 역시 원샷으로 화답하겠다. 어떠냐? 이런 취지로 인사를 올렸더니만, 좌중이 시끌벅적해지면서 그래 너 잘났다, 화끈하다, 함 죽어봐라, 뭐 이런 응원들이 줄지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행인은 실천을 미덕으로 삼는지라 그 즉시 한 손에 밥공기를 들고 한 손에 소주병을 들고 식당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실장, 부장, 과장, 팀장, 대리, 3급사원, 직장 등 직급 순으로 밥공기를 돌렸고, 갑자기 뜬 분위기로 인하여 한 명의 낙오 없이 원샷을 감행했으며, 행인 역시 똑같이 원샷을 하며 돌게 되었다. 이렇게 직급별 순회공연이 끝난 후 이제부터 바야흐로 웬수같은 선배 평사원들 사이를 누비게 되었다. 애주가를 넘어 호주가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지라 작업은 별다른 무리 없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부서의 홍일점이었던 C씨의 순서가 되었다. 여사원에게 밥공기를 돌린다는 것이 조금 미안해서 소주잔을 들었는데, 이게 사방의 선배들에게 집중포화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왜 미스C에게는 소주잔을 권하느냐?"는 항의에서부터 "너 오늘 미스 C에게 밥공기 못돌렸다가는 낼 사표 쓸 줄 알어~!"하는 협박까지... 웬만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행인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허둥거리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

 

그때였다. 이 C씨가 밥공기를 척 들더니 지가 술을 부어 알아서 원샷을 하고 말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잔(?)을 꽉꽉 채운 것은 아니었고, 흉내만 낼 정도였지만 어쨌든 소주잔 하나 이상의 술이 들어간 것은 물론이었다. 아, 이렇게 고마울 수가... 하긴 그 때까지 이 사원하고는 이야기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던 탓도 있지만, 여자라고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역쉬 나중에 알고 보니 대찬 사람이긴 했다.

 

결국 30명 전원으로부터 밥공기로 소주 한 사발씩을 받아 원샷을 해댄 행인. 선배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그래서 2차 동행자로 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차에서 술잔 돌리라고 명령을 했던 선배가 "니 그래 술을 잘마시나? 옹야, 오늘 니 함 죽어봐라" 하고 전의를 불사르고 있었다. 이미 소주를 배가 째지게 먹고난 다음이라 더 이상 못마시리라고 생각한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행인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한 원초적 착각이었다.

 

2차에서 입가심으로 간단하게 맥주를 마셨다. 무진장 퍼 마셨다. 3차는 다시 소주집, 4차는 선배들이 인심쓴다면서 양주집, 5차는 포장마차... 선배들로부터의 집중포화가 이루어졌고, 행인의 결사항전이 벌어졌다. 술병들이 끊임없이 도열을 계속하고 있었고 시간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동틀녘에 끝난 술자리를 뒤로 하고 출근버스를 탔다. 7시 출근을 위해 순환하는 버스를 탄 것이다. 회사에 도착한 후 약 1시간 30분의 출근 여유가 있었다. 그 동안 잠깐 눈을 붙였다.

 

산뜻한 정시출근. 작업장에 들어섰는데 새벽까지 술을 같이 퍼마시던 선배들이 아직 종적이 묘연하다.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전화들이 걸려오기 시작했다. 전화들의 내용은 하나같이 "월차 좀 내주라..."라는 것이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리하여 대회전의 서막이었던 신입사원 환영식은 행인의 한 판 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선배들의 집요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To be Continued....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4/09/04 00:06 2004/09/04 00:06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86
  1. 빨리 다음 얘기해줘요. 아~ 궁금해서리...

  2. 원래 이런 이야기는 술 한 잔 빨면서 해야 술술 나오는데, 술 끊고 났더니 글빨도 영 떨어지고 암튼 그런 폐단이 나타나는구만... 쬐메 지둘려봐아~~!

  3. ㅎㅎㅎ, 탄활때 경월쏘주 마셨던게, 형과의 마지막 술자리였던가요?

    암튼... 술 끊어서가 아니라, 술자리가 아니어서 흥이 나지 않는 것이겠죠. 참, 형 술 끊은지 3년째인가요? (전 절대 못끊어요. 이 좋은 것을~ ^^)

  4. 무슨 소리~!! 그 이후에도 술이야 많이 마셨지. not은 물론 '정상적인 친구'와도 많이 마셨고, 95들 술자리 그 이후에도 많았잖아? 음... 경월쏘주... 그립다... 경월쏘주...

  5. 술로 흥한자 술로 망한다...흐흐흐...
    아직도 뒷풀이 문화는 2차3차로 이어지고 있다는 전설이...ㅋㅋ
    슬픔돠 적당히 취기에 올랐을 때가 술을 마시는 즐거움중의 최고인데 왜 술이 자신을 마실때까지 끝장을 봐야하는지...허허

  6. rivermi/ 그게 저같은 경우는 일단 술이 한 번 들어가기 시작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술이 술을 불러요. 개인의 의지로 술을 적당한 수준에서 끊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듯... 술로 망하기 전에 술을 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행인입니다.

  7. 후속편 빨리 연재해주세요. 매일 몇 번씩 들어와서 확인하고 있다구요. ^^;

    내일은 예비군훈련(향방)인데, 은근히 짜증나네요. 덴장할~~!

  8. 궁금해서요. 술을 끊으셨다 함은 이제 술을 안드신다는 말이신지....궁금....이젠 정말 한 잔도 안하시는 지...궁금...궁금...궁금...궁금...@@

  9. 슈아/ 한 4년 가까이 된답니다. 그런데 정말 이제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게 껴안고 살았던 것을 완전히 멀리 할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에요. 제가 생각해두요...

  10. 정말 대단하단 생각과 정말 희한하단 생각도 들고...그러네요. 근데 왜 끊게 돼셨을까 또 궁금하네요. 이런...호기심천국입니다.

  11. 슈아/ 취생몽사 시리즈 시작편에 그 내용이 있답니다. *^^*

  12. 감사감사...읽어 봐야지...그게 궁금했나 봐요. 와 어떻게 저렇게 많은 술을 먹나와 그런 술을 어떻게 끊었을까..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