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환원

행인님의 [몸통은 처벌될 수 있을까?] 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글.

삼성 구조본이 오늘(2월 7일) 삼성의 사회적 책임감을 통감하면서 "國民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했다(한글로 써도 되는데 꼭 한자를 쓰는 얘들의 이 쎈스). 구구절절이 주옥같은 문장이다. 사회기여를 위해 사재를 털어 헌납하고 경제의 발전을 위해 삼성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이 발표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뻔 했다.

 

삼성공화국의 제왕적 수장 이건희 회장이 신병의 와중에서도 각고의 고뇌 끝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 이번 삼성 구조본 발표의 내용들이라고 한다. 사회지도층의 도덕성,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모범으로 인정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동안 삼성이 불러일으켰던 사회적 물의에 대한 논란을 희석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도 무척 거창하다. 일단 사재 3500억을 비롯하여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의 기금 약 4500억원을 합해 8000억 상당의 기금을 조건없이 사회에 헌납한단다. SDS와 관련된 증여세 부과처분취소소송과 공정거래법 일부조항에 대한 헌법소원도 취하하기로 했다. 사회복지 사업비로 그룹차원에서 올해에만 2000억원을 책정·지원하고, 탁아소 증설과 농촌돕기운동의 배가사업도 전개하기로 했단다. 또한 15만 임직원 모두가 소외계층의 사람들과 자매결연을 맺어 자원봉사를 하도록 지원하겠다고 한다.

 

이것도 모자라서 사회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을 운영하겠단다. 구조본의 인적구조조정을 실시하고 계열사 독립경영 강화하고 사외이사 확대하고 21조 3000억원의 신규투자를 시행하고 20000만명 이상 고용을 하겠단다. 헉헉헉...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하겠다고 하니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장하다, 삼성!

 

그런데 왠지 찝찝하다. "지난 날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반성"이 이번 대규모 헌납 등 일련의 조치의 배경이라면, 적어도 자신들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구체적 반성의 언급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발표문을 다 뒤벼봐도 기껏 하는 이야기는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등의 증여문제와 X-파일 같은 문제들"이라는 정도 이외에는 별 말이 없다.

 

'등' 또는 '들'과 같은 말로 많은 문제를 포괄하는 듯한 문장을 사용했지만 그 '등'과 '들' 속에 사실은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삼성이 진정으로 반성해야할 문제는 따로 있다.

 

진짜 사과할 일 딱 하나만 지적하자. 그동안 전사적 차원에서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해왔던 노조파괴공작에 대해 사과해야한다. 선대 회장이 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라는 말이 유언으로 남아 대물림되고 있다면 모르되, 그걸 선대의 유지로 받들지 않고 있다면 이제 선대회장 눈에 흙들어간 것은 물론 그 눈도 흙이 되었을 시점이니 노조 안 된다는 방침은 철회되어야 한다.

 

지난 2004년 폭로되었던 삼성 SDI 노동자들에 대한 위치추적 등 범죄행위에 대해서 삼성은 의문점 일체를 해명해야 한다. 유령이 출몰하여 노동조합설립을 추진하던 노동자들의 위치를 추적했고 이에 대해 삼성 SDI가 전혀 관련이 없다면 관련 없음을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 노동자에 대한 밀착감시와 인신모욕, 위장노조 설립 및 블랙리스트 관리 등 그동안 삼성과 관계되어 나왔던 온갖 부당 불법 위법 행위에 대해서 선명하게 사과해야 한다.

 

노동탄압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노동자들에 대한 피해는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가? 삼성의 선심공세로 언론이 도배질 되는 동안 이 노동자들은 이제 완전히 잊혀지게 된다. 그들의 찢겨진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거대권력 삼성과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갇혀 있는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등 수많은 사람들은 무려 1조원이 넘어가는 헌납금액 중 얼마만큼의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는가 말이다.

 

이번 발표 중 자사 직원들의 봉사활동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보면서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일은 일대로 쎄가 빠지게 하면서 봉사활동까지 회사 방침에 따라 수행해야하는 직원들. 그럼으로써 회사는 직원을 동원하여 사회기여했다는 생색도 내고 엄청난 광고효과도 거둘 수 있게 되는 일타 쌍피의 효과를 얻게 된다.

 

안에 있는 노동자들을 대우하지 않으면서 밖에다가 대고 공헌하겠다 헌납하겠다 하고 떠드는 회사는 믿을 수 없다. 삼성 구조본이 밝힌 장밋빛 청사진은 그래서 장밋빛이 아닌 핏빛으로 보인다. 사회 환원 하기 전에 노동자들의 권리, 노동3권부터 보장해라. 그게 삼성이 기업의 이익을 사회로 환원하는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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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7 17:42 2006/02/07 1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