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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되새김,사죄.

  • 등록일
    2007/08/29 02:28
  • 수정일
    2007/08/29 02:28

몇번을 썼다 지웠다 하면서, 결국에는 소주를 글라스로 서너잔 버럭 들이킨 뒤에야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들.

 

어떤 글은 진솔한척 하는 메파포들로 치창한, 자신의 행한 폭력에 대한 더러운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과도하게 일반화하자면, 이런 습성을 몸소 체득한 자들이 주로 성폭력의 주범들이다.

 

한참을 쓰고 나니, 내 글과 삶에 이런 더러운 냄새가 베어있는 것을 느꼈다.

거짓으로 검철된 메타포를 배제하고 나면, 자신의 행동들이 얼마나 치졸하고 변태스러운 짓이었는지.

또 상대방에게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스스로 반성하게 되지 않을까,

 

1. 분노.

지난 2년간 어느 순간부터 나의 모든 것이었던 사람들이, 내게 하는 빈정대는 말투에 심히 삐져있었음을 인정한다.

어쩌면 애정결핍증의 한 증상. House M.D. 식으로는 호르몬 부족에 의한 한 symptoms 였던 것이다.

 

어제도, 자리에 얼굴 마주보고 앉자 마자 쏘아대는 빈정대는 말투에 심히 기분이 상했는데.

어쩌면 하는 말마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들만 꼭꼭 집어서 빈정대는지....

그건 단순히 어떤 자리라는 특수성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과거부터 지속되오던 그런 빈정댐에 대한 반응인건데.

이런 것은 보통 적대적인 관계이나 일상에서 부딛쳐야 되서 어쩔수 없이 속에 눌렸다 나오는 화법으로서.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때 주로 사용되는 무기임을 - 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화법이기도 한 터라 -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아주 황당할 따름인 것이다.

나는 상대방에 대해 늘 최선을 다하는데, 최선을 다하면 다할 수록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빈정됨으로 되돌아오는 것에 대해 곱씹으면 씹을수록, 더군다나 결국에는 그가 애정을 느끼는 타자,또는 어떤 것들-나와는 아무 상관없는-의 문제에 대해서 뭔가 요구받는 상황이 되면, 이 사람이 '나를 이용하고 있나' 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르면서 ....

 

2. 되새김.

이렇게까지 말하면 무척 내가 피해자인것 같지..

여기에 욕망이나 소통의 형이상학, 거리나 기다림등의 메타포로 포장하면 아주 그럴싸해지겠지.

 

이제부터 이런 생각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분석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빈정댐.

어떤 빈정댐은 나한테 용인된다. 그것은 상호 합의된 어떤 관계이거나, 상대방이 나에게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고 있는 경우이다. 예를들면 과거에 내가 잘못한 어떤 것들로 기인한 빈정댐에 대해서는 비록 거시기하기는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관계가 있다.

하지만 어떤 빈정댐에는 적의가 느껴지는데, 그것은 난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그런 적의를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문제는 그런 빈정댐을 왜 용인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그 빈정대는 상대방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확신에 기인한다.

이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런 빈정댐에는 다 타당한 이유와 근거들이 있다.

즉 전혀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현상태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분석일수도 있다라는 점을 애써 외면하고 스스로 포장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난 전혀 그렇지 않은데..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러 딱지붙이냐..'라는 변명은 말 그대로 변명일 뿐이다.

왜냐하면, 타자들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거나 부정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뒤돌아 조금만 생각하면 수긍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나의 최선은 그들이 원하지 않는 과도한 행동이거나 자기도취일 가능성에 대해 반성해보아야 한다.

자기 감정이나, 자신의 논리가 그토록 절대적인가?

 

둘째, 자신의 감정이나 논리의 문제에 대하여.

예전에 내가 살았던 관계에서 통용되는 어떤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누가 어떤 말을 하면, 그것의 언더라인이 무엇인지 서로 눈빛만으로 사통이 되거나, 또는 어떤 행동을 보이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알아채고 그것에 걸맞는 reaction이 서로 통하는 그런 관계들..

하지만 그런 관계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그리 길지 않으며, 심지어 새로운 관계에서는 아무런 현실적 구속력이 없다.

사람도 변하고 주변 환경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통을 여전히 고수하는 것이야 말로 기존 권력관계를 확대재생산하기 위한 횡포에 다름아닌 것이다.

나는 그런데, 너희는 왜 안그러냐는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의 횡포이자, 폭력이 된다.

더 세밀하게는 개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의 감정은 이런 것인데.. 알지?

라고 묻는 행위야 말로 가장 저열한 물음이다.

상호 합의되지 않은 것을 합의된 것처럼 과장하거나 강요하여, 상대방에게 저열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셋째, 나를 이용하는 가의 문제.

그건 그가 또는 사람들이 나를 도구적으로 생각하는가의 문제인데.

50%는 진실이고 50%는 과잉해석이다.

 

사람들은 나를 도구적으로 활용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음에도, 그렇게 스스로 처신한다.

그러면서 너희는 나를 도구적으로 희생하고 있어라고, 과도한 표정과 행동으로 오히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50%의 진실은 내가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고 것의 다른 표현이다.

사람들이 나보고, 너는 이용당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스스로 그렇기 때문이다.

 

스스로 느끼기에는 어떤 관계들에서 많은 것을 책임질 것을 강요받는 것 같겠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오해이다.

사실 사람들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별로 또는 전혀 없는데, 스스로 과대해석하거나 희생하는 것처럼 포장하여 상대방에게 일방적인 관계를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누가 어떤 고민을 털어놨을때 그것을 너무 과대해석해서 어떤 선을 넘어서까지 자신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과장하고,

난 이런 사람이야, 또는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는 당연히 알아줘야 한다고 해석해버리고는 그것을 강요하고

상대방의 Reaction이 본인의 기대에 조금만 어긋나도 배신감을 느끼는 자위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나는 최근에 그리고 어제도 그런 폭력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3. 사죄.

하루 하루 시간이 흐른 만큼 쌓이는 오해와 그 만큼의 폭력들..

나로 인해 그 사람이 얼마나 무너지는지..

아니 무너질지 염려하지 않고, 나만의 감정에 스스로 자아도취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그가 또는 그 어떤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것들에 집착을 하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무의미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일방적인 폭력을 저지르고는 스스로 합리화하는 변태적인 삶이었던 것도 같다.

 

물론, 이런 글을 읽고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처때문에 더욱 멀어질 어떤 관계들에 대해서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또 그렇게 받아들이면 된다.

쪽팔리게 자기를 합리화하면서 구걸하거나 강요하지 말고.

 

내용없은 삶이 대부분 그렇듯이,

어줍잖게 주변 눈치를 살핀답시고, 그러면서 모두 티가 다 나서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삶을 살았고,

애정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하나하나의 행동들을 빈정댐이나 무심함으로 왜곡해석하고 강요하고,

사실 난 그 누구의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누구도 원치않는 몹쓸 삶을 살고 있다.

 

다 잘못이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리 아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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