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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코포타리즘?

사회적 코포타리즘?

 

프레시안에 실린 최병천씨의 주장 링크 -

"노동운동, '네덜란드-스웨덴 모델'에서 대안 찾자"


지난번 박승욱씨의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후로 프레시안 에서는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부장인 최병천 씨가 '거시적 코포타리즘' 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나는 그가 말하는 거시적 코포타리즘이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삶의 질을 하향조정하는 결과만을 불러올것이라 판단하며 그가 제시한 네덜란드와 스웨덴 모델을 통해 그러한 '합의' 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하려고 한다.


최병천씨는 현재의 노동운동이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100인 미만 사업장' 의 노동자, 다시 말해서 조직되지 못한 89% 의 노동자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들이 참여하고 그 이해관계를 반영할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해법으로 거시적 코포타리즘, 즉 개별 사업장이나 연맹 단위가 아니라 '포괄적인 협상', 즉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 를 대안으로 말하고있다.


그러나 그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주노동자,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등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하향평준화 시켜 '노동자들 사이의 상대적 박탈감' 을 완화시키는 역활만을 수행할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것은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는 방법이 될수 없다. 계급적 대표성은 다같이 못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얻어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대안으로 주장하는 사회적 코포타리즘은 서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그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스웨덴식 , 혹은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의 핵심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양보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 전반적인 복지정책의 향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장미빛 환상으로 바라보는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상황은 '모든 노동자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는 스웨덴에서 배우자고 한다. 스웨덴이 낮은 실업률,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좋은 복지제도 등을 성취했었던 것은 사실이며, 사민당이 매우 오랫동안 스웨덴의 지배정권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사민당은 1938년에 노동조합과 사용자 연합이 파업 금지등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살쯔요바덴' 협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1947년에 사민당은 '연대임금정책' 을 추진하는데, 금속노조의 숙련 노동자들이 양보해서 저임금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으' 라는 것이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 의 골자였다.
당연히 금속노조의 노조원들은 이에 맞서 싸웠고 금속노조가 탈퇴하면서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도 파행을 겪었다.


스웨덴 모델이 높이 평가받는 것에는 시장을 규제하고 인간의 복지나 사회적 가치·연대 등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모델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하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웨덴이 그렇게 할수 있었던것은 전후 호황기에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조건, 당시 서유럽보다 더 큰 규모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경제적 조건, 즉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익성이 높을 때만 가능했었던 일이며 일시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의 세계적 호황과,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의 길을 택하면서 세계 대전의 피해와 전후 군사비 지출 부담을 줄여, 경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도 1970년대 오일 쇼크에 이은 세계 경제 위기를 벗어날 순 없었다. 경제가 불항에 빠지고 이윤율이 떨어지면서 그동안 이루어두었던 성과들도 다시 빼앗기고 있다. 스웨덴의 공식 실업률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9퍼센트를 넘고 있다. 특히, 유럽과 세계 시장의 통합도가 증가하면서 증대된 경쟁 압력에 사민당은 우경화하며 노골적으로 자본가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1985년에 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다. 지금 스웨덴에는 다양한 사회세력 간의 조화가 아니라, 계급투쟁과 높아진 실업률과 복지 축소를 둘러싼 사회 갈등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것은 국가 경제력에 의존해 이리저리 표류할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틀 내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 사회민주주의 기획이 본질적으로 내재한 한계라고 할수 있다.


또다른 사회적 코포타리즘의 예로서 최병천씨가 거론한 '네덜란드' 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유럽에서 가장 짧은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100으로 놓을 때 미국 노동자들은 140이다. 주5일 근무제는 1960년대부터 시행됐고, 보통 제조업 노동자들은 한 달간 여름 휴가를 즐긴다. 그리고 그 공백은 용돈을 벌기 위한 대학생들이 메운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노동자들이 해고될 때는 그들의 재취업과 당장의 생계 보장을 위한 계획을 노조와 사용자가 함께 마련한다.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무상교육(고등학교까지), 무상의료가 거의 완전하게 실시되고 있고,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역시 갈수록 심해지는 국제경쟁과 경기불황 속에서 혼자만 평화로울수 있는 '섬' 은 아니다. 네덜란드는 2001년부터 미국과 독일, 이 두 주요 교역국가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1990년대 중반 3퍼센트대의 견실한 성장을 보이며 서유럽에서 가장 부러움을 많이 샀던 것은 옛날 얘기가 돼 버렸고, 2001년 1퍼센트 이하의 성장을 보인 후 하강곡선을 그려 작년에는 마이너스 0.8퍼센트 성장에 머물렀고, 올해와 내년에도 1퍼센트대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초 출범한 네덜란드 정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재정 삭감을 감행하고(약 25조 원),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 동결을 요구하고, 연금제도 변경 등 사회복지 부문의 재정 지출을 낮추기 위한 대수술에 들어갔다. 삭감된 재정은 대부분이 사회복지에 관계된 예산이었고, 이에 노조들은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들이 일방적으로 고통을 전담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 정부에 대한 전면 투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평 조합원 노동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한채 곧 손쉽게 항복해 버렸다.


사회적 코포타리즘, 사회적 합의주의에 순응해온 노동조합은 투쟁을 지속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정권과 보수언론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고용안정과 임금동결을 맞바꾸는 사회적 합의, 즉 1982 년의 바르세나르 협약이후 노동조합들은 20 년 만에 투쟁에 나서려 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바르세나르 협약으로 노동자들이 더 좋은 조건을 가지게 된것도 아니었다. 1982년 이후 노동자들은 복지비 삭감, 임금 억제, 노동시장 유연화 등으로 생활 수준이 더욱 나빠졌다. 이 때부터 전후 가장 인상 깊은 성과를 거둔 네덜란드의 복지 체계가 뒤흔들리게 됐다. 노동당과 보수당의 좌우 연정 '자줏빛 동맹' 이 노조의 협조를 얻어 복지 제도를 무자비하게 공격한 결과, 경제산출에서 보건과 교육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미국보다 더 낮아졌다. 의료비 삭감으로 병원 환자 대기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중환자실이 부족해 중환자들이 죽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호황이 찾아왔지만 빈부격차는 증대했다. 이 때부터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백만장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대한 반면, 노동자들의 임금은 물가상승을 따라잡지 못했다. 임금 억제 대신 고용이 증가했다는 얘기도 과장이다. 1982년 이후 늘어난 고용의 75퍼센트가 시간제나 임시직 고용이었다. 2001년 현재 네덜란드의 시간제 노동자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33퍼센트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네덜란드의 고용안정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늘림으로 얻어낸 고용안정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 실업률은 10% 를 상회한다. 네덜란드의 '사회적 코포타리즘' 은 노동운동을 저하시켰을뿐 아니라 복지제도마져 파괴한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노동자들의 약점을 알게되었고 이제 정부는 노동시간을 하루 최대 12시간, 주당 60시간으로 연장하는 충격적인 계획을 들고 나왔고, 실업과 산업재해 기금 수혜자 제도를 엄격하게 적용하려고 하고있다.


최병천씨는 노동운동 진영 내부에서 '사회적 합의' 를 배제하려고 하는 이유가 '98년 노사정대타협의 패배에 대한 경험적 학습효과' 인것처럼 말하면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마치 대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줄뿐 아니라 사회 복지에도 기여할수 있을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고있는 서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복지체제는 국제적 경기의 호황, 또는 불황에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는 경제사정에 따라 그 동안 얻어 낸 양보도 도로 빼앗기기 마련이며 그것은 사민주의의 근본적 모순이기도 하다.


사회적 합의에 따르는 방식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성과를 가져올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제한된 임기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줄 필요성을 느끼는 관료나 제도정치인들에게는 환영받을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부분을 '현실적' 이라고 선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일반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대안으로 자리잡을수 없으며 네덜란드의 예에서 보듯이 오히려 그것은 운동을 파괴하고 길들이는, '체제내화' 의 역활을 수행하기 마련이다.


그는 박승옥과는 다른 방식의 '대안적 해법' 을 제출하고자 하려 한다고 했지만, 체제와 권력에 도전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에 의존하는 그런식의 해법은 결과적으로 박승옥씨의 해법과 맞다아 있다. 그것은 또 어차피 진정한 대안이 자본주의 체제의 완전한 대체밖에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적대적 관계에 있을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중심이되어 일어날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지금 현시점에서 해야할일은 노동운동이 이러한 체제변혁적 관점을 가지고 보다 더 공공성을 가지는, 결과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직접 권력을 쟁취할 있도록 노동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함께하는 것이 될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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