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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지 - 공동체주의가 가지는 한계.

 

 

주의 : 이거보고 영화 보시면 재미 무쟈게 없습니다. 만약 '난 핵심결론을 알아도 영화를 볼수 있다' 거나, '짐승이 하는 영화감상 따위는 구라라는것을 입증해주마' 라는 사명감(^^) 이 없으시다면 안 보시는게 좋을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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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나는 유난히 잘 울고, 떼를 많이 부리던 아이였던거 같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얼르기위해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망태 할아범' 이라는 가공의 괴물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유년기의 나를 공포로 몰아갔던 그 '망태 할아범' 이란것은, 말안듣는 아이를 잡아서 등에 지고있는 망태기에 담아 데려가서는 잡아먹는다는 설정이었다. 물론 그런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꽤나 설득력있게 들렸던 이야기였다.


인간의 무의식중에 가장 오래 남아있는 감정은 공포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해서 한 인간, 혹은 하나의 집단을 통제하는데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이 공포를 이용한 수단이 될수 있음을 말해줄수 있는것이다. 말 안듣는 아이를 어르는데 효과적인것이 어찌 망태 할아범 뿐이겠는가. 사실 그런식의 협박은 아주 오래전 '호랑이가 잡아간다' 에서 비롯된 것이며, 작게는 가정에서 부터 크게는 국가의 통치수단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온것이다.


개중에는 선의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들면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싼다' 는 격언역시 아이들로 하여금 일종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경구로 사용되는데, 사실 불장난과 이불에 소변을 지리는것과는 아무련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의 실수로 인한 화재를 방지하고자 하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수있다. '식스센스' 로 유명한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신작 '빌리지' 에서 사용되고 있는 공포를 이용한 금기사항 역시 어떻게보면 선의로 인한 거짓말이라고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웃들간에 큰 증오도 없고 자잘한 이해관계 때문에 다투는 일도 없는, 말 그대로 '평화로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비록 작지만 그 구성원들은 슬픈일이나 기쁜일이나 모두 함께 나누며 조화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근심거리가 있다면 단 하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숲에서 괴물들이 공격해오지 않을까, 하는것일 뿐이다. 이들은 그 괴물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위해 마을 외곽에 망루를 세우고 집집마다 지하 피난처를 마련해두어야 한다. 그렇지만 괴물들은 인간이 자신들의 영역, 즉 숲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마을을 공격해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살고있는 마을과 괴물들이 살고있는 숲, 그 경계선만 어기지 않는다면 사실상 아무런 문제도 없는것이다.


문제는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숲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마을 사람들의 '숲속 괴물들' 에 대한 공포는 절대적이다. 마을구성원들은 누구나 숲속에 살고 있는 괴물을 무서워하며, 따라서 아무도 숲으로 들어가보려는, 그러니까 마을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사실 굳이 마을을 벗어나야 할 필요도 없었다. 급하게 옆 마을에서 의약품을 구해와야할 필요성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괴물들' 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생물들임이 밝혀진다. 마을을 다스리는 원로회의의 구성원들이 마을의 젊은이들이 이곳을 벗어날까봐 만들어둔, '공포' 를 이용한 금기사항 이었던 것이다.


숲으로 들어가면, 즉 마을을 벗어나면 괴물들이 쫓아와서 죽인다는 이야기는 사실 그 마을의 원로들이 가지고있는 최대의 비밀이며 그들 권력의 핵심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공포' 를 이용한 가장 효과적인 통제의 수단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기도 하다. 현재도 지배자들은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을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테러리스트들이 더 많은 민간인들을 죽일것' 이라고 협박하거나, '이라크 침략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곤두박질 칠것이며 한반도 안보에도 악영향이 있을것' 이라고 협박하거나, '귀족 노동자들의 파업때문에 경제가 더 어려워진다' 고 하면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공포감을 심어준다. 그러한 공포를 이용한 통제수단의 확립은 '빌리지' 의 그것과 전혀 다를바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빌리지의 지도자들이 행하는 그 거짓말이, '선의로 인한 거짓말' 로 보일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단지 방송국의 이익을 위해 한 인간의 인생을 철저하게 짓밟았던 '트루먼 쇼' 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기존의 사회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 이룩한 '빌리지' 는 그들만의 이상적인 공동체였고 그러한 삶을 지키기 위해 마을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원로들의 거짓말은 선의로 인한 것이었다고 강변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마을주민들에게는 공포심을 이용한 기만적인 술책이었음은 부정할수 없다.


문제는 원로들이 택한 그 방식이,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기만은 시일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깨어지기 마련이고, 비록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깨어지는날 공동체의 가치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지도자들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도피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로인해 자신들만의 조그마한 이상적인 마을은 만들수 있었을지 몰라도 결국 그 마을에서 결코 벗어날수 없는 고립을 스스로 자초해 버린것이다. 그들이 '도피와 고립' 의 전술을 택한순간, 이미 그 공동체안의 권력과 기만적인 정책이 싹트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도자들의 의도가 어떠했든, 그러한 전술은 올바른것이 될수없다.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과 모순에 대항해서 맞서 싸우고, 모든 인간사회에 그러한 문제점들이 해결될수 있도록 하는것만이 그들이 택할수 있었던, 또 택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분명히 말해둘 필요성을 느낀다. '빌리지' 에서 나왔던 공동체주의적 사고방식과 구별되는 그런 부분들이 바로 우리가 추구할 '사회주의' 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비록 샤말란 감독이 그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고는 믿기 힘들지만 어차피 영화는 때로는 작가가 하려던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져다 주기도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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