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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에 실린 박승욱 씨의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에 대한 반론

프레시안 에 실린 박승욱 씨의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에 대한 반론

 

프레시안에 실린 박승욱씨의 원문 링크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
[쟁점]선배 노동운동가가 본 현 노동운동의 위기, 원인, 해법

 

프레시안 9 월 2 일자에 박승욱 씨의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에 관한 기사를 봤다. 그는 원본의 글이실린 '당대비평' (2004 년 가을호) 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는 그 내부적인 것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하며 몇가지의 주장을 하고 있기에 이에대해 반론을 하고자 한다.


주장들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의 주장 전반과 그가 대안으로 세우는것을 통해서 봤을때 그는 노동자들이 정치투쟁을 포기하고 시민운동과의 협조하에 소규모 공동체 위주의 자기헌신적 운동에 매진하기를 바라는듯 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바라는듯한 그 자신의 앞선 주장들과 모순되며, 권력에 대한 도전을 포기함으로서 현재 정치.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게 '안전망' 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이후 진행될 글중에서 왜 그의 주장이 그러한 결과만을 초래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선 그가 말하듯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 안 된다.' 는 현상 자체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 그는 침묵함으로서 전체 글의 맥락과 서로 모순된다. 그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낮아지는 가운데서도 민주노총의 조합원수는 1995년 406,748명에서 2002년 685,147명으로 무려 28만 명 정도 늘어난반면 같은 기간 한국노총의 조합원수가 1,208,052명에서 876,889명으로 줄어들었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것처럼 '대기업 노동자 위주의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위기' 를 불러왔다면, 어떻게 '대기업 노동운동' 위주의 민주노총 조합원의 숫자는 늘어날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단순히 상급단체를 바꾸었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왜 노동자들이 상급단체를 ( 스스로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오고있는 ) 민주노총으로 바꾸길 원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것이다.  


조합율이 낮아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임시직,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임시직,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 노동의 특성상 조직화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한국에서 불안정 고용이 본격화한 것은 1980년대 초부터였으며, 1987년에 임시일용직 비중은 전체 노동자의 45퍼센트에 이르렀다. 그러던것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로 노동운동이 힘을 얻게 되면서 크게 줄어들었다. 임시일용직 비중은 1994년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IMF 때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통과되면서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다시말해 노동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고 힘을 얻을때에는 기존의 임시직, 비정규직도 정규직으로 전환시킬수 있으나 투쟁이 어려운 상황이 되거나 노동자들 스스로 포기할때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되며, 그에따라 조직율도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때 떠들석하게 거론되었던 스웨덴식 노사관계에서도 스웨덴의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때는 비정규직이 감소했으며 힘을 잃었을때는 증가하는 모습을 볼수있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프랑스,영국 등 세계 모든나라에서 비정규직의 증가는 노사간의 힘의 균형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노동자가 '자기희생' 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을때 전체 사회가 '아, 노동자들 참 멋지다.' 하며 감동받아서 배풀어주는것이 아니며, 사회적 합의에 충실하거나 국가경제발전에 매진할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으로 노사간의 힘의 균형에서 우위를 차지했을때만이 정규직화를 쟁취할수 있다는것은 이미 국내외의 노사관계에 대한 진행사항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는것이다.


다만 현상에서 정규직 노동조합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들은 아쉬운 부분들이긴 하다. 하청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을 조직하고 이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자고 하는 박승욱씨의 주장에대해 반론없이 찬성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제안하고, 몇몇 노동조합에서 보여주듯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강력한 연대투쟁을 통해 함께승리하는 노동운동을 건설할때 가능한 것이지, 그가 말하듯 '권력지향형 노동운동의 포기' 일수는 없는것이다.


그는 또 임단협 이외의 사안들, "노동자 생활조건,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대안의 정책 부재" 가 전투적인 임단협 투쟁의 성과를 역으로 상쇄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노동자들의 대학' 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자 스스로의 이익을 지키기위해 싸우는 한계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 전체의 변혁을 위해 싸워나갈 '정치조직' 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비록 맹아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인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박승욱씨는 참교육, 참의료는 어디로 갔느냐고 비아냥 거리지만 전교조가 학교안의 문제를 넘어서 교육환경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고, 가스,전기,통신,철도 등 공공서비스 영역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의 문제를 넘어 사유화 자체에 반대하고 환경문제에 대한 제기 ( 금번 LG 칼텍스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보여지듯이 ) 까지 나서고 있으며, 지난 보건의료노조의 파업시 ( 서울대병원 등 ) 과도한 입원료의 시정등을 비롯해 사회 전반적인 의료공공성을 앞세웠던점, 지하철노동조합 파업시 승객에 대한 안전과 과도한 요금인상의 철회요구등 공공성과 관련된 투쟁들은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박승욱씨는 또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 된다고 해서 현재의 노동운동 위기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어렵고 극단적으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라고 말한다. 이런 태도는 말하자면 '세상이 왜 이따위야!' 하고 허공에 대고 주먹한번 휘두르고는 집에가서 발닦고 자는 행태와 다르지 않다. 세상이 이따위가 되어버린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것이 이윤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본주의체제가 아직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가? 나는 그 해답이 노동자들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잡고 자신과 사회의 모든 억압받는 이들을 함께 해방하는 사회주의적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박승욱씨는 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것이다.


그는 '생태' 와 '시민' 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소중히 여겨야함은 더이상 말할것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생태를 중요하게 여기는 녹색운동의 방향이, '자연은 순수한 이미지로 보존되어야 한다' 는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것은 아니다. 자연은 인류와 함께 진화하는것이며 상호 연관되어 존재하는것이지 독립적인 절대 순수의 이미지로 존재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은 상호간에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관계이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닌것이다. 그런점에서 볼때 '사회주의는 성장과 발전 이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둥이' 라고 주장하는 박승욱씨의 관점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가장 바람직한 운동의 방향은 인간에게 금욕을 강요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


환경과 자연에 대한 대규모적인 공격및 파괴는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찾아온 것이다. 오로지 이윤만을 고려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자연과 환경에 대한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파괴를 불러온것이며,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양식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인류가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결국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자본주의의 극복이 선행되어야 하며, '민주적 계획경제' 에 의거하는 사회주의적 경제체제가 그 진정한 대안이 될수있을것이다.


노동운동이 시민운동과 연대하는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연대의 형태가 시민단체의 관점과 정치를 따라야 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 문제다. 그는 맑스주의는 지나치게 계급을 중시하고 때문에 배타적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달려있다. 운동에 있어 왜 노동계급이 중요한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소외받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결코 자유로워 지거나 소외에서 벗어날수 없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뿌리부터 무너뜨릴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는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서 다른 이들을 해방시키는' 역활을 수행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노동계급의 그러한 역활때문에 사회변혁에 있어 노동자들은 중심에 있을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민단체들과 연대할때도 마찬가지다. 연대의 정치적 방향과 운동에 대한 관점은 노동계급의 그것이 되어야 한다.


시민단체들의 운동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며, 박승욱씨가 지적하듯이 매우 열성적이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시민운동은 계급통합적이며, 그 때문에 운동의 관점과 방향을 잡는데있어 때때로 보수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시민운동을 형성하는 인자들이 비록 '부르조아' 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중간계급들이 다수 참여하기 마련이며 그때문에 체제에 안주하고자 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참여연대등 시민운동의 주요한 단체들이  '개혁적인 이미지' 를 이유로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는것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언급할만한 것은 지난 대구 시내버스 파업시에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보여준 태도다. '노동조합이 요구하는 버스의 공공성은 현실성이 없다' 고 주장하던 그들의 보수성은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에 있어 어떤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폭력시위에 대한 입장도 짚어볼만한 문제다. 한마디로 박승욱씨가 말하는 폭력시위에 대한 입장은 시위에 있어서 폭력사태가 일어나는 원인과 과정을 무시한 도덕적 강박증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평화적으로 행진한다면 저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작년의 노동자대회 이전에 벌어졌던 수많은 폭력사태에서 집회 참가자들은 그가 그렇게도 혐오하는 쇠파이프, 화염병을 사용하기는 커녕 휴대하지도 않았다. 박승욱씨가 문제삼는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시위의 폭력사태가 일어나는것을 문제로 하는것인가, 아니면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하는것을 문제로 삼는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나는 '시위참가자가 경찰의 진압봉에 두들겨맞아 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어 여론의 동정표를  얻어내려는' 위험한 의도와 전술을 그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맨 앞에서 말했지만 박승욱씨의 주장은 내용 곳곳에서 사회 전체의 변혁과 공공성을 위한 투쟁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사회 전체의 변혁이 아닌 일부 논점이 되는 정책 (  환경문제 라든가 )에 있어서의 변화, 그것도 근본적인 변혁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도전을 회피함으로서 지배층의 도덕성과 아량에 의존하는 제한적인 변화만을 얻어낼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서 그 자신의 관점이 모순적인것을 보여준다.


공공성을 띈 사회전체의 변혁은 극히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극복과 그 대안이 될수있는 사회주의체제의 수립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적대적 관계에 있을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중심이되어 일어날때 가능한 일이다. 비록 우리 노동운동이 아직은 완전하게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의 공세를 겪으면서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라는 관점을 가지고 운동에 나서고 있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가 해야할일은 노동운동이 이러한 체제변혁적 관점을 가지고 보다 더 공공성을 가진 강력한 투쟁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보수우파들의 공격으로부터 이 운동을 보호해야 하는것이지, 그들의 말장난에 입맞추어 대기업 노조가 문제라는둥, 정치권력에 도전하는것이 부질 없다는둥, 폭력시위가 문제라는둥 의 이야기를 하는것은 아니다. 그것은 운동을 성장시키는것이 아니라 운동을 죽이는 것이며, 그러한 입장으로 사회변혁은 아득한 꿈으로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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