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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생태적 야만주의와 ‘환경제국주의’

출처블로그 : himammo님의 블로그

생태적 야만주의와 ‘환경제국주의’

 


- 과학기술은 밝고 어두운 양면을 지니고있다 -
 

 
 
 

 

생태계 파괴와 자원 고갈을 부추기는 과학기술


현대 물질 문명 사회를 만들어온 주역이 과학과 기술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행은 과학과 기술이라는 두 개의 개념이 왜곡된 채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되어 사용되고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논리상 여기에는 철학적 사고가 비경제적인 불필요한 요소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즉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돈벌이가 된다면 공기나 물 그리고 모래통과 석탄을 가지고 필요한 수많은 원료와 상품을 만들어내면 될 일이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사고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science)’이란 말의 어원은 ‘scienti’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이 단어는 ‘안다(scio)’는 뜻을 가진 동사의 추상명사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닌 과학을 일컫는 것이며, 따라서 과학은 철학적 의미가 아닌 단?지식을 의미한 것이라고 본다. ‘기술(technology)’이라는 말은 ‘mechane’라는 그리스어로 ‘방법’ 또는 ‘절차’에 관한 계획을 고안해 내는 일과 이를 실천에 옮기는 방법을 일컫는다.

자본가들은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세계 도처에 신속히 침투하여 노동의 분화를 촉진시킴으로써 원주민과 노동자를 돈벌이의 객체로 전락시켰다. 이것은 인간의 동질화를 가져와 토착적인 생산성과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를 증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분화도 촉진시켰다.

 

예컨대 과학기술을 상업용 목재를 생산하는 데 이용하기 시작했다. 산림은 한 가지 나무로 대체됨으로써 종의 다양성 파괴가 촉진되었다. 생물종의 절반 이상이 서식하고 있는 열대우림이 파괴되었으며, 그곳의 일부는 대규모 인공 조림으로 대체되었다. 때문에 열대우림은 지금 생물학적·유전학적인 사막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것은 생물종과 개미 연구의 독보적인 권위자이고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에드워드 윌슨(1929∼)이 자신의 저서 『생명의 다양성』(1992년)에서 1년에 2만7000종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고 주장한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라져가는 지구생물들
 
 
존 포스터 교수는 내가 번역한 『환경혁명 ---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찾아서』(1996년, 동쪽나라)에서 “지난 40여 년 동안 지구 전체의 삼림 가운데 특히 생물종의 보고인 열대림의 벌목량이 해마다 잔존 열대림의 2%로 계속 제한된다고 해도 100년 후에 남아 있는 열대림마저 대부분이 사라질 것”으로 추정하고, “만일 열대 지방에 있는 나라들의 인구 증가율과 똑같은 수준으로 벌목될 경우 30년 이내에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 인간은 식품 공급량의 80%를 20종의 생물종에 의지하고 있으나, 현재 식용 가능한 식물만도 7만5000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지금 인간의 능력으로는 멸종되고 있는 종의 효용성을 채 밝혀보지도 못한 채 수많은 생물종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처럼 계속될 경우 생태계 파괴로 인해 지구는 더 이상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돌변할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생태계는 일종의 유기체와 같은 복잡성과 상호 연계성을 띠고 있고, 고무줄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복원력이 있는 반면, 일정 정도를 넘어서는 외압이 가해지면 순식간에 연쇄적이고 장기적인 파급 효과를 미쳐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돌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40년대 이후 단 20여 년 동안에 인류 역사상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가장 해로운 물질들이 대부분 만들어졌다. 이러한 물질의 축적은 생태계의 복원력을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이른바 석유화학산업으로 촉진된 오늘날의 합성 제품 시대는 자연의 순환 작용으로 분해되지 않고 장기간 생태계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유해 물질을 엄청나게 쏟아내고 있다. 그 결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종이 상실되고 생명체를 학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자원의 고갈을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에너지원이 채취될 경우 앞으로 석유는 50년, 우라늄은 60년, 석탄과 천연가스는 200년이면 바닥이 날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필요한 것마저 자동화를 추진함으로써 에너지 자원의 낭비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 이유는 오로지 돈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돈보다는 후세를 위하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람의 손으로 여닫으면 될 출입문마저 굳이 전기를 이용하는 자동화로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과 ‘환경제국주의’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역설의 시대에 살고 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눈부시게 발달해 온 근대 과학기술의 힘을 이용하여 오로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자연에 대한 정복과 통제력을 가속화해 왔지만, 지난 200년 동안 이루어진 그러한 힘의 행사는 새로운 차원의 지구적 위기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하느님, 우리를 닥쳐올 위기에서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오존층 파괴, 계속 확대되는 사막화, 산성비, 삼림 벌채, 지구온난화를 포함한 급속한 기후 변화, 전염병의 만연, 생물종의 소멸, 에너지원의 고갈 등 이른바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 위기가 가속화되어 왔다. 역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난 100년 동안 세계 경제는 1300%나 성장했지만 빈부 격차는 계속 확대되어 왔다.

 


 

 

지난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엔 인간환경회의’가 개최된 이후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유엔 환경개발회의’가 개최되기까지 20년 동안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와 후진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부의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그래서 주변부의 40여개국 이상은 자연 환경을 포함한 모든 삶의 조건이 과거 20년 전보다 더욱 악화되어 왔다.

어디 이것뿐인가. 1750년 무렵에 선진국과 후진국의 1인당 소득 수준은 거의 같았다. 그런데 1930년 무렵에 선진국 1인당 소득은 780달러(1960년 달러 가격 기준으로)인 반면 후진국은 190달러로 1750년 수준에 머물렀다. 1960년에서 1989년까지 세계 부의 배분에서 가장 부유한 20%와 가장 가난한 20%가 각각 차지하는 비율은 30대 1에서 60대 1로 그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다.

앙드레 군더 프랑크가 주장한 것처럼 이들 국가는 지금도 ‘저발전의 성장’이라는 구조적인 경기 침체라는 악순환의 굴레 때문에 해마다 몇백만 명이 순전히 기아로 죽어가고 있지만 손도 못 쓰고 있는 실정이다. 각종 전염병으로 죽어가면서 자기가 무슨 병으로 죽어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식량이 부족해서 그런가. 그렇지 않다. 유엔식량기구(FAO) 통계에 따르면 지금 세계는 이들을 충분히 먹이고도 남을 식량이 있다. 절대량이 부족하여 해마다 몇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영양 실조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우리는 이제까지 성장과 발전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마땅히 제기해야 한다. 이와 함께 과학기술의 문제점과 성장의 속도를 조절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20세기 중반 경제 개발을 통해 못 사는 나라들을 도와 주겠다는 미국과 구소련 중심의 발전 패러다임은 파산 선고를 받은 지 이미 오래이다. 특히 1990년도를 전후하여 냉전의 종식과 함께 새롭게 형성된 세계 질서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1995년도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함께 이제 세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제 전쟁’, ‘무한 경쟁’, ‘생존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 불균등과 지구 환경 파괴의 심화는 선진국의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훤하다.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에서 세계 정상들이 ‘유엔 환경개발회의’를 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이른바 ‘리우 선언문’에 서명했지만, 이것의 본질은 이제 선진국이 지구 환경을 위해 오염 저감 방안을 추진할 테니 제3세계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고 자기들의 환경 기술을 수입하라는 저의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명목상 좋은 의견을 담고 있음에도, 그 선언문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후진국 간의 경제적 불균등 문제와 환경 파괴의 기여 문제 등 더욱 근본적인 의견 마찰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하나만 보더라도 현재 미국 한 나라가 세계 총 배출량의 25%를 차지하고, 선진 공업국의 전체 배출량은 71%를 차지하고 있다. 1980년대 말에 동유럽을 포함한 선진 공업국의 원자재 소비량은 전 세계 소비량의 81%에 이르고 있다. 철강은 81%, 자동차는 92%, 전기는 81%를 소비하였다.

 

미국인들은 115배의 종이, 320배의 자동차, 52배의 고기류, 그리고 46배의 전기를 각각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산업혁명 이후 지구를 지탱 불가능하게 만들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만들고 있는 주범이 바로 미국을 비롯한 선진 공업국들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진국이 ‘환경제국주의’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도 그들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환경재앙에 직면한 지구촌

 

 

 

 

생태적 야만주의의 종식은 사회 체제의 변혁에서부터

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없는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생태계와 인류 문명의 파멸을 촉진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띠고 있다. 수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30∼4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을 경고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집단 ─ 대부분 권력가, 행정가, 대기업가, 다국적기업 세력 등 ─ 들은 환경 위기라는 주장에 대해, 과학적 불확실성과 자연의 자정 작용이 무한할 것이라는 이유로 근본적인 조치들을 한없이 미루고 있다. 다만 그들이 하는 일은 자동차의 매연을 줄이는 후처리 장치를 달거나, 기업가에게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소비를 줄이자’거나 ‘분리 수거를 잘 하자’는 등의 개인적 질서와 행동에 호소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대다수 인류가 현대 과학기술이 만들어내고 있는 위기 ─ 환경의 파괴, 빈부 격차,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의 공포 등 ─ 를 과학기술의 발달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다는 점이다.

 

무책임한 기득권 세력들은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석유와 석탄, 천연 가스와 같은 화석 연료가 고갈되면 핵발전으로, 그 다음에는 핵융합 발전을 통해 에너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입하고 있다. 심지어 콩알만한 인조 식량을 먹으면 현재와 같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환경 오염으로 지구에서 살 수 없는 날이 오면 다른 혹성에 가서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지구온난화로 야기된 엄청난 자연재앙을 형상화한 ‘투모로우’
 
 

정치권력가, 행정가, 자본가 세력 가운데 무책임한 세력들은 오늘 당장 자본의 축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런 막연한 기대를 설파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이 누구의 도구가 되어 왔는가를 알고 있다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반생태적인가를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불가사의한 과학기술 혁명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비행기의 개발과 같은 교통 혁명이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 것과 같이, 오늘날 운운하고 있는 정보통신 혁명도 마찬가지 길을 가고 있다. 냉전 시대에 적의 동태를 감시했던 인공위성이 환경 오염을 촬영하는 데 활용될 수는 있다고 해도, 파국적인 위기에 처한 생태계의 파괴를 방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수단은 되지 못하고 있다.

교통과 통신 기술의 눈부신 발달은 이른바 지구촌 시대를 도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아로 죽어가는 인류를 신속하게 구하는 순기능보다는, 지구상에 빈곤과 착취를 심화시키는 역기능으로 더 많은 기여를 해 왔다. 역사적으로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식민지 세력들은 앞선 자신들의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지구 반대편의 더 많은 노동력과 자연 자원의 착취를 가속화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과학기술을 돈벌이의 도구로 삼아온 세력들이 보여준 역사의 교만과 생태적 야만주의를 종식시킬 수 있는 힘을 모아야 한다는 점이 더욱 자명해졌다. 침략성과 표한성을 지닌 식민지 시대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인류와 자연을 계속 맡겨두었던 역설의 시대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손으로 끝장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미래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설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를 종식하기 위해 양심있고 의식있는 60억 인류가 네트워크적 사고와 행동 조직체를 결성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기 위해 힘을 모아나가야 한다.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지금 시작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오늘의 지구적 차원의 생태계 위기는 자연의 위기도 아니고, 헐리우드 영화에서처럼 몇몇 탐욕스러운 인간의 잘못과 실수에서 비롯된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현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모든 역설적인 위기와 마찬가지로 사회 체제의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해결의 구체적인 방안은 한 사회 체제를 어떻게 변화시켜 낼 것인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기나긴 고난의 세월 속에서 쌓아올린 현대 문명 사회의 지속가능한 존속과 발전의 여부가 바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조길영 / http://www.ilsangreen.net/green/go20.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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