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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는 편파적이지 않아? - 중립에 대한 환상.

지난 아시아나 항공 조종사 노동조합의 파업때도 그랬지만, 온라인 게시판 등에서 토론하다보면 종종 제목과 같은 말을 듣고는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노조의 입장이지' 라는 것이죠. 비단 노동조합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최근의 강정구 교수를 둘러싼 논쟁이나 민주노동당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는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좌파적 시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당신의 이야기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듯 합니다.


좀 더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전에, 먼저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립' 이 가능한지 부터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마다의 생각이 있고, 비단 '좌파 운동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어떤 사람이 사회과학이나 시사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고 지배자들이 교육시킨 생각들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관점이 없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관점이 지배자들의 관점에 대부분 동화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죠. 설령 '유행과 연예인만 아는 젊은층' 이라고 하더라도 일부에서 이야기하듯이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중립적이지 않다' 는 이유로 비난하는것이 정당하려면 사회생활과 전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집단이 그 집단안에서 이 사회를 구경하면서 즐기는 담소의 자리 정도가 아니면 안 될것입니다. 모든 관점과 입장에서부터 자유로울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중립이란것도 존재할수 있겠지요. 그런게 가능하다면 외계인들의 집단 정도가 아닐까 하는데, 그나마도 그들이 지구에 찾아오는 어떤 목적이 있다면 ( 관광이든 우호방문이든 전쟁준비든 이민요청이든 ) 그 사회에 대한 일정한 분석이 필요하니 또 모를일입니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립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중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보수층, 보수적인 의견도 존중해야 하는것 아니냐'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 그들을 존중할 필요는 있습니다만 그런 의견 자체를 존중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 반드시 포함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수파의 의견'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나 문화재를 지키자는것이 아니라 기존의 소수 기득권계층,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능하지도 않은 중립 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질까요? 그것은 현실 사회가 전혀 '중립적' 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그와 같은 역학관계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준 사건이 바로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지요, 많은 분들이 지적하듯이 명백한 위법행위를 저지른 다른 위원들은 그대로 두거나 오히려 사실상의 사면조치까지 내리면서 조승수 위원만 과중한 벌금형을 내린 것은 그야말로 법은 만인앞에 평등하지 않으며 법리해석이 중립적으로 이루어 지는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자본과 정치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각종의 제도와 장치들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피지배 계급들에게는 자신들의 논리를 강요하고 교육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비단 조승수 의원의 건만 아니라 우리들은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매일 펼쳐보는 신문과 TV 뉴스 들에서 일상적으로 중립적이지 못한 상황들을 많이 보고 겪게 됩니다. 심지어 검찰 수뇌부들 처럼 중립이란 단어를 이상하게 비틀어서 이용하는 경우도 빈발하게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그러한 일들이 거듭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세상이 전혀 '합리적인 원칙' 대로 굴러가고 있지 않다는것을, 즉 지배자들에게 '편향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나마 인식할수 있게 됩니다. 중립을 강조하는 경향은 그러한 편향성에 대한 일종의 반발인 것이죠.

 

그런면에서 보면 중립을 강조하는 경향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쪽에서 살펴본것처럼 중립이란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도 합니다. 혹자는 '보수, 진보 양 진영의 입장이 조화롭게 기능할수 있도록 해준다면 그것이 중립이 아닌가?' 하고 물어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 기사 한 꼭지에 박수쳐주고, 한겨레신문 기사 한 꼭지에 박수쳐주면서 양쪽의 주장을 똑같은 정도로 지지해 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립이 될수는 없습니다. 그런 입장으로는 아무런 대안도 만들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적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온 사람으로 노암 촘스키와 함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는 '하워드 진' 의 '달리는 기차위의 중립은 없다' 라는 책은 그러한 입장이 왜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립이 될 수 없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책은 하워드 진이 진행해온 시민권 투쟁, 반전운동, 노동운동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 이면서, 동시에 현 체제에 대한 비판이고, 그에 이끌려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한 비판입니다.


하워드 진은 이 책을 통해서 '이미 기울어져 있는 세상에서의 중립이란 현 체제의 유지' 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중립적인 입장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것이 사실은 보수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죠. '달리는 기차' 라는 단어는 이미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세계에서 반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찬성일 따름이며,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찬성아니면 반대의 이분법' 이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일부도 있습니다만, 체제를 유지하는 중립의 입장을 취하면서 이분법 운운 하는것은 모순이고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당신의 이야기는 중립적이지 않아' 라고 말하는 비판에 수긍할수 없으며 그 비판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말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입장은 중립적인 관점이 아니라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여성,장애인 등 피지배 계급의 입장에 철저히 '편파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더 옳바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단순히 선, 악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이 세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계급의 일원으로서 '보다 나은 삶' 을 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진보 란 바로 그런 삶을 만들어 가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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