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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공무원노조 파업평가 와 전망 / 실패한 파업?

다함께 44 호

공무원노조 파업평가 와 전망 / 실패한 파업? - 김인식

http://alltogether.or.kr/

 

 

노무현 정부는 공무원노조에 전쟁을 선포했다. 우리 사회의 지배자들은 공무원 노동자들이 “[지배 계급의] 국민이 아닌 민주노총의 명령에 따르”는 것에 이를 갈았다.(<동아일보> 11월 16일치.)
열린우리당의 소위 ‘개혁파’ 의원들도 예외 없이 공무원 노동자 파업에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 결과 공무원노조 파업을 둘러싸고 공식 정치 구조 안에서 첨예한 양극화가 일어났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한 목소리로 “파업 철회와 단호한 대처”를 요구한 반면, 민주노동당은 파업을 적극 지지했다.

 

민주노동당은 공무원노조 파업 전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를 통해 열린우리당이 쥐고 있던 정치 양극화의 왼쪽 극을 되찾을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순전히 무력에 의지해 공무원노조 파업을 파괴했다.
“경찰 병력이 전 관공서를 점령하다시피 들이닥친 것은 군사독재 정권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김영길 전공노 위원장)
이것은 정부와 여당이 심화되는 경제 위기와 강화되는 우익의 공세에 직면해 우파와의 타협을 선택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줬다.
“정부·여당이 초강경 대응하는 것은 그 자체가 정부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노동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지켜보는 자본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www.labortoday.co.kr, 11월 12일치.)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의 핵심 지배 전략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했다.
노무현은 자신이 동의를 좀더 중시하는 지배 전략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했다. 즉, 노조 지도자들과 타협하고, 그러면 노조 지도자들은 현장 조합원들에게 협상 타결안을 내놓는 방식 말이다.
정부가 한때 내놓았던 ‘네덜란드식[또는 스페인식] 노사 모델’은 그런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표류했다.
경제 위기의 심화는 노무현 정부가 양보할 수 있는 여지를 심각하게 제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잇달아 예정돼 있는 산업 전투의 고리를 끊어내야 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됐다. 투쟁 경험이 부족한 공무원노조가 그 표적이 됐다.

 

노무현은 ‘노동조합 전체를 한꺼번에 다루지 말고, 그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내’는 새처 식의 노동 지배 정책을 따랐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 억압적인 정부들이 주로 사용한 방식, 즉 법과 경찰에 기대 공무원노조 파업을 파괴했다.
그러나 이것은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게] 부메랑이 되는 행동”(홍세화)이었다.
왜냐하면 공무원노조 파업 파괴가 “위기의 노·정 관계에 자극제로 작용하면서 올들어 노·정 관계가 최대 위기 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이다.(<경향신문> 11월 16일치.)
그 어느 때보다 노동조합과 노무현 정부 사이에 커다란 금이 갔다.

 

이 파장은 노동조합에만 한정되지 않을 듯하다.
노무현 정부는 공무원노조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서울 지역 대학들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고 출입자들을 검문·검색했다.
1980년대 세대에게나 익숙했던 일들이 역대 정부 중 가장 ‘개혁적’이라던 ‘참여정부’ 하에서도 재현된 것이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이 낯선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은 “노무현 정권은 공무원노조 3권 보장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15년 전 노태우 군사정권과 이름만 다를 뿐 성도 같고 성격도 같다.”고 비판했다.

 

 

실패한 파업?

 

 

정부와 언론들은 노조원들의 참가가 저조해 파업이 실패했다고 말했다. 파업에 헌신적으로 연대했던 일부 활동가들도 이런 시각을 공유하는 듯하다.
그러나 공무원노조 파업의 영향은 단순하지 않다.

 


행정자치부는 파업 참가자 수가 3천2백 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파업 참가자 집계는 실제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았다.
“정부 측은 ‘파업 참가자 = 징계 대상자’임을 고려해 신중한 파악”을 했기 때문이다.(<연합뉴스> 11월 15일치.)
더욱이 정부가 파업은 물론 집단 행동 일체를 불법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수천 명의 조합원들이 용기 있게 ‘불법’ 파업에 참가했다.

 

<매일노동뉴스>에 따르면, 11월 13일과 14일에 서울에 집결한 공무원 노조원 수는 8천여 명이었다.
공무원노조는 공식적으로 4만 4천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아마도 파업 참가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저항을 포함한 수치일 것이다.
실제로, 상경 파업에 참가하지 못한 노조원들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파업에 동조했다 ― 지각, 휴가, 집단 자연 보호 활동, 체육 대회, 중식 집회 등.
많은 노동자들은 ‘마음만은 파업’이라는 심정이었다. 1백억 원이 넘는 파업 기금 모금도 파업 지지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 같은 현장 조합원들의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노조가 3일 동안 파업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정부 탄압 때문에 ― 특히, 11월 4일 정부의 강경한 담화문 발표 이후 ― 상당수 조합원들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다.
또, 정부가 협상 자체를(심지어 대화마저도) 거부해 파업을 며칠 남겨 놓고 노조 지도부도 잠시 동요했다. 
그러나 정부는 파업 찬반 투표 봉쇄라는 ‘예비검속’까지 했지만 파업 돌입을 막지는 못했다.
파업 돌입 그 자체를 “승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공무원노조가 최초의 파업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했다.
그렇지 않고 공무원노조 지도부가 정부 탄압에 굴복해 파업을 지레 포기했다면, 그 결과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정부는 탄압의 여세를 몰아 징계 등을 통한 노조 무력화와 다른 산업 부문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싶어했지만, 상황은 정부의 계획대로 되고 있지 않다.
한편, 울산 동구청과 북구청의 파업 참가율은 각각 73퍼센트와 53퍼센트였다.
두 곳은 민주노동당 구청장들이 파업을 지지해 징계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덜했던 곳이다.
이것은 정부가 순전히 탄압에 의지해 파업을 파괴했음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공무원노조 지도부가 노동자 대회 전에 파업에 돌입했더라면 탄압의 효과를 크게 상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공무원 노동자들은 2∼3일만 저항하면 파업을 앞둔 수만 명의 노동자들로부터 방어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면 더 많은 공무원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할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한편, 정부는 노동자 대회를 앞두고 공무원노조 파업을 파괴하는 것에 심각한 정치적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공무원노조 파업의 성사 여부는 파업 규모와 연대에 달려 있었다.
즉, 공무원 노동자들이 노동자 대회에 얼마나 참가할지, 무엇보다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공무원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연대를 보낼지가 관건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동자 대회에서 공무원노조 파업에 연대를 호소하고 수천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공무원 파업 참가자들을 엄호한 것은 노동자 연대의 전통이 살아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의 11월 26일 총파업 선언은 아쉬움을 남겼다.
15일에 파업에 들어가는 공무원 노동자들에게 26일은 결코 가까운 일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또 정부의 모진 탄압 때문에 전체 노조원의 1퍼센트도 채 안 되는 1천 명 남짓이 상경 파업을 한 상황에서, 이제 막 등장한 신생 노조가 정부를 상대로 사흘을 버틴 것은 놀라운 저항력이었다(이런 이유 때문에 산개냐 집중이냐는 이 파업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부는 1989년 전교조 탄압의 전례를 따르고 싶어하는 듯하다.
그러나 공무원노조는 전교조가 10년에 걸쳐 이른 그 지점에서 정부와 싸우고 있다.
이미 14만 명의 조합원을 보유한 사실상의 노동조합이고, 그 때문에 상당수 지자체들이 공무원노조와 단체협약을 체결한 상태다.

 

정부의 파업 노동자 징계라는 2라운드 전투도 만만치 않은 저항에 직면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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