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평행선

여성노동권 관련 세미나를 하고, 평행선 영상을 같이 봤다.

조금은 무덤덤하게 봤다. 이 영성을 처음 봤을 땐 어떤 느낌이었을까.

 

노조위원장을 비롯해 집행부들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 회사와 똑같은 태도로 하나같이 예의없는 말을 내뱉을까..

남성/여성, 정규/비정규 노동자의 분할은 자본이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해야 할테지만,

그 안에서 자본이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그대로 재현하는 이들에 대해 인간적인 비판도 필요하지 않을까..

 

함께 싸웠던 이들을 져버리는 일은 왜 어느때나 일어날까.

어느 단추를 고쳐 끼워야 세상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까.

 

 

 

 

하지만 영상을 무심하게 보기도 했는데, 영상 속 일들이 잘 실감나지 않았다. 영상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게 아니라, 내 상태가 그렇단 얘긴데, 어느 순간의 환희나 어느 순간의 분노 모두 멀게 느껴진다. 감정이 죽어가는 상태는, 좋지 않아..;

 

 

 

중간에 '싸울 준비를 하게'란 가사가 반복되는 노래가 나온다. 찾아보니 정윤경의 '칼을 가시게'다. 이 사람은 어쩜 이리 좋은 노래를 많이 만들었을까.

 

2010/08/10 09:55 2010/08/10 09:55

유령작가

재밌게 봤다.

 

이완 맥그리거. 훈남.

 

전쟁의 책임을 권력자 혹은 권력집단에게 돌릴 수 있을까 싶은데, 영화가 그것 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허긴, 아담 랭은 자신이 테러와 전쟁을 치른 것이라는 신념을 굳게 갖고 있으니. 아담 랭 나쁜 놈이라고 얘기하는 건 아닌 듯 싶다.

 

아무튼, 영화는 무엇이 대상조차 없는 영속하는 전쟁을 요구하는지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편이 어설프게 답을 던지는 것 보다는 나을 듯 싶다.

2010/08/08 13:07 2010/08/08 13:07

보는거앨렌 페이지, 킬리언 머피

엘렌페이지를 뒤적거리다,
출연한 영화에 '공작'이 있길래 살펴봤는데
오옷, 엘렌페이지와 킬리언머피가 같이 주연이네!!


흐흐흐흐
오늘 중으로 볼까?

관심갖던 배우와 감독들이 서로 겹치고 얽히는 걸 찾아내면서 신기해하고 있다.
그동안 대니 보일, 이완 맥그리거 사이의 관계만 보고 있었고, 앨렌 페이지는 따로 관심 갖고 있었다.

며칠 전 킬리언 머피가 대니 보일과 28일후에서 만나고, 켄 로치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만난 걸 알게 됐다.

며칠 전부터 열심히 훑어보는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앨랜 페이지와 킬리언 머피가 만나는 곳을  찾았다.(인셉션에도 같이 나오드마)

왠지 설레는 예감. 앞으로 더 겹치지 않을까.

좋아하는 감독, 배우들이 만나는 걸 보면, 저들에게 공통점이 있고 그 공통점을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닌지 싶다.

 

 

 

 

아메리칸크라임에서 앨렌페이지는 좀 짱이었음.

2010/08/03 15:38 2010/08/03 15:38

보는거28주후

이런. 다 보고 나서, 영화 정보 찾아보니, 이거 대니보일 감독이 만든 거 아냐. -_-

 

28일후만 대니보일이구나.

트레인스포팅을 공감하며 인상깊게 봤고,

28일후에 묘사된 인간 사회의 단면들이 섬찟하도록 예리해서,

대니보일 감독이 만든 영화를 다, 보려고 했었다.

28주후가 28일후 속편이라길래 같은 감독일 줄 알고 봐야겠다 맘 먹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영화 처음부터, 전개가 작위적이고, 화려한 볼거리들 속에서 그저 공포만을 생산하려 들어, 28일후와는 분위기가 완전 달라져있다. 영화가 전작에 못 미칠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시선이 퇴화할 수 있나 싶어서,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는데, ,,,,, 감독이 다른 사람이었구나.

흠. 확실히 비슷한 스토리를 가지고 연출한 영화라고 해서 급이 같은 건 아니네..

대니보일 감독은 28개월후를 촬영한다는 것 같기도?

28일후나 다시 봐야할까봐.

2010/06/16 10:48 2010/06/16 10:48

보는거...ing

OST가 좋아서, 봐야겠다고 맘먹었던 영화.

으음, 조금 보다 보니, 이거 울리는 영화겠구나, 이런 거 싫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눈을 못떼고, 다보고 말았다. 영화 속 상황은 생각만해도 괴롭워지고, 자꾸 부모님이 떠올라서, 더 슬퍼진다. 그동안 계속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대로, 관계에 대해 생각해왔었는데, 그건 사고 속에 있을 뿐이고, 지지리 궁상인게 현실의 관계일 뿐이니, 몇 달 전부턴, 연애도 심드렁, 관계를 잘 만들어나갈 자신도 없고, 그렇게 절실한 마음이 생기긴 할까, 있었다고 생각했던 건 조작이나 환상은 아니었을까, 뭐, 이러고 있다. 평생, 절대적인, 이런 것들은 영화에서처럼, 비일상적인 상황에서야 가능하다. 그걸 바라는 건, 지금-여기가 아니라 오히려 저편을 꿈꾸며 사는 것, 그러니 지금-여기에 충실하려면 비글비글 구질구질 대는 삶을 직시해야하지 않을까. 내가 잘 못하는 일이라, 찝찝하네. 호흡을 길게.

 

이승열 목소리 좋아! 방준석 음악 좋아!

이승열보다 방준석이 더 좋아 ㅠ

방준석이 작업한 OST, 더 들어봐야지.

2010/06/14 00:02 2010/06/14 00:02

보는거패왕별희

영화 자체에 몰입은 잘 안되네..(헌데, 내가 몰입하며 본 영화는 뭐가 있었나?) 문화는, 예술은 무엇일까? 요즘 책을 읽으며 나름 정리하는 건, 상대주의에 빠지는 건 모든 의미를 부정하고 해체의 효과를 남겨 바람직하진 않다는 것, 그렇다고 절대적 가치를 미리 상정해 놓는 것은 목적론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 시대를 넘어서려는, 그리하여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기울기/경향/등등의 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않을까. 더 넓은 시대를 가로지르려는, 그리하여 부력을 밀치고 가장 깊숙이 내려앉으려는 그런 시도말이다.

아무튼, 영화안에서 경극은 결코 시대와 외떨어질 수 없고, 배우들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시대에 부합한다. 살아남는 사람은 계속 살아남는다는 한숨이 무섭게 원대인도 죽었고, 자신을 팔거나 옆사람을 팔아야 살아남는다. 역사의 길이에 비해, 하다못해 삶의 길이에 비해서도 너무 짧은 흥망이 애처롭기도 하다. 살아남기 위해 그저 살았다고 하면, 더 초라해지는데. 그 속에서 이어져 온 것은 무엇일까.

주인공들 사이 관계는 잘 모르겠다. 애정일까, 집착일까. 안쓰런 건 쥬산.

문화혁명을 다뤘대서 봤는데, 그래, 아마도 그런 시기였겠지. 어떻게 살았어야할지 답이 서질 않는다. 지역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게 떠오른다.

2010/06/09 00:13 2010/06/09 00:13

보는거델리카트슨 사람들 Delicatessen (1991)

소개해주신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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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와 같은 감독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영화는 물론,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도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가 아닐까 싶어졌다.

 

고기가 없어, 사람을 잡아 먹는 동네.

푸줏간 주인은 사람의 고기를 팔아 곡식과 교환하고, 창고에는 곡식이 그득하게 쌓여있다.

푸줏간 주인의 실수로 다리 한쪽을 잃어도, 그 불평의 화살은 이방인에게로 향한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는 걸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지로 내보낸다. 서로 독립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필요할 땐 합심해 희생자를 만든다.  델리카트슨 한편에는 매번 죽기 위해 노력하지만 죽지 못하는 부르주아 여성이 있고, 집세를 내지 못해 죽을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난한 할머니가 있다.

그리고 이런 지상세계의 사람들과 싸우는 지하세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곡식이 부족할지언정, 사람 고기를 먹지 않는다.

영화는 집 바깥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설사 보일 때에도 음습하고, 비바람이 몰아친다. 집 내부는 당연히 어둡고, 또 장면의 한 축은 지하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

 

지상을 자본주의, 지하를 현실사회주의 세계로 바꿨을 때 비유는 정확하게 겹쳐진다. 지하세계 사람들이 곡식만으로 살듯, 지상세계도 충분히 삶을 영위할 조건이 만들어져 있지만, 고기를 섭취하기 위해 희생자를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곡식에는 화폐라는 은유가 겹쳐져 있다.) 이런 세상은, 왼쪽 수도꼭지를 틀면 오른쪽에서 물이 나오는, 뭔가 비틀어진 곳임에 틀림없다. 영화 안에서 푸줏간 주인을 격침시키는 것은, 지하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광대 뤼종과 푸줏간 주인의 딸 쥴리다. 이 둘의 '사랑'이 델리카트슨을 물로 깨끗이 쓸어내버린다. 푸줏간 주인이 죽고난 뒤, 첼로와 톱을 켜는 장면에서 하늘이 맑아져 있다. 지상/지하의 음습함과는 다른 세상이다. 뤼종과 쥴리는 지하세계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감독이 지하세계의 음습함에 동의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 같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개구리와 달팽이를 키워 자생하는 사람은 공동체운동이 유비된다. 물이 쏟아지는 순간, 개구리를 방생하며 밝은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푸줏간 주인을 쓰러트린 건, 뤼종/쥴리가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뤼종/쥴리는 실상 변변한 힘 한 번 쓰지 못했었고, 푸줏간 주인은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맞아 죽게 된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 고정자본을 소비하는 기술진보를 가속할 수록 최종적 파국에 가까워지는 자본주의.

 

군데군데, 기발한 상상력이 엿보이는 장치들, 멋지다. 저런 상상력, 닮고 싶어.

2010/06/06 11:45 2010/06/06 11:45

보는거밀리언 달러 호텔

몇 번을 보려 시도하다, 다 못보고 그만뒀던 영화.

마음 먹고 끝까지 봤다.

 

이럴 수가.

감독이,

감독이,

빔 벤더스..

베를린 천사의 시...

....... 으음... 으음....

 

 

 

네, 아니오, 모르겠다고만 할 순 없어.

이유가 있을거야.

.... 기다려줄테니.

 

사랑은 표현될 수 없는 것

마치 나무, 바다, 미스테리와 같이

우리의 눈 같이

성자 안의 죄인 같이

그림 속의 빛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안식이었을 콘크리트를 바깥에서 부터 쪼기 시작했다.

 

마음은 숲속의 잠자는 공주

거부할 수 없는 키스를 원한다.

눈은 뜨고 있지만

마음은 잠들어 있다.

모든 마음이 꿈꾸는 곳으로 가야 한다.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TV보다 이게 훨씬, 훨씬, 훨씬 좋아. 내 생애 최고의 순간보다도.

너도 이렇게 나랑 있는 게 좋았으면 좋겠어.

 

삶은 완벽한 최상의 것임을

멋진 일과 아름다움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그런 것은 살아있을 땐 깨달을 수 없다. 

 

 

엘로이즈와 탐의 몸짓은 언제나 긴장해있고 과장된다.

아무런 보호막 없이, 발가벗겨져 있기 때문으로 느껴졌다.

상처를 막아줄 껍데기 하나 없어, 되려 상처입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

서로가 껍데기가 되어줄 수 있을까? 세상은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걸까?

탐은 엘로이즈를 만나고서, 자아가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벌어진 모든 일들을 기억하지만, 되새기진 않는다.

-I don't care. -I care.

넌 소중하니까.

죽음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걸, 소중하다는 걸 보여준다.

엘로이즈에게 닿길 원했고, 그렇게 세상을 뒤집으로 닿았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게 진실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제3의 팔이 자라난 건, 단지 환상이었을까?

진실을 아닌 걸 믿고 있는 것일까? 환상으로 보이는 게 오히려 진실인걸까?

자아 때문에 진실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사랑 때문에 자아를 알게 됐다고.

역설적으로, 영화에서 자아를 가진 사람은 탐, 엘로이즈, 스키너 밖에 없던걸까?

 

OST는 참 좋다.

이 감독, 음, 뭐라 말 꺼내기 참 어렵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도 봐야겠다.

 

 

2010/06/05 14:12 2010/06/05 14:12

보는거

스포일러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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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는 게, 살아간다는 게 참 무거웠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데 그 무거움 때문에 쉽사리 일어서지지 않았다. 잦아드는 화면이 그 아이와 주인공, 혹은 우리 모두가 눈앞에 둔 검은 물결 같았다.

 

-시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 누구나 시를 마음에 담고 있댔다. 시를 쓴다는 것은 본다는 것. 그 대상을 샅샅이 느끼는 것. 새들이 무엇을 노래하는 지 궁금해 하는 그녀에게 삶은 어쨋든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시를 노래하는 입으로 음담패설을 뱉는 사람도 있고, 그녀의 삶도 평온하지는 않다. 시는, 삶은 그렇게 아름다움 보다 구질구질함이 더 눈에 띄는 곳이다.

-시를 쓰기 위해 대상을 본다는 것은, 내가 그 대상이 되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죽은 이의 삶을 반추하며 그 이의 마음을 짚어보는 것.

-왜 그랬냐며 손자를 뒤흔들지만 손자를 둘러싼 이불은 벗겨지지 않는다. 죄의식이 본성이라면, 본성에는 외투가 둘러쳐져 있어 그것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 껍질을 벗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진절미를 내며 음악이 흘러나오는 컴퓨터의 전원을 내려버린다. 요란한 껍데기들에 대한 혐오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껍데기 내면에 순수가 있으리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녀가 요구하는 속죄는 단호하고 가혹하다. 식탁위에 죽은 학생의 사진을 올려놓기까지 하지만 손자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텔레비젼을 보고, 밥을 먹고, 오락을 하고.. 마음에 흠집 하나 나지 않았을 것 같은 그 태연함이 위태롭다.

-살구는 땅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다음 생을 위해. 추락은, 그렇다. 추락은 이 생이 아닌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노인의 성욕을 풀어주며, 뜸벅해지는 자신의 기억력을 보며, 삶의 구질구질함을 체화해가며, 그녀는 점점 시에 가까워진다.

-아름다움을 찾아 시를 쓰려는 행위는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아름답지 못한 일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깨닫고,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종이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형체없는 얼룩을 남긴다. 위자료를 건네는 건 속죄일 수 없다. 그녀는 손자를 경찰에 넘기며 배드민턴을 친다.

-그리고 그녀는 종국엔 자신이 그 아이가 되며, 시를 완성한다. 나를 뒤쫓던 것 모두를 사랑했지만, 검은물결 앞에 서게 된 그 아이. 아름답지 못한 삶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체화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박하사탕과는 달라진 것 같다.(밀양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들 말이 밀양과도 달라졌단다.) 그 땐 개인이 치르기엔 가혹한 죄값이라는 얘기를 던졌지만, 이번엔 오히려 치뤄지지 않는 죄값에 대해 얘기 던진다. 노무현의 죽음이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나, 대상을 바꾸면 용산, 쌍용자동차, 삼성반도체, 곳곳에 만연한 죽음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겠다.  전쟁지역에서 아이를 잃은 고통을 호소하는 부모의 영상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그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일 수 있지만, 그 고통을 내것으로 삼지는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을 깊숙이 보는 것이고, 대상 내면의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고통들에 내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시스템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건, 속죄하며 괴로워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외려 너무 떳떳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죄의식 없는 그들을 대신해 내가 죽을 수 있어야지 않느냐고 질문 던지는 것 같다. 그 속죄를 우리는 종교적으로는 익숙하게 알고있다.-Jesus

그리고 시를 쓴다는 건, 그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단지 그 대상을 관찰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겪은 고통을 혹은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이건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 어쨋든 타인의 시선인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속죄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의 삶을 체득해야 한다. 그 사람의 고통을 모르는데, 나의 잣대로 재는 것은 대상화시키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말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아름답다는 건 삶의 풍진을 겪는 와중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울 순간은 삶의 길이와 상관없이, 어느 때도 될 수 있다. 심지어 삶의 첫번째 기억일수도 있다. 그러고보면 아름답다는 것은 순간의 찬란함은 아니지 않을까? 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까?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도래하지 않은 찬란한 기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끝을 한정짓지 않고 지속되는 삶의 과정에 쌓여온 기억들을 다복다복 쓰다듬어 주는 속에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건 구질구질한 내 삶을 외면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고 따뜻하게 되새김질 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겠다 싶기도 한데, 아무튼, 나이 든 여성의 몸이 그렇게 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정확히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걸까.. 나이든 여성을 중성적인 존재로 생각하는것? 그래서 뒤집어 여성 일반을 성적인 대상으로 전제하는 것?)

 

시 다른 리뷰

http://blog.naver.com/melt21?Redirect=Log&logNo=140106947176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394.html

2010/06/03 11:04 2010/06/03 11:04

보는거베를린 천사의 시

뭔가, 잔뜩 담긴 영화. 몇 번은 다시 봐야할 것 같은 여운이 남는다. 하지만, 보통 난 한 번 영화를 다시 보질 않으니..;

 

천사의 세상에는 색이 없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色이라는 건, 단지 color가 아니라 감각과 오욕칠정과 업을 의미한다. 色에 대한 인식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공유되는 게 신기했다. 우리는 色의 세계에 살고 있고, 그래서 많은 것을 욕망하고 소유하고 끄달리며 살아간다. 그 色이 기억을 만들고 삶을 구성한다.

 

인간이 된 천사는 맨처음 色을 묻고, 배운다. 감각의 세상은 천사 세계의 숭고함은 없을지 몰라도, 시원한 걸 만질 수 있고, 담배와 커피를 함께 할 수 있고 굵은 선과 가는 선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손을 비비면 따뜻해지는 좋은 일들이 가득 찬 곳이다. 色의 세계에 있지 않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천사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죽어가는 누군가를 도울수도, 누군가의 죽음을 말릴 수도 없다.

 

닭털로 만든 날개를 달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 그녀는 언제나 혼자라고 느낀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그는 타인일 뿐. 특히나 베를린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더더욱. 사랑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 앞에서 천사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날개를 버리고 인간이 된 천사는 커피를 맛보고, 담배를 태우고, 음악을 들으며 느끼고, 그 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만난다. 숭고함은 더이상 천상의 세계에 있지 않다.  서로가 완전히 합일되는 순간, 그들은 더이상 타인이 아니게 된다. 새로운 조상이 되어, 그곳으로부터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된다. 애초에 타인인 존재인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건 가슴벅찬 일이다. 사랑은 그런 기적같은 일이다. 그 둘의 결단은 둘 사이를 초월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건이다. 우주가 새로 만들어지는. 너를 만나기 위해 만년을 기다렸다는, 엘하자드의 대사처럼.

 

'전후' 독일이 배경이다. 독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영화를 봤더니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많았다. 포츠담 광장에 대한 장면이랄지, 곳곳에 무너진 건물이라든지, 등등. 그리고 영화를 지루하게 느낀 건 나만이 아닌 듯 하다. 영화를 돌려가며 다시 보니 처음 볼 때 이해되지 않았던 장면들이 이해되기도 한다. 다른 걸 떠나서 色이란 건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어인 것 같다. 이 영화 후속작품(in weiter ferne, so nah)이 있다는데, 한글 자막이 있으려나?

또 떠오르는 건, 그래도 삶은 구질구질하다는 거 -_-;

2010/05/22 14:08 2010/05/22 1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