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20100519


저 달이 차기 전에

공장안에서 일어난 일들이 세세히 담겨있다. 전반적으로 담담하게 봤다. 난 그 구체적 개인에게 공감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영상을 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신과 나의 전쟁'은 그 개인들이 역사속에서 보편적으로 겪는 아픔에 공감하는게 만든다는 점이 다른 부분인 것 같다. 이 영상에는 그런 부분이 비어있다. 쌍용자동차에서 일어난 일이 이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특수한 상황이라고 말해도, 영상만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그 일이 얼마나 오랜 역사 동안, 그리고 공시적으로 반복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할텐데, 영상은 그렇지 않았다. 같이 영상을 보러간  한 친구도, 그 차이를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는 것 같다. 작아보이지만, 매우 큰 차이. 결국,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케찹을 너무 갈궜나 싶기도 한데, 자기도 힘들다고 칭얼칭얼. 음, 누구나 어느만큼의 아픔을 갖고 살아갈 터인데, 저 혼자 아프다고 칭얼대는 사람까지 잡아줄 여력이 없다. 니 잡을 시간 있음 나 먼저 잡아야겠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읽기 시작했는데, 죽죽 선을 가르고 계보를 만드는 걸 지켜보는 게 재밌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방식인데, 여러번 데이고서는 경계하는 중이다. 윤소영의 선긋기도 현실과 괴리된 부분이 군데군데 있다고.(단편적으로 밖에 알기 힘들지만, 국내 상황은 직접 사람을 통해 이야기 들을 기회가 있다 쳐도, 해외 정파들을 갈라놓은 건 감히 검증해볼 엄두도 못내겠으니, 걔 중에 이론에 끼워맞춰진 내용들이 더러 있지 않을까 싶다.)

 

무료라는 심리검사 하나 해봤는데, 결과치가 대체로 나를 그대로 보여준다. 상당히 정교하네. 현재 스트레스가 매우 높은 상황이라는 것 까지. 건강염려증도 심하다고 - 문항에서는 이거에 관련된 걸 못본 거 같은데, 어떻게 나온거지?

2010/05/19 21:00 2010/05/19 21:00

보는거당신과 나의 전쟁

학교에서 상영회를 했고,

예상한대로 우리끼리 봤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격해진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었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강탈할 권한을 갖는 다는 게,

여전히 생경스럽다.

 

계속 마음에 맺혀있던 게 있다.

영상을 보면서, 더 뚜렷해졌다.

난 그곳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싸움만 좇아 다녔다. 그래서 협상이 타결된 날, 쉬어버렸었다. 며칠이 지나고서, 그날 경찰서 앞에라도 갔었어야 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번번이, 사람을 시선에서 놓치곤 한다. 용산에서도, 그 전에도, 그 전에도, 죽.

내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그 전쟁터는 내 감정을 배설하는 곳이 아닌데, 공을 쌓기 위한 곳이 아닌데.

끊임없이 경계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또 언제나 부끄러운 반성만 뒤따른다.

 

 

 

 

/

내 속병의 원인 하나를 알았다!

요즘 설사가 좀 멎고 살만했었는데

영상을 보다 감정이 격해지니

얼마 안 있어, 바로 증상이 도지기 시작했다.

용산에, 평택에.. 한여름의 반절을 그곳에서 보낸 뒤 시작된 속병은

그러했었나보다.

감정을 쉽게 터트리지 말고 다스려야 할텐데

나이가 들수록 절제가 쉽지 않다.

특히 분노보다는 슬픔을 참아내지 못하고

자주, 격하게 토해낸다.

건강한 토로는 아닌 것 같아 걱정이다.

내 감정을 다루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2010/04/29 23:27 2010/04/29 23:27

보는거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시놉시스를 안보고 영화를 봤는데, 꽤 난감했다.

다 보고 나서 시놉시스를 읽으니, 대략의 줄거리만 이해가 됐다.

 

아이들의 꿈을 뺏는 사람이 있고,

아이들의 노동을 뺏는 사람이 있고,

아이들은 이래저래 빼앗기는 건가..;

도저히 전체 내용을 파악 못하겠다..

외눈박이들은 아이들을 납치하러 다니고,

납치해온 아이들과 눈을 바꾸고.....

그리고 몸은 어려도, 생각은 어리지 않은 아이들..

비에뜨에게 렛미인의 이엘리가 겹쳐졌다.

 

뭔가 많은 상상력이 담겨 있다.

고동이 껍질을 벗고, 나팔을 불고

기린이 구름을 따 먹고

음음.

전체적인 분위기는 칙칙한데, 발랄한 상상력이 여기저기 스며있다.

 

인상에 가장 많이 남은 건 미에뜨 역을 맡은 judith vittet.

1984년 생이라니, 저 영화 찍을 때면 11살? 놀라워라...

후속작이 없네..

파리8대학 영화과에 진학했다고도 하고

경제학으로 바깔로레아를 통과했다고도 하고..

바갈로레아 ES를 통과한 뒤, 파리8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고 한다.

 

여기저기 재밌는 장면들이 많았지만, 내 나쁜 기억력으로, 얼마동안이나 기억하려나...

2010/04/24 23:46 2010/04/24 23:46

보는거경계도시2

길게 썼는데 두번이나 날아갔다.

더 쓸 의욕이 안생긴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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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두율씨는 한국사회에 무엇을 바란걸까?

비전향 장기수가 30년 감옥에 갇혀 있는 사회에서 비전향 경계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한걸까? 바꾸겠다고 생각한걸까?

 

- 송두율씨를 이용하려던 사람들은 무엇을 바란걸까?

애초 어떤 판단을 했던 걸까? 그 판단이 어떻게 변한걸까? 그 판단들을 송두율씨와 공유했을까?

 

- 개인의 실존적 비극에서 운동이 연유한다. 송두율씨는 자신의 행동이 실존적 요구에서 비롯한 것임을 헤아려 달라고 항변하는 것 같다. 그를 이용하려던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배신감을 느낀다. 그런데 나도 송두율씨를 헤아릴 수 없는게, 그는 한국사회에 대해 알고 있었고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지식인이다.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부딪히는 이들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할 수 없다. 그가 쥐고 있고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옳고/그름을 아는 게 운동은 아니다. 그 입장이 어떤 효과를 남기는지 보는거지.

 

- 대법원의 판결이 한국사회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송두율씨 주변 사람들은 여론을 읽고, 여론을 바꾸기 위해 궁리한다. 법원의 판결까지 통틀어, 조선일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운동과 조선일보는 같은 편에 있다.(BG철학을 공유한다.) 화면을 가득 메운 진보/보수 프레임이 답답했다. 그들은 서로 적인가? 공생관계이지 않은가? 송두율씨 주변으로 조선일보, 한나라당 치들이 달려들었고, 역시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민족주의 세력들이 모이는 건 당연하다. 그 운동이 자신의 적과 닮는 것도 당연하다. 잘 모르겠지만, 이데올로기에서의 계급투쟁은 그런 식으로 벌여내서는 안될 것 같다. 동떨어져 보이지만 스티브 제이 굴드의 작업처럼 목적론적인 진화론과 싸우는 게 훨씬 더 계급적이지 않은가?

2010/04/06 01:15 2010/04/06 01:15

보는거작은연못

결론을 알고 있는 평화로움이 숨막혔다.

영화는 설명이 적고 불친절하다. 위기감은 뜸을 들이지 않고,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역사를 화면에 담는 데에는 어떤 게 필요할까?

어떻게 담아야 잘 담은 걸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 떠올라 격해졌다.

 

 

근데,

왜 연못에 고래가 뛰노는걸까?

2010/04/01 00:20 2010/04/01 00:20

지나간다이랜드총선후보전술 & 이중의적

http://www.vop.co.kr/A00000201323.html

 

 

한통계약직 투쟁을 담은 '이중의 적'을 봤다.

참, 뿌리깊다.

모든 투쟁에 걸쳐있다.

노동자를 배신하는 노동자들을 관료주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현장파는 배신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는 배신하지 않을까?

 

 

/

총학생회 일이 하나 기억난다.

통학버스 계약 문제로 학교와 학생과 통학버스 노동조합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같이 학내 비정규직 조직을 선거 목표 중 하나로 걸었던 사람들이 너무 쉽게, 통학버스 지입 노동자들의 고용조건을 불안정화 시키는데 합의하려 했었다. 비용절감을 통해 학생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이유로.

 

현실은 쉽게 착간된다. 누구의 시선도 올곧지 않다.

2010/03/26 08:39 2010/03/26 08:39

보는거파주

포스터에서 풍기는 느낌이 좋아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다 보고 나니 조금은 밍숭거리기도 하고.. 하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다.

 

여러 글 들에서 미리 보아 이미 알고 있던 대사, 처음엔 멋져보여 시작했고... 자꾸 해야할 게 생긴다는..

누구는 강박에 빠진 좌파의 자화상이라고 얘기하지만, 강박없이 자유로운 삶이란 애초에 존재할까? 무슨 이상을 대는 것 보다 차라리 솔직하지 않을까. - 정말, 자꾸 해야할 게 생기는 걸.

 

영상을 보는 내내 두근거렸다.

둘은 서로 도망가고 있던걸까.

 

중식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 할 때, 다른 누구를 다치게 했고, 그 죄책감 부채감을 이고 살아간다.

결혼은 욕망을 부정하려는 도피처였을까. 하지만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다는)욕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또 누구를 다치게 했다. 그 사람은 그것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지지 않아도 될 부채일까? 그래서 그것은 골방에 갇혀 세상의 정의를 고민하는 활동가들의 폐쇄적인 자의식일까? 되려 보지 않으려고 눈감아버린 인과의 끈을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감독은 어느 쪽의 말을 하고 싶었던걸까.

 

은모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가? 그 의도는 명확하지만 언제나 꺼풀은 씌여있다. 자신이 그 의도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을 분명히 의식했을 때는, 오히려 도망치는 걸 선택한다. 둘 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지만, 어느 쪽도 그것을 그대로 내보이지 못한다. 감독은 그것을 인정하고 내보이는 것 또한 해피엔딩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고 영화 첫머리에서 잘라말한다.

 

개인의 욕망을 삭제하고 이상을 박제화 시킨 운동(유령들의 운동..)에 상대적으로, 욕망을 긍정하라는 류의 담론이 유행한다. 감독은 둘 사이에서 답을 고르는 것 같지는 않다. 인과의 끈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꼬여있는 실타래 속에서 개개인의 노력은 무력한가? 노력하면 만날 수 있는걸까. 애초 만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모든 걸, 자신이 떠안는 중식은 가엾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안타깝다. 그가 노력한 만큼, 그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그만큼 받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모두에게 솔직하면, 세상이 좀 나아질지 모른다고 생각하곤 한다.

결코 감당할 수 없을 일이 있을까.. 서로 기대면 어느 것이든 조금은 수월치 않을까..

 

2010/03/15 03:35 2010/03/15 03:35

굿바이 솔로 & 호모에로스

며칠전 완전 의욕상실 상태로 뻗어서, TV에 지나가는 드라마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재밌네? 드라마 제목도 모르고 배우 이름도 몰라서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배우 한명과 온갖 조합을 다해 검색했더니 굿바이 솔로였다. 단막극 정도로 생각했더니, 16화나 되네..

어쨋든, 다 보았고, 재밌었다.

 

영숙: 사랑할땐 왜 그렇게 빈말들을 잘 하는지,

          순진한 애도 사기꾼처럼 말을 번지르르르.

수희: 적어도 그 순간엔 진실 아닌가?

영숙: 그럼 지금 이 순간 니가 내 전부고,

          지금 이 순간 너만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미치게 사랑한다고 해야지,

          왜 건방지게 영원히를 앞에 붙여들.

 

이런 대사들 참 좋다. ㅋ

 

내가 한 번쯤 내뱉었던 말들, 가졌던 마음들이 화면에 흐른다. 드라마 인물이야 당연히 현실이 아니겠지만, 그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판타지스럽지 않다. 곳곳에 내 모습이 투영된다. 대부분의 다른 드라마 속 사랑이야기들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 감정이 아예 동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건 공감이 아니라, 과잉된 감정들에 취하는 것일 뿐이다.

보기에 아름답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야기들은, 되려 뱃속을 허기지게 만들고, 모든 인간을 외롭게 만들 뿐인데, 이 드라마는 그렇지 않았다. 노희경 작가와 박경리씨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 너무 뜬금없나.(생각해보니, 다른 작가와 겹치는 부분이 더 많을 것 같다. 요즘 박경리씨 생각을 많이 해서 그렇게 느끼나 보다.. ㅎㅎ) 누구나 아픔 하나씩은 갖고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누구도 비범하지 않다는 것.

 

지금까지 내 연애는 수희나 건달 사이의 어디쯤이었을 것 같다. 민호, 미리와는 좀 다른 것 같아. 때론 모든 것 다 걸지만, 싫은 거 좋다고 하지는 못한다. 드라마를 보다 보니 며칠전에 서점에 서서 대충 훑었던 고미숙씨의 '호모에로스'가 떠올랐다. 영원이란 말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기- 이런 책 내용은 나도, 항상 고민하는 주제이고, 그 말처럼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의 지향이다. 

 

누구를 만나든, 그 만남은 유일한 것이고, 특별한 것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것은 함께 삶을 나누는 동안 만큼이라는 걸 안다. 그 만남의 길이를 연장하기 위해, 결혼을 택하고, 거기에 '운명'이란 수사를 붙이기도 하나본데, 난 그렇게 서로의 삶을 얽어 관계를 유지해야할만큼, 마음이 절실하지 않다. 누군들 절실할까? 그것도 결국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판타지가 소환한 허깨비. 그 순간순간이 운명일뿐, 난 당장 10년 뒤 내 모습을 기약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삶 전체를 기약하나. 혹여 서로의 삶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그저 '너만 있으면 돼'는 우습다. 내 삶의 방향이 세워지고, 너의 삶의 방향이 비슷한 즈음이면, 연인이자 동지의 관계로 살아가겠지-그래도, 또 누군가에게 찌릿해지는 걸 피할 수 있을까? 많은 예술가, 혁명가들의 연애가 그러했듯.

날내나는 내가 이렇게 주절거린 것들을 체화하는데 까지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처음 연애를 할 때에도,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이 변하는 걸 직접 겪어보니,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는 것과 체화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아득하다.

 

'호모에로스'의 글들은 드라마 속 영숙에게 입혀져있다. 대사처럼의 연애라면 참 편할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 속 대사처럼,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 순간에는 영원하길 바라며 사는 건 건전하다. 삶은 언제나 미끄러진다.

'호모에로스'의 글쓴이가 말하는연애도 애초 불가능한 형태에 불과할지 모르는데, 혹은 여러 다양한 관계중 하나일지 모르는데, 좋은 연애/나쁜 연애를 가르는 것 같아 책을 읽으며 좀 불편했다. 드라마에서는 현실의 연애를 보여주지만, 책은 어떤 것이 좋은 연애라고 가르친다. 안타까움 보다는 깔봄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드라마 영숙이 내 동경이지만, 어쨋든 영숙도 판타지에 불과할지도.

(건달은 극중에서 끊임없이 주전부리를 하고 있다. 민호도 외로워졌을 때 주전부리를 한다. '호모에로스'에 외로우면 야식이나 야동에 빠진다는 내용이 있는게 떠오른다. 마치 노희경 작가가 그 책 읽고 대본 썼을 것 같단 느낌이 들정도로 책에 있는 내용이 드라마에 보인다. 그런데 드라마가 책보다 2년은 빠르다.; 비슷하게 경험하고 살았나?)

 

 

 

그리고 드라마가 좋았던 건, 누군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줘서다. '사랑'을 남녀간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만 그리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함께 보여주는 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이다. 끊임없이 상처받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상처를 서로 내보이며 치유하고 치유받는다. 특히 그 역할을 도맡는 게 영미할머니인데, 눈이 촉촉하지 않은 장면이 별로 없다.ㅋ 평생 그런 장면을 몇번이나 겪을까마는, 그 순간의 감정들이 생생해져 가슴이 따뜻했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 참 싫어하는데, 드라마 속 그 인물은 미워지지 않았다. 이해해달라고 칭얼거리는 통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것도 아프겠구나 싶었다. 미워지지 않게 인물을 만들어 놓은 것도 놀라워. 하지만, 할 말은 정확히 한다.

 

왜 세상 사람 모두가 널 이해해야 되는데? 세상 너만 힘든거 아냐.
너는 왜 언제나 너만 아퍼, 혼자 외로운 척하지마.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보듬어 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조금씩 알아간다. 그렇다고 아직은, 내가 잘 안아주는 것도, 다른 이에게 보듬어 달라고 열어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력하고 있다. 동정받는 게 두렵고, 또 나의 위로는 동정이 될까봐 망설인다. 그 두려움에, 나를 내보이지 못하면, 나 또한 다른 누군가를 보듬을 수 없다. 진심을 다해 말하면, 위로가 위로로 전달된다. 하지만, 진심을 다하기 위해 때론 죽을 힘을 다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다.(위로가 이럴진대, 사과는 어떠한가.)

 

나, 매일매일 기도해,

이 세상 모든 상처받고 힘든 사람들에게,
등 뒤에서 안아줄 사람, 단 한사람이라도 있기를

 

그 단 한사람을 만나는 게 참 어렵다. ㅎㅎ, 단 한사람이라도 있기를. 내가 누군가에게 그 한사람이 될 수 있기를.

 

대사 옮겨 적고 보니, 극 초반부와 마지막회 밖에 없네. 가운데에도 주옥같은 말들이 많았는데, 어떤 내용이이었는지도 잘 생각이 안난다. 옮겨온 대사도 어떤 내용이었는지만 간신히 기억했뒀다, 게시판을 뒤져 찾아 옮겨온 것. 이런 것들을 정확한 문장으로 기억해내는 사람들 참 부럽고 신기하다. ㅠ

 

그런데 이 드라마도 초반, 중반 까지 참 맘에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가니 내용이 좀 억지스러워진다. 뭐 그래도 좋았다.

 

 

 

 

노희경 작가의 아래 글을 읽은 적 있는데, 이 드라마에 그대로 녹여놓은 것 같다.

 

내 순정에 다쳤을 첫사랑 그대에게.

 

  이제야 그대에 대한 무수한 원망을 내려놓고 비로소 참 많이 미안했었다. 참회할 용기가 난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난 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자만이 뿌리깊었나, 아니다 자기연민이 독했다. 나이가 들면서 늘어가는 건 주름만이 아니다. 살면서 홍역처럼 반드시 거쳐야 할 경험과 남과 별다르지 않게 감당했어야 할 상처들이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대와 주고받았던 모든 것들이 마냥 별스러워 엄살인 줄도 모르고 악을 쓰듯 독하게 킁킁거렸다. 그때 그대는 참으로 냉정했었다. 원망스러웠던 그 순간이 이제야 맞춤맞은 순리였음을 알겠다.

 

  나를 버려주어 고맙다, 그대.

 

  순간 이 글을 쓰면서 겁이 난다. 나만큼 설레지 않고 나만큼 애타하지 않고 나만큼 절절하지 않은 그대에게 나는 늘 이런식으로 상처를 주었다. 잘났나봐, 무시하나봐, 그런 직설을 내려놓고, '고맙네, 정말' 웃으며 칼 주는. 꼬여진 실타래처럼 정말 난감하게 엉켜서 그대를 몰아붙였던 한때를 그대여 지금은 떠올리지 마라. 그리하여 이 글을 읽지 않고 서둘러 덮지 마라. 세월이 변하듯 사람도 변했다. 그대, 이제 엉킬 기운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들어라, 고맙다, 정말 버려주어.

 

  그대와 헤어져 20년이 흘렀다.

 

  그 20년의 세월 안에서 나는 정말 뚜렷이 알아차린 것이 있다. 진실이나 사실이란 말은 함부로 써선 안 된다는 것, 모든 기억은 내 편의대로 조작될 수 있다는 것. 하여, 이제 내가 말하려는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는 어쩌면 또다시 나만의 기억일 뿐 그대와는 무관한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혹여 내 서술이 그대의 마음과 아랑곳없더라도 웃으며 봐달라. 이 사람은 이리 생각했었구나 하고.

 

  그대가 나를 일방적으로 버린 스무 살 겨울,

  나는 그대를 배신자로 낙인찍었었다.

 

  매일 전화하고 하루걸러 한 번씩 만나고 서로의 속살도 아닌 드러난 살이 스칠 때에도 머리끝까지 삐죽하던 그때, 그대는 돌연 모든 걸 멈추었다. 전화도 받지 않고, 편지해도 답이 없고, 만나도 확연히 시들해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내 드라마 주인공은 참으로 상대에게 용기 내어 잘도 묻는데 나는 그대에게 묻지 못했다. 내 잘못을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어리석다. 사랑한 대상을 미워할 대상으로 바꿀 오기는 있으면서.

 

  모든 겨울처럼 밤이 깊은 겨울이었다. 며칠째 몇 주째 연락이 안 되던 그대를 찾아 나섰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얇은 추리닝 바람이었다. 20년간 나는 그때의 내 행색을 다급함이라고 애절함이라고 포장했지만, 이제야 인정한다.

 

  상처주고 싶었다.

 

  니는 이렇게 너보다 순정이 있다. 그런데 너는 나를 버렸다.

그렇다면 무참히 무너져주겠다. 내 옆에 머물러 있어야 할 네가 기어이 날 그냥 스쳐만 지나가겠다고, 네가 상처준 어린 이사람을 똑똑히 기억하렴. 나는 눈 오는 그대의 집 앞에서 밤을새워 오들거렸다. 그대는 이층 창문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 커튼을 쳤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대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대학을 갔어.

  말해주고 싶었어.

  뚝.

 

  그대 목소리는 나데 대한 죄책감으로 작고 의기소침했다. 반면 내 목소리는 얼마나 당찼던가.

 

  잘됐군.

 

  웃음이 난다. 좀 더 나중까지 사랑한 게 뭐 그리 대단한 유세라고. 이후의 내 행동은 더욱 우스꽝스럽다. 그대랑 헤어지고 나는 이내 A, B를 만나놓고, 7,8년 뒤 다시 그대를 만서서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나"라고 말했던 거 같다. 그때 그대는 참으로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책했었다.

 

  왜 너는 그렇게 순정적인데,

  나는 이 모양이냐고,

  지금 사랑하는 누군가와도 나는 또 시들해진다고.

 

  나는 기뻤다.

 

  그대가 나랑 헤어져 계속 휘청대서, 그리고 내가 순정적으로 보여서, 그리고 다시 5,6년 뒤, 그대를 보았다. 그대는 여전히 휘청대고 여전히 나에게 미안해하고 여전히 또 누군가와 시들한 상태였다. 그때 나는 이제는 우린 친구야 하며 내가 그대를 극복하고 우정으로 승화시킨 단계를 서술하며 넌 왜 그렇게 살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없어 하며 훈계하고 의기양양했던 거 같은데 기억하는지. 그리고 다시 5,6년이 흘러 지금이다.

 

  미안하다, 그대여.

 

  이제야 고백건대, 나는 그대에게 바쳤던 순정을 스무 살 무렵에 이미 접었었다. 그런데 왜 말 안 했냐고? 나는 마음이 변하는 게 큰 죄라 생각했다. 그 어리석은 생각은 참으로 오래갔다. 그래서 그대를 괴롭히고 그대보다 나를 더욱 괴롭혔다. 그대와 헤어지고 누군가를 다시 만나서도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그대에게 바쳤던 순정만을 내세우며 유치한 대사를 남발했다.

 

  나에겐 네 자리가 없어

 

  젠장이다.

  그러면서 왜 그들과 여행은 가고, 설레는 눈빛을 주고받고, 짜릿하기까지 했었는지.

  그대 나는 그런 아이였다.

 

  그대여.

 

  이제 부디 나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라. 사랑에 배신은 없다. 사랑이 거래가 아닌 이상, 둘 중 한 사람이 변하면 자연 그 관계는 깨어져야 옳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게 후회로 남으면 다음 사랑에선 조금 마음을 다잡아볼 일이 있을 뿐, 죄의식은 버려라. 이미 설레지도 아리지도 않은 애인을 어찌 옆에 두겠느냐. 마흔에도 힘든 일을 비리디 비린 스무 살에, 가당치 않은 일이다. 가당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린 모두 오십보백보다. 더 사랑했다 한들 한 계절 두 계절이고, 일찍 변했다 한들 평생에 견주면 찰나일 뿐이다. 모두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다 괜찮다.

 

  이제 나는 다시 그대와 조우할 날을 기다린다. 그때는 그대와 웃으며 순정을 포장한 가혹한 내 행동들을 맘 아프게가 아닌 웃으며 나눌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만약 볼 수 없다면, 잘 살아라, 그대.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나는 행복하다.

 

( 노희경 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에서)

 

 

2010/02/14 02:16 2010/02/14 02:16

보는거8인 : 최후의 결사단

별 생각 없이, 시간 때우기 정도로 쓸만한 영화.

이왕 시간 떄우는 거면, 좀 덜불편한 영화면 좋았을 것을..

 

부자연스러운 액션장면들도 거슬렸지만,

혁명에는 영웅이 있어야하고, 혁명은 희생이 필요한 거라는 따위의 전제가 거북했다.

 

어떤 영웅을 지키는 게 혁명이 아닐진대, 영웅을 지키는 또다른 영웅들을 꾸며내며 혁명에 비장함을 입히고, 그래서 희화화 시킨다. 누구도 영화 속 이야기가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혁명은 판타지가 되었다. 판타지로 가공하더라도, 얼마든지 현실의 관계를 반영시킬 수 있다(시트콤 봐봐). 그러고보면, 배경이 현실이냐 판타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추상해 담았는지가 중요하다. 이 영화는 애초 배경도, 군상들도 판타지였고, 현실의 그 무엇도 담지 못한채, 내내 과대망상에 빠진 의미없는 말과 장면들이 떠다녔다. 뭔가, 역사는 이름만 남기고 간, 때로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이 바꿔온 것이라는 얘기를 하려했나 싶은데, 그 이름 없는 이들이 이름 있는 누군가에게 복무하는 걸로 역사를 바꿨다고 생각한거면, 참 한심하다. 이런 설정은 '영웅'에도 있고, 정확히 떠오르진 않지만, 여러 중국 영화들에 담겨있는 것 같다. 물론, 헐리우드 영화에도.

 

무엇을 위한 혁명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혁명'이라는 공수사만 셀 수 없이 반복하는 것이 짜증났다. 인민을 위한 다는 건 이명박도 할 수 있는 얘기다. 추상적인 '중국'과 '혁명' 앞에서 주인도 인력거꾼도 모두 동지가 된다. 어찌보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한나라당 심판 앞에 민주당도, 국민참여당도, 누구도 만날테니..

 

수십번 칼을 맞고도 걸어다니는 사람이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움직이는 인력거나.. 장소가 지구 어디쯤이라면, 기본적인 물리법칙 정도는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2010/02/04 01:40 2010/02/04 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