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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박선영


사람이 그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사악할 수 있을까?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들은 왜 목숨을 버려야만 했을까?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

공장에서, 공장 화장실에서 목 매달아 자살

강제추방 당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뛰어 내려 실종

쇼크사로 사망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일까?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질문들. 답은 없었다. 해결책은 없었다. 정답은 있지만 정답이 될 수 없었고, 통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한민국이다. 법이 있지만 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 통하지 않는 곳. 힘으로 우기기만 존재하는 그곳, 대한민국, 우리나라.

 


야, 나 권리 있어.

나 권리 많아.

나 권리 말할 수 있어.

알아? 개새끼들아?

그들이 가장 먼저 배운 말, 부끄러운 말, 천박한 대한민국의 얼굴, 욕. 갓난 아기들이 기역, 니은으로 한글을 알아갈 때, 그들은 개새끼, 씨발놈을 시작으로 한글을 알아갔다.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나쁜 사장님들. 사장님, 나빠요.

 


때리지 마세요. 때리지 마세요.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와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잡고 서 있던 젊은 청년은 외친다. 그들이 참혹하게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면서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제대로 말려 보지도 못한 채, 때리지 마세요 만을 외칠 뿐이다. 그들의 소리를 담아야 했기에 잡고 있던 카메라를 놓을 수 없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그 현실을 알면서도 이해하면서도 가슴이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기에 앞서 같은 사람으로서 이주노동자들의 편이 되어 방망이를 휘두르는 대한민국 전경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나쁜 전경님들. 전경님들, 나빠요.

 


이주노동자들은 불법체류자라고 타국인 이곳, 대한민국에서 탄압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본국에 돌아가서도 자기나라 욕보인 놈이라고 탄압을 받는다고 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은 어디가서든 탄압 받는 거야, 탄압 받아야해 라며 스스로를 죄인 취급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인정하면 상처를 덜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맑았던 눈망울은 어느새 죄인의 눈처럼 어두워졌다.

 


이제는 돈 많이 벌 생각 없어요. 그냥 이 세상을 바꿔야 겠다는 생각뿐.

샤만은 네팔 사람이다. 그는 40만 이주노동자들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외모로 대표가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미남이다. 나는 그가 배우를 했어도 성공했을 거라 생각해본다. 그런 그가 머리를 삭발해가며 40만 이주노동자들의 강제추방을 막기 위해 투쟁한다. 샤만이 만약 한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렇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의 나라에서 평범한 청년으로 평범하게 살았겠지. 아님 티벳 스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찾은 한국에서 운동가가 되었다. 20년 간을 평화로운 마을에서 조용히 살아왔을 그가 잘난 것 하나 없이 오만한, 번잡한 나라 한국에서 투쟁에 앞장서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동지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한국 민중가요를 우리네 젊은이들보다 더 잘 알고, 더 잘 부르게 된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그의 힘찬 목소리에서, 굳은 결의에서 슬픔이 밀려온다. 우리의 모습과 꼭 닮은 네팔인의 얼굴에서 서러움을 본다. 그들은 단지 한국말을 잘하지 못할 뿐인데,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아예 말 자체를 잘 하지 못하는 것 마냥 여긴다. 그들을 생각 없는,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 취급을 한다. 다만 억울한 그들은, 멍청하지 않은 그들은 자신들 속 안에 가득차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수많은 생각들을 추스르고 추슬러 그들이 내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말로,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것들을 언어라는 것으로 서툴게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멍청한 한국인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 오히려 멍청한 것은 그들이 아닌 우리들인 것이다.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식한 말만 내뱉는 바보들.

 


이주노동자들은 온 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몸따윈 닳아 없어져 버린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투쟁한다. 그들은 외친다. 온 몸 다해, 온 정신을 담아, 낼 수 있는 온 목소리를 다해.

그들의 목소리는 울리라는 사람들의 마음은 울리지 못하고, 애꿎은 나의 마음만 울린다.

 


나는 이주노동자와 대한민국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술래를 자처하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다. 힘들게 술래를 치고 들어왔으면 됐지 다시 술래를 피해 술래가 있던 곳을 치고 다시 선 안으로 들어와야 한단다. 그래야 게임을 끝내주겠단다. 그들이 술래가 있던 곳을 다시 치고 와야 한다면 술래 역시 또 한번의 수고를 해야하므로 술래를 치고 도망오는 것으로 끝내면 될 것을. 이겨서 남는 것도 없으면서 꼭 그래야 한다는, 이기고야 말겠다는 심보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이렇게 귀찮은 놀이이건만, 돈 벌기 위해 어렵게 온 그들, 돈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에게 자국으로 갔다가 다시 오면 받아주겠다는 고약한 심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이 얻게 되는 이득은 무엇인가. 대인구 인천공항 이용세? 항공료? 대한민국의 심보를, 심술을 이해할 수 없다. 일개 국민인 나로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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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전주곡> 발제문

<단편영화산책>

 정지원  강지혜

 

<빗방울전주곡> 발제문

 

1. 들어가기 전

 

1. 독립영화와 노동영화

한국 독립영화의 활동현황을 그룹별로 분류하면,

첫째, [노동자뉴스제작단], [푸른영상], [서울영상집단] 등의 다큐멘터리 단체들이나 노동 단체의 영상패,

둘째, 독립영화의 대다수인 단편영화를 만드는 부류.

셋째, 극영화가 아닌 실험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그룹.

넷째, 독립애니메이션 그룹.

 

이들 독립영화는 1980년대 반민주 정권과의 대립과 절대적 생존권의 위협 속에서 충무로영화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항영화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그 배경에는 서울영화집단의 서구와 남미영화를 모델로 한 민중영화, 현장에 뿌리박은 노동농민영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현장주의영화 등의 수용이 있었다.

 

빗방울 전주곡은 첫째, 둘째 모두에 해당되는 것 같다. 우선 첫째에 해당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강한 투쟁의식에 더불어 극영화의 픽션이 잘 어우러져 있다. 1980년 이후, 대체로 독립영화는 갈수록 경계가 모호해져 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 운동은 가장 투쟁의 골이 가장 깊다고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의 인권을 다룬 영화야 말로 가장 독립영화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장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2. 역사

영국의 경우, 탄광노동자들이 1984년에서 85년에 이르는 파업기간동안 영상집단을 직접 꾸려서 많은 영화와 다큐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극영화의 형식을 가진 노동영상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파업전야”가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이 아닐까 한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각종 미디어센터나 노동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영상팀을 직접 만들어 촬영을 하거나, 노동자에게 직접 미디어 교육을 실시하여 좀 더 실제적인 노동영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미에서는 1999년 시에틀 WTO 시위 모습을 담은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이 다큐는 100여명의 미디어 활동가들이 시위 기간 동안 시애틀 전역에서 시위모습을 담아온 것을 Independent Media Center에서 취합하여 한 작품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많은 미디어센터들의 활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2001년 대우노조영상집단이라던가, 노동뉴스제작단, 그리고 미디액트 등 많은 노동자단체나 독립영상단체에서 장기간동안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 활동의 결과물로는 지금도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이 직접 촬영한 <우리는 KTX 승무원입니다>과 2003년에 노뉴단에서 제작된 <이중의 적>등이 있다.

 

3. 특징

현재의 시스템이 얼마나 인간다운 삶과 충돌되는가, 그 시스템에 의해 노동자들이 어떻게 파괴당하고 있고, 이러한 파괴 과정을 어떻게 투쟁의 과정으로 전환시켜내는 가를 드러내는 노동 영화의 핵심 역할을 환기하고자” 이번 영화의 슬로건을 ‘노동영화, 자본에 경고하다’로 정했다고 전했다. 앞의 내용은 제9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 주최 측의 인터뷰 내용이다. 노동영화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그 독립의 주체는 노동자라는 명제가 확실하다.

 

영화는 목적이 뚜렷하다. [중략] 그동안 파묻어놨던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내듯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말을 꺼낸다. 이제 영화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드러난다. 감독 역시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짚는 작업은 힘겨운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노동단체에서 만들어진 영화들(뉴스클립과 다큐멘터리 포함)은 주류언론에서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건을 노동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아, 관객들, 혹은 대중에게 사건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또 다른 대안들과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 대우차노조파업의 경우도 그러하다. 주류언론에서 보도되지 않았던 과잉진압과 투쟁은 영상패가 노동자의 눈으로 담아낸 영상들로 인해 대중들에게 폭로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언론에서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KTX 여승무원 정리해고 사태 또한 여승무원들이 직접 나서서 촬영을 하고 다큐로 제작하고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과 대중들이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노동영화로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은 특수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영화 제작과정이 함축하는 현실과 작가와 관객의 긴장관계가 지닌 직관적 혹은 저널리스트적인 재현의 특수성이 지니는 위력이다.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를 나눌 때 특히 창작자의 의도도 다시금 경계의 단서를 준다. 특히 노동영화는 그 목적이 가장 뚜렷하다. 하지만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괴롭다. 빗방울 전주곡은 노동영화의 강하고 거친 면을 잠시 거슬러 조금 세련되게 포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 노동영화의 미래

최근 많은 노동자 인권단체나 미디어교육센터에서는 영상전문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노동자들에게 직접 영상교육을 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직접 자신들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언론사의 왜곡된 편파적인 시선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노동자들의 눈으로, 입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를 대중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UCC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이러한 노동영화를 파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쉽게 많은 이들에게 노동의 현장을 전할 수 있는 만큼, 제작자들은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아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빗방울전주곡’ 속으로

 

1. 극영화로써의 장점?

-극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해고 노동자의 근근이 연명하는 삶을 정면에서 보여주는 작품

-한편 정리해고 노동자나 해직통고서를 받은 노동자를 다룬 <빗방울 전주곡>(최헌규), <빵과 우유>(원신연) 등 소외된 이들을 조용히 끌어안는 사회드라마들도 눈에 띈다.

 

‘보기 드물다’, ‘사회’라는 수식어로 미뤄보아 빗방울전주곡을 단순 극영화라고 국한하기엔 무리가 있다.

 

영화는 사건으로부터 일 년 후의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당시의 충격적인 사건현장을 넘어 그 여파가 얼마나 계속 한 가족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보여준다. 여기에는 몇 가지 픽션이 첨가되어 있다. 부부의 첫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와 또한 물놀이를 가리라는 결말로 막연히 풍겨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그렇다.

 

충격적인 동영상을 보며 도대체 이런 일이 있었다니! 깜짝 놀라며 분노하게 한다. 더 나아가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그들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 혹은 가족들, 내 자신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2. 빗방울전주곡이란? (상드의 일기를 통해)

조르쥬 상드는 저서 ‘나의 생애’에 이렇게 적고 있다.

‘비가 쏟아져 마차 지붕에 넘쳤다. 너무나도 무서운 어두운 밤길을 무릅쓰고 달렸다. 우리들은 환자(쇼팽)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도착 하였을 땐 그는 정말로 생생하게 앉아 조용한 절망 속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기막힌 자작의 전주곡을 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호수 속에 빠지는 것으로 착각했다. 무겁고 얼음장 같은 물방울이 일정한 속도로 자신의 가슴 위에 떨어진다고 했다. [중략] 그의 작곡은 그의 환상 속의 음악 속에서 그의 가슴위로 떨어지는 눈물로 바뀌어진 빗방울이었던 것이다.

다시 곡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곡은 그저 무심하게 창밖의 빗방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문득 ‘아… 비가 오네’ 하는 느낌. 왼손은 빗방울을 묘사한다지만, 오른손의 멜로디는 떠오르는 상념들이다. 특별히 무겁지 않은 상념들. 가끔 가다 그 상념은 왼손의 빗방울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한 오른손의 (13초, 혹은 1분 25초 부분) 음들의 덩어리로 마무리 되고 다시 시작한다.

 

편안했던 상념이 변하기 시작한다. 1분 40초부터 3분 19초까지 똑똑거리며 계속되는 리듬과 더불어 불안과 공포의 이미지를 주었다면, 3분 19초부터는 환상 속의 공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울먹거리는 연약한 심장이 느껴진다. 감정적 에너지가 고음에서 더 밀도 있게 호소한다. 연약한 감성이 폭발할 것 같다. 작곡가는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치열하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불현듯 4분 17, 18초 부분에선 순간적으로 평온한 현실로 돌아온다. (이 모든 묘사는 필자가 연주할 때 느끼는 상태이므로, 개인적 느낌의 묘사로만 받아주시길…).’

 

배경에서 빗방울 전주곡이 흐른다. 이사의 풍경이 무심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쁜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다. 쇼윈도의 옷을 보고도 발걸음을 돌리는 모녀. 학원차를 타고 가는 아이들을 부럽게 보는 딸. 택시 노조 시위에 참여하자고 권유 받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나가지 말라고 단단히 못 박은 여자. 하지만 봇물처럼 막상 비가 쏟아지면서 과거와 조우하는 감성적인 추억들(부부의 첫 만남)이 되새겨진다. 제대 후 막연했던 남자와 일당 3만원에 엑스트라로 전전하던 여자에게 쏟아지는 비처럼 막막하고 구질구질한 게 없겠지만, 복권을 사려다 만난 헤드라이트 불빛이나 흐트러진 머리를 묶을 수 있는 머리끈 같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일 년 후, 삶 속에서는 여전히 궂은비가 오지만 그들에겐 추억이 힘이 되고, 딸 혜안이의 우산이 되고자 묵묵히 비를 견뎌내는 것이다.

 

3. 영화 속 살펴보기 (세부 줄거리에 대한 단상들)

너를 보면 즐거웠고

그랬다가

너를 보면

내가 보여 갑갑했다가

이제는 너를 보면

마음이 아파온다

우리 지치지 말아야 하는데......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글이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혹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우리 지지치 말고 계속 이 작업을 하자! 라고 다짐 하는 듯한 여운이 든다.

플롯은 꽤 짜임새 있게 만들어졌다. 끝을 모르고 추락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우자동차가정아파트에서 이사 나오는 장면이 시작이다. 담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 지하 월세 집으로 이사 오게 된다.

 

대우자동차 시위의 후유증으로 등에 파스를 도배하고 사는 남자는 택시 운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택시연맹소속의 집회로 일 년 만에 또다시 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제 그는 섣불리 예전처럼 덤비질 못한다.

 

남자는 시위가 나가지 않고 혼자 골목에서 우유팩을 찬다. 잠시 대우자동차 노조 동료들과 여럿이서 족구를 하던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넘어져 버리는 현실. 그를 바라보는 딸이 있다. 그는 딸이 원하는 피아노 학원을 앞 뒤 젤 것도 없이 등록시켜준다.

 

‘너네아빠는 돈도 없고 힘도 없다’라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남자, ‘엑스트라 배우였으니까 너의 아빠와 결혼했지’ 라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여자. 그리고 이층 집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설거지를 하며 눈치를 보았던 혜안이. 이쯤 되면 이들은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눈 돌리면 바로 옆에 있는 이웃들이다.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아서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리는 바로 우리들을 보고 부디 분노를 서슴지 않길.

 

 

<각주 부분은 붙여넣기 하기가 까다로운 관계로^^;생략하겠습니다. 목요일 날 발제문에서 모두 확인하실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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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의 리뷰를 보고 떠오르는 ?

영상이론과 김현선

 

하나의 전제

나는 전 시간에 <빗방울 전주곡>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본 내용에 대한 곡해의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의 전제

나는 <<빗방울 전주곡>에 대한 리뷰>를 보았다.

그러므로 리뷰에 쓰여진 내용에 관한 질문은 가능하다.

 

본론.

헤어나올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 있는 부모가 꾸는 꿈은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자신의 딸만은 그들의 삶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꿈은 자신들에게 처해진 현실은 고스란히 남긴 채

이미 누군가가 여유롭게 누리고 있을 또 다른 현실로 자신의 딸을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꿈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한들 문제적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현재 부모의 현실을 이어받는 것이 그들의 피를 가진 딸이 아닐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의 딸은 여전히 그 현실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적 상황에 대한 대안은 근본을 찾아나가야 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지니는 허망함과 그 이후의 난감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은 '그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곳'은 저 멀리에 있는 피안(彼岸)이 아니라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차안(此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질문.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혹은 그들의 미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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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영상이론과 김현선

 

뜨거운 게 좋아.

-복잡한 심경을 뚫고 지나가는 단순한 정신의 행로-


일단 ‘독립영화에 대한 독립영화’를 보고 난 나의 소감은 역시 ‘뜨거운 게 좋다’이다. 과거 어느 순간에 나를 사로잡았던 생각은 인간은 뜨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다른 상황에서 다른 것을 보면서 그 뜨거움을 간절하게 바랐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 ‘변방에서 중심으로’라는 영화를 보면서, 그러는 내내 울컥하고 목까지 차오르던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그렇게 나를 간절하게 했던 ‘뜨거움’이다. 그래서 이렇게 나는, 다시 한번, ‘인간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일정 정도의 따뜻함을 유지하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고, 또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치열해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 안에서 ‘독립영화’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독립영화가 태생부터 정의되어진 것들에 포섭되지 않는 정의되지 않은 것들의 이름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독립영화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독립영화는 ‘(     )에 반하는 영화’라는 정의되지 않는 정의 혹은 부정형의 정의밖에 내릴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비어있는 그 무엇은 무한하게 새로 생겨나고 빠르게 크기을 갖춰 나가며 그와 동시에 그에 걸맞는 힘을 행사하는 모든 유형의 권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독립영화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몇 번이고 자신의 존재를 부르짖지만 그 메아리는 다시 변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독립영화가 (     )에 반하면서 찾아나가는 또 다른 무엇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 앞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잠정적인 결론을 가져다 놓았다. 그렇게 내가 다다르게 한 독립영화의 목적지는 결국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이제껏 이 시대의 공간을 겸손하게 점유해 온 하나의 사람이며, 외진 구석이 본래 자신의 자리였으리라 묵묵히 받아들이고 순간을 견뎌온 우직한 사람이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살아있는 사람이며, 이렇게 저렇게 부딪치게 되는 차가운 발길질에 투쟁해 온 뜨거운 사람이다. 그래, 그 사람들은 그 자체가 ‘뜨거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저런 수식이 필요없는 그냥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과 영화와 이들을 바라보는 나는 무엇으로 만날 수 있는가?

그래, 그건 또 ‘뜨거움’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차가운 걸 차갑다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하여 드디어 다다르게 된 나의 목적지.

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잠정적인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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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영화>에 대한 단상

영상이론과 김현선


               영화를 보면서 흔히 놓치게 되는 것들에 대한 고백


언젠가부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막연한 질문을 던져 놓고 고민하는 것이 습관이 돼 버렸다. 물론 세상에는 이미 그럴듯한 답들이 나와 있고, 내가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고른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현재의 내가, 현재 보고 있는 영화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고민해보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영화의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즉 영화는 보는 행위로부터 의미를 생성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의미는 보는 행위의 주체로 인해 다양하게 분화되므로 영화는 항상 그것을 보는 시점과 그 때의 주체 사이의 관계 안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고민이라 해도 언제나 그것이 현재적 시간 안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습관화된 질문과 고민은 그 상태로 박제되기 일쑤이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홀로 유유히 존재할 것만 같은 영화의 지위를 인정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내가 영화를 보면서 흔히 놓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이다. 더 정확하게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공동의 창작물이다. 그러나 이처럼 당연한 사실이 오히려 쉽게 간과되곤 한다. 마치 영화의 모든 창조적 권리는 감독이 거머쥐고 있으며, 이러한 창조자의 세계는 외부적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감독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 이러한 특수성이 지니는 상대적인 의미, 이러한 요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좀 더 보편적인 환경까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해 사고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동시대적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역사 또한 인간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다시 영화를 만들고 만들어진 영화에 다시 영향을 받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즉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특징을 언제나 포함하고 있는 인간과 그들의 역사 그리고 영화는 그들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차원에서 영화는 그것의 기반이 되는 물질적 토대와 사회․문화적 맥락, 영화 제작 전반에 걸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과 이해관계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과거의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방식  모두를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금 앞서 언급했던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점을 잊지 않으면서 영화 자체와 다소 거리를 두거나 완전하게 거리를 소거해 나가기도 하면서 다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다가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영화를 보면서 흔히 놓치게 되는 것들의 자리를 다시 되돌려줌으로써 살아있는 영화의 의미들을 ‘나는’발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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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327 조형예술과 김현지

<빗방울 전주곡>

 

질문 1. 빗방울 전주곡에 앞서 대우 구조조정에 관련된 영상을 봤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더욱더 무력하게 만드는 구타 장면을 보며 저 곳이 제가 서있는 땅, 한국이 맞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상을 찍는 것을 제재하지 않은 것이 좀 신기했습니다. 어설프게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건가요? 아님 신경쓰지 못한 카메라였던 건가요? 몰래 찍은 것 같지는 않던데. 인터넷에 그게 돌고 나서 찍은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질문 2. 그렇게 실업하고 나서 노동자들에겐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던 겁니까? 그리고 이렇게 보도 형식으로(빗방울 전주곡 전에 있던 영상 자료) 많은 사람들이 그 자료를 봤을텐데, 그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 영상이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것으로 그쳤는지. 아니면 정말 강한 대책 마련이 있었는지. 그렇게 찍은 영상과 <빗방울 전주곡>이 방영 되고 나서 그 시대에 어떠한 반응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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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에 대한 질문

영상이론과  박소영

 

이 영화 뿐만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을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를 볼때 마다

들었던 생각입니다...

먼저 <빗방울 전주곡>에서 다루고 있는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요?

한국의 경제이데올로기에서 투쟁에 뛰어든 노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하지만 분명 그들의 영웅적 행동 뒤편에는

또 다른 상처를 안고 힘들어하는 그들의 가족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빗방울 전주곡>에서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노동자들의 주변을 되돌아 보게끔 하고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렇다면  진정 한국의 어긋난 경제이데올로기에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는

누구일까요?  누구를 위해서 투쟁이 이루어져야 하는 걸까요?

투쟁만이 해결책을 안겨 줄 수 있을까요?..........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올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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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 질문 - 박선영

<빗방울 전주곡>에 대한 질문

 

20041181 연극학과 박선영

 

 

1. 왜 최헌규 감독은 영화제목을 <빗방울 전주곡>로 지었을까요? 최헌규 감독은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에서 영감을 얻었을까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과 최헌규 감독의 단편영화 <빗방울 전주곡>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2. 왜 정배(주인공)의 딸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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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 내 딸은 웃으며 일할 수 있기를

내 딸은 웃으며 일할 수 있기를
<빗방울 전주곡>,최헌규 감독/ 2003/ 29분

 

20041181 연극원 연극학과 박선영

 

 이 영화를 보기 전, 2001년 4월 10일에 있었던 ‘대우사태’에 대한 영상을 먼저 보았다. 실상은 참으로 끔찍하고 참혹했다. 2001년 당시 나는 대우사태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 당시 나는 고3이었고 대학에 가는 일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너무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 생계를 위하여 투쟁하며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도 모른채 나는 따뜻한 방안에서 배불리 먹으며 느긋하게 공부를 하 고 있었다니. 그때는 몰라서 느끼지 못한 죄책감이 지금에서야 몰려온다. 역시나 사람은 아는 것이 병이다. 하지만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서 이리도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이리도 모를 수 있었을까. 세상은 경주마처럼 혼자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곳이 아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그것을 어린 나는 알지 못했고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아무리 애써봐도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지고 마는 것이 사회인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노동자들은 대기업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아무 죄 없이 이유 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죄값을 치러야 할 사람과 죄값을 치르는 사람은 따로 존재하는 듯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꿈을 잃었으며 미래를 잃었고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목숨을 끊었다.
 살고자, 살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마지막 외침은 무참히 휘둘러진 방망이 속에서 산산히 부tu졌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흘린 붉은 피가 그토록 붉어보일 수 없었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대변하는 그들의 피는 싸늘하게 흘러 식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나 자신 또한 무기력해지는 느낌이었다.
 무기력해질대로 무기력해진 나는 <빗방울 전주곡>을 보면서 더 우울해졌다. 그들이 아파트에서 반지하 방으로 이사를 간 것처럼 나 역시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반지하 세계로 한순간에 추락한 느낌이었다. 저절로 우울해지는 곰팡내 나는 반지하의 세계.
 만약 영화를 보기 전 대우사태에 대한 영상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와 대우사태가 관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사고로 정리해고를 당한 한 가장이 그 후 택시기사를 하며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암울한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 정도로만 여겼을 것이다. 연관을 짓기에는 대우사태에 대한 언급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우사태에 대한 영상을 보고 난 후에 영화를 봤기 때문에 쉽게 영화의 전사를 알 수 있었고, 상황파악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감정몰입이 더욱 잘 되었다. 내 자신이 분노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몰입하고 느낀 감정은, 나의 분노에 답답함이 더해진 극도의 답답함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왜 그들은 더 나아질 수 없고 더 나아갈 수 없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애쓰는 자와 애쓰지 않는 자, 삶을 관조하는 자와 살아가는 자, 과거를 바라보는 자와 미래를 바라보는 자. 그들이 합하여 만들어지는 결과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이 세계에서도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길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 였다. 이 세계에서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끌어 내려 함께 나약하게 만들어 버렸다. 낡은 포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포대가 새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가 낡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나약함, 희망 없음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딸 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등록시켜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은 곧 죽어도 미래가 없어도 앞으로 나아가야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 보다 딸 아이의 굶주려질 뻔한 미래를 풍요롭게 만드는 쪽을 택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사라질뻔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딸을 보면서 부러움과 동시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내 자녀라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우리들의 자기희생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말이다.
 문뜩 며칠 전 보았던 <훌라걸스>가 생각이 났다.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어머니들이 하던 일을 물려받지 않고 새로이 건설될 하와이안 센터의 훌라댄서가 되겠다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그들의 어머니들과 어른들은 댄서가 되겠다는 자신들의 딸들을 비난하고 반대한다. 하지만 춤을 추며 행복해하는 딸들을 보면서 자신들은 힘들게 일하며 살아왔지만 그들은 이제 웃으면서,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자고 말한다. 고통스럽게 일하는 시대는 자신들로써 끝내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가려질뻔한 소녀들의 미래는 날개를 펴게 되고 그들은 희망을 현실로 이루게 된다.
 나는 <빗방울 전주곡>에서 역시 자신은 힘들게 일하며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지만 자신의 딸에게는 그 고통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의 딸만큼은 즐거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고자 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은, 끊임없이 내리는 어둠의 빗줄기 속에서 희망은 그 비를 멈출 수는 없지만 막아줄 우산이 되고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느즈막한 저녁, 그래도 비를 피할 수 있는 반지하 방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웃음 짓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달하기에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빈약하지 않았을까. 그 어느 누가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제목이 ‘빗방울 전주곡’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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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트 드렸는데 방명록에 있던 거 어쨌던 원위치로^^;

단편영화 산책 <변방에서 중심으로> - 독립 영화
한국예술종합학교 20011327 조형예술과 김현지


1. 한국영화는 이제 진실한 민족민중적인 영화가 되어야 한다. 이에 우리 독립 영화인들은 민중들의 계급적 정서와 과학적 세계관을 풍부한 영화예술로 구현 하고자 한다.
2. 한국 영화 운동은 영화가 민중이 직접 손으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직접적인 예술이 되기 위해 대중적 보급의 길을 개척하는 임무도 부여받고 있다. 이에 우리 독립영화인들은 상업적 배급망 외의 새로운 대중적 보급망을 꾸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3. 한국 영화운동의 주역은 제도권 내의 양심적, 진보적 영화인들과 비제도권 독립영화인들이다. 이에 우리 독립영화인들은 제도권 내의 영화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악수를 청하고 같이 손잡고 싸워 가는데 앞장서고자 한다.
4. 한국영화는 민족적인 영화예술이 되어야한다. 이에 우리 독립영화인들은 조직적인 창작과 보급 그리고 연구를 병행하여 참으로 우리 것인 영화미학과 창작 방법론을 세워나가고자한다.

1990년 1월 31일 ‘한국독립영화협의회’ 결성선언문의 요지이다. 이는 대중들의 영화 예술에 대한 요구와 역사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움직임, 그리고 그 당시 열악한 영화현실을 개척하기 위한 조직적인 실천이었다. 서울영상집단이 엮은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책에는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1996 독립영화의 혼용된 개념사용을 정리한 갈래는 첫째, 사회비판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진보적 영화운동’두 번째, 기존의 영화미학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소형, 단편영화’와 ‘실험영화’마지막 세 번째 계열은 충무로 내의 젊은 감독들의‘독립 프로덕션’작업을 이르는 것이다. 이 외에 내가 <변방에서 중심으로>영상을 보고 생각난 단어들은 자유, 투쟁, 쟁취, 독자적, 민중미술 등등이다. 자본으로부터, 제도권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영화 신념을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을 보며 그 시대에 독립 영화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푸른 영상의 김동원 감독은 “이젠 더 이상 과거의 언어로 얘기할 수 없다. 정치적인 탄압이 혹독했던 시기엔 어려운 제작여건 때문에 어설프게 만들어졌어도 관객들은 진지하고 엄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젠 새로움이 필요한때”라고 독립영화 작품의 새로운 도전을 강조했다. 근본구조는 변하지 않았지만 자본사회와 영상 환경의 변화로 제도권 영화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독립영화에게 오히려 호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탄압이 없어지는 지금 앞으로의 독립영화가 어떻게 정의가 되고 발전할지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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