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찜함

from monologue 2011/06/02 14:29

대체 트윗을 해야 할지

페이스북을 해야 할지

이 답답한 감정을 토로하고 싶을 때는

어디로 가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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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14:29 2011/06/0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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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너무너무.

from 분류없음 2011/05/31 16:02

오도엽님의 [럭셔리 매장, 죽은 아이 배에 품고 일하다]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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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1 16:02 2011/05/3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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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둔다는 것,

from 분류없음 2011/05/30 11:15

둥지라기 보다 흐르는 강물처럼 적을 두어라,

그대가 내게 충고해 준 말은 맞았다.

 

괜히 내려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 본 생경함, 낯섦,

같은 얼굴들인데 왜 다른 사람들이 보였던 걸까

마음 속으로 그렸던 어떤 감정들은 눈 녹듯 사라졌다.

 

바랐던 건 무엇이었나, 

반가운 감정조차 쏟을 여력이 안 되었던 나도

같은 부류 아니었나.

그렇게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야, 누구를 설득하며 누구를 조직하랴.

다시 돌아오는 건 나에 대한 반성이다.

 

현재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에서 잘하자는 것,

싫든 상처를 입든 어떤 연유로든

나를 떠난 이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자는 마음가짐.

 

그래,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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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11:15 2011/05/3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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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

from monologue 2011/05/28 01:41

추웠죠 한 겨울, 당신 언저리에 있던 아픔들을 만나며

냉기 가득한 골방 안에서 나는 늘,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봄이 유독 늦은 해처럼, 그렇게 서서히 그대와 나에게 온

어떤 것.

나는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괴로웠어요.

얼마나 힘들었어요.

삶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거지만

혼자라서, 그래도 결국에는 혼자라서

오롯이 버티고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너무 잘 견디어 왔어요.

 

새벽,

혼자 혹은 여럿이

외롭게 혹은 피터지게 싸우는

여전한 전쟁터.

나 혼자 평온을 찾으며 잘 살고 있노라고 부끄러운 고백을 해요.

 

그저 그런 안부 인사가 아니었으면...

오랫동안 그리워 하던

그대와, 그대를 생각하게 된 나에게

뒤늦은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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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8 01:41 2011/05/28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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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일상에서 치고 올라오는 짜증들은 덮어둔 상태다.

일터에서 올라오는 짜증에 나름 시위하는 방식을 찾다가

이젠 그것마저 생각할 여유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어중간하게 자른 머리가 나름 어울린다고 자위하는 것처럼.

 

얼마나 소중했었나, 내가 골몰하던, 우리가 격하게 논쟁하던

그 말들, 담론들, 그것이 일상을 지배하게 하는 힘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들이 무척 많다.

당신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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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3 15:49 2011/05/1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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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

from 분류없음 2011/04/27 10:34

고운 흰 눈 같던

 

때로는 활짝 핀 목련 꽃 같던

 

그 사랑은

 

녹은 뒤 감쪽같이 사라지는 그 허무함처럼, 

 

치부를 드러내며 떨어지는 그 처참함처럼

 

나를 괴롭힌다.

 

이런 것이었나.  수 많은 언니들이 겪어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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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7 10:34 2011/04/2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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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물을 걸으며

from the road 2011/04/19 23:06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길은 어디일까.

 

낮은 키의 풀들이 보일락말락

겨우 봄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제주의 산간.

 

말못할 굴욕감에 휩싸이던 순간들과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취해

나는 그 즈음 어딘가에 존재했다.

 

그곳에서 목격한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소용돌이가

흡사 나의 처지와도 닮아 있는

이 모순, 형언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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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9 23:06 2011/04/19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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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from monologue 2011/04/17 21:07
때로 그것을 갈망하는 시간이 있다 친구야 넌 얼마나 힘들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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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21:07 2011/04/17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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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monologue 2011/04/13 17:03

며칠 간 시가에 다녀온 뒤로

나를 놓아주기 위한 시간을 만들고 있다.

곰곰 되짚어 생각해 봐야갔다. 나를 옭아매는 것들...

 

 

1. 결혼해서 산다는 것

 

내가 놓인 불평등한 위치 때문에

그걸 강제하는 제도 속에서, 상대방이 보다 더 많은 내용들을 양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상대방은 가부장제의 핵심에 들어와 있었다.

개인이 개인에게 처한 제도의 영향력을 단번에 뒤집기란 쉽지 않아도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의식적 노력 아니었나.

 

헌데 내가 내 스스로 해내고 있다는 것도, 그만큼을 상대방이 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얼마 만큼, 그만큼을 다시 누가 누구에게로

계산된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것, 누가 하고 싶어서 하나.

여성들에겐 숨이 차도 이런 방법이 아니면 쓸 방법이 없다. 

특히 남성과 맺는 삶의 관계와 태도의 문제에서는 더욱.

 

남성 일반이 갖게 되는 특질이란 없다고 여겨왔으나,

요즘들어 비슷한 조건과 환경 그리고 개인의 의식 여부에 따라...

비슷한 특질들도 몇몇 발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는 항상 남편 집에 가면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걸며, 안부를 묻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의식적으로 애를 쓴다.

남편은 어디에 있든 TV만 본다. 우리 집에 와도 마찬가지다. 소파 위에서 티브이만 본다.

엄마에게 잘 지냈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형식적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는다.

결혼 5년차인데 자발적으로 전화 한 번 해본 적 단 한번도 없다.

못해서 그러려니 해도 이제는 아예 안 한다.

언니들한테 물어보니 남편들 다 그런단다. 그래도, 내 남편은 더 특수하다.

 

상대방에게 관심 없다는 투, 혹은 너와 대화를 나누기 싫다는 투가 너무 현격하게 드러난다.

고갤 숙이거나 돌리거나(이럴 때 티브이는 굉장히 좋은 대상이 된다) 말을 걸어도 한 마디면 끝, 혹은 아예 안 하기도 한다. 이런 무엇 같은 경우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다. 솔직히 결혼 직전부터 알게 되었고, 이해해야지 하면서 그 이후부터

계속 내 속을 긁어놓는다.

그 무성의한, 말없는, 싸가지 없는, 이걸 지적하면 지적한다고 난리를 치는 그 잘난 자존심만 쎈 태도...

사람과 어울릴 수 없는, 사회성이 제로인 그 천성!

 

어쩔 수 없다. 나는 이런 남편과 살기에 늘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그러면, 나는 늘 귀찮게 하고 부탁하는 사람이 된다.

그럼 그 사람은 늘 그걸 받아주었다. 속으로 짜증은 났겠지만...그게 싫었다면 말을 해야지

적어도 나에게 부탁이라도, 혹은 말로써 짜증이라도 한번 건네는 게 그리 어렵나.

 

죽자 사자 일에 매달리는 생협 내 구조, 전화로 온갖 소리륻 다 들으며 감정노동을 해다 바쳤던 1년

짧았지만 결코 짧지도 않았던 그 불합리한 구조와 지쳐가는 시간 속에서...나는 버텼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말 한 마디 못해주는가. 자기 삶이 바빠서? 해 줄 인간도 아니었다.

 

헌데 내 가족의 모임이 있을 때 자기 일정이 있어서 싫고

지 가족 모임이 있을 때는 가야 한다 챙기면서 내 일정이 되는지 안 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안 가려고 했다. 그 무성의한 태도가 너무 싫증나서 무척 짜증나서, 당연히 가지 말아야지 했다.

헌데도 갔다. 가는 내가 문제야, 하면서 갔다. 오만가지 생각에 휩싸이며.

 

2. 제사

 

그는 내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게, 사회주의 모임(개 빌어먹을! 너는 사회주의 모임 잘도 가면서 일상은 이 따위로 사니! 사회주의자 모두가 자기 가족은 끔찍하게 챙기고 그렇게 순종적이며 가부장제도에 한 마디 제동도 못 거는 찌질이로 사니? 어?) 이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반대로 일을 그만두고 하루도 제대로 못 쉬고, 나는 시가에 가야했다.

계속 걸려오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의 전화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위가 뒤집어진 남편의 건강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너무 지쳐 있는 지금의 일상이 조금이라도 뒤틀어지면 내가 너무나 아플 것 같았다.

예민한 나를 잘 알기에, 헤어지고 뭐하고 생쑈하는 것보다 차라리 마음에 없어도 가지 하며 마음 먹었다.

나락으로 치닫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보다, 남편의 가족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다.

멀리 살고, 잘 보지 못하기에 가서 얼굴이라도 딸처럼 보여주자 생각했다. 된장맞을!

 

말도 안 되는 비과학적 호주제의 풍습 때문에, 제주도의 토착민들(남성들)이 모여 지내는 제사에 여자들은 들러리다. 아니 없다. 그래, 섬이라 척박하고 파도에 휩쓸려 죽고 못 먹고 없어서 죽고 43때 죽고 왜 제사를 지내는지 알겠다. 알겠는데...이걸 지내면 여자들은 행복해지나? 이걸 준비해주는 여성들은, 행복해지냐고? 너희들이 뭔데 성씨를 잇네 어쩌네 하며, 제주도를 이끌어가는 뭐뭐네 ㅈㄹ인데? 어? 너네들 뒤에서 피터져라 일해주고 희생해주는 부인이나 다른 여성들은, 뭔데? 어? 대체 뭔데!!! 여성주의자로서 제사에 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들고 싫은 일인지 모른다. 희한하게 남편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욕할 거면 가지 마. 이거였다. 

아니 그냥 여성주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여성이라면, 가기 싫다. 정말로!

실제 이번에 애를 가진 동서는 돌도 안 된 아이를 끌고 알 수도 없고 알 지도 못하는 제사에 가서 음지에 앉아 하루를 꼬박 보냈다. 대체 우리가 왜 이래야 하나. 왜!

 

출산에 대한 생각도 없고, 생계 부양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 매우 훌륭하신 남편은

이 사실을 부모에게 숨기고 있다. 이제 보니 아주 의식적인 것 같다.

그러면서 '왜 니 스스로 옭아매냐며, 너는 왜 나만 문제라고 비난하느냐며, 너도 일정있으면 안 가면 되지 않느냐며' 나한테 화살이 돌아온다.

 

나는 남편이 아이를 갖지 말자고 한다고 시가에 이야기를 수차례 했다.

그럼에도 가서 아이 낳지 못하는 여자 역할을 해주고 와야 했다.

남편이 아파 들른 약방에 갑자기 나를 앉히더니 애 못낳는다고 진맥을 보란다.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누가 애를 못 낳아서 못 났나? 내 자궁이 아파 보이면(얼굴에 써있나?) 내 몸이 아프다고 말 하든지

왜 임신을 못한다고 약을 먹으라며 난리인가.

 

남이야 섹스를 하든 말든, 배란일에 딱 맞추어 남편이 사정을 해서 수정란이 잘 안착되어

내 자궁 속에서 자라든 말든 무슨 상관이며,

나도 때때론 그걸 원하는데 남편이 원하지 않는 이런 상황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이에 대한 대화 자체를 남편은 거부해왔다. 역시 말 없이 티브이만 본다.

 

'저희 섹스 안 합니다. 잠도 따로 자요. 몇 달 됐어요. 서로 원치 않습니다.'

말하기 싫다. 이렇게, 특별히 필요한 말도 아니고 하기 싫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지 스스로 술 먹어서 위가 뒤집어 진것을 두고도 시아버지는 나에게 아프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어이가 없다. 남편의 몸이 내 몸인가.

 

함께 얼굴 보며 같은 공간 안에서 산다는 것

무얼 하자면 무엇을 하고, 별 말은 없어도 지금까지 살아왔다.

상호간 다른 대화들은 일절 나누지 않는 지금 같은 상황,

나는 남편의 기분을 풀기 위해 혹은 상호 관계를 부드럽게라도 만들기 위해

말도 걸어보고 이것저것 다 해봤다.

 

헌데도 소용이 없다. 여전히 말이 없고, 대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나를 무시하며

고고한 가부장제도의 수익자로, 사회주의자로, 게다가 환경운동가로 잘 살고 있다.

사람 관계 하나 제대로 맺을 줄 모르는 게  사람 만나는 태도 자체가 너무 무성의한데다

뭐하나 제대로 결단 내릴 줄 모르고, 지 혼자 도도하고 고고하게 살고 싶어하고,

그러면서 남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선배 운동가(?하찮아서 내원!)로서 어줍잖게 조언하려 하고

 

매번 열띠게 일하고 활동하는 건 나이고, 활력도 얻지만 그만큼 소진되는 에너지도 커서 지치는 사람도 나다.

 

열이 솟구치겠다. 정말 니가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는 건데 왜 이게 일방적 비난인가.

대답을 해봐라. 대답해보라고!

 

제발이지 이렇게 나를 정체화하기 싫다. 애써 행복하게 사는 걸 보여주기 위해 거짓으로 내 삶을 포장하는 것도 싫지만, 전형적인 부인 역할을 해주며 남편의 건강과 시가에 사다줄 옷가지와 돈과 안부 전화와 그런 것들을 매번 먼저 챙기는 대상이 되기는 싫다.

 

어떻게 이를 거부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남편처럼 싸가지 없이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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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3 17:03 2011/04/1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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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를 빼놓지 않고 봤다.

개인적으로 7명의 가수 모두를 좋아하기에,

목숨을 걸고 노래하는 그들의 노래를 나 역시 재밌게 앉아 즐기고 있었다.

꼭 보게 만드는 MBC의 치밀한 전략에 나도 말려들어가는 구나,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래들이 좋은 걸 어떡하나.

 

솔직히 김건모의 노래는 좋았다. 떨어진 김건모 만큼 다른 가수들의 노래도 다 좋았다.

립스틱 퍼포먼스를 할 때 저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떨어질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거의 비슷하게 공을 들이며 노래를 부른 듯 했다.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가 없는 무대였는데, 누군가 붙으면 누군가는 떨어져야 하기에...어쩔 수 없나보다 싶었다. 애초부터 재도전 형식을 넣었거나 서바이벌이 아니었으면 이런 잡음이 나오진 않았을텐데...

 

자처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순간 김건모 만큼은 나와줬으면 했나보다 나도.

찌들긴 했어도 초창기 데뷔곡들은 이십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너무 좋고,

그의 음성이 담긴 라이브 무대를 오랜만에 맛볼 기회를 놓치는구나 싶어 너무 아쉬웠다.

재도전에 찝찝하기도 하면서 이건 뭐야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김건모에게 주어진 기회에 안도했다.

처음 선정된 가수들이 경합하며 도전에 도전을 거듭나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후폭풍은 있겠다 싶었지만 

이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서바이벌을 문화적 코드로 차용했다가

아, 이게 아니구나 하고 선회했기로서니

대체....갑자기 원칙은 왜 나오며, 중견가수에 대한 전관예우?는 왜 나오는가. 내 생각이지만, 김건모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탈락했어도 이소라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다. 웬 자질 논란? 500명의 청중이 절대적 기준이라 할 수 있나. 납득하기 어렵고, 치욕스럽고... 그럼 그런 기분도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리얼리티 쇼에서 출연자들이 밥을 먹지 않는 것에 대해 시청자들이 목을 매게 만드는가?

꼭 굳이 그래야 하는가?

누가 누구와 약속했는가. 피디들이? 출연진들이?

피디들은 애초부터 강건한 의지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치만 출연진들은 모두가 탈락할까봐 벌벌 떨었다.

기성 가수들의 파격적인 서바이벌이 아니면, 그만큼 자극적인 코드가 아니면 대중들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물론 방송사는 대중들이 길들여진 문화적 코드가 그렇다는 핑계들을 대며, 그것을 활용하여 더 자극적인 서바이벌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한다. 발언할 기회가 없는 대중들은 그저 수용하거나, 외곽에서 주시하고 때로 비판하며....거대 방송사와 자본이 주입하는 문화들을 수용/저항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위기는 쫌....

 

'떨어지고 탈락하는 살벌한 분위기로 만들지 않겠다'는데도 사람들은 난리를 친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다행이지 않나.  거짓말쟁이 피디라고 속았다, 고 비난만 퍼부을 때인가.

 

순식간에 원칙을 저버리는 인간으로 낙오된 피디는 누굴 탓하며,

광대 노릇하는 가수들의 긴장과 분노는 누구를 향해 있으며,

500명의 청중들을 바보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서바이벌이 문화적 코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그것을 활용하고 있는 방송사나 자본,

거기에 이미 잠식되어 있는 대중들의 여론이

서로가 서로에게 겨눠진 양날의 검이라는 것도...

망각해서는 안 되지 않나.

 

총체적인 문제다. 누구를 자르고, 누구를 비난하고 탓하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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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4 18:54 2011/03/2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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