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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0 - 동지

 

15년 전, 엄혹한 세월 함께 한 '동지'
[노래이야기⑳]아내의 연행 후 의식화 당한 남편…눈물로 하나돼
 
 
 

지난 회에 이어서 96년 이야기를 좀 더 하려 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우스운 에피소드가 몇 개 있었습니다. 연행이 되면서 경찰들은 출판사 ‘민맥’ 사무실과 ‘꽃다지’ 사무실을 압수수색 했습니다. 지금은 명확하게 저에 해당하는 물건들만 압수수색을 하라고 버티고 싸울 수 있지만, 처음 당하는 일이다 보니 그냥 넋 놓고 이것저것 가져가는 것을 지켜만 봤겠지요.

책상 서랍과 책꽂이를 뒤져 이것저것 챙기더니 급기야 컴퓨터 본체와 자판, 모니터, 프린터까지 가지고 갔다는 겁니다. 지켜보던 사람들 눈에도 그것들을 왜 가져가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내용을 보여준 모니터와 프린터, 그리고 뭔가를 입력해 준 자판들이 무엇을 입출력하고 보여줬는지 취조하려는 모양이었겠지만,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하자 정작 본체는 연결도 하지 않고 플로피 디스켓에 있는 내용들만 잔뜩 출력을 해왔더군요.

근데 플로피 디스켓이라는 게 이사람 저사람이 들고 다니다가 돌고 도는 물건이던 때라 저도 알 수 없는 다른 단체들 자료나 개인들의 자료까지 잔뜩 있어서 참으로 난감했더랬습니다. 그 시절 모 통신사의 한총련 CUG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듣고 경찰들이 그 회사를 찾아가 어느 방이 한총련 방이냐고 했다는 기사를 시사월간지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그저 황당할 뿐이었습니다.

 

한총련 방은 어디?

또 하나 어이없었던 일은 검찰 조사 내용 중에 ‘민맥’에서 출판된 서적들에 대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난 그 책들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더니 ‘거짓말하지 말라’면서 ‘남편에게 의식화 당했을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제가 지난 회 때 이야기한 것처럼 남편은 사실 전혀 운동의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처음 93년 범민족대회 무대 미술을 도와줄 때도 총 기획자한테 한참 설명을 듣고 난 후 제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범대회가 무슨 대회야? 남한 호랑이랑 북한 호랑이 데려다 싸움시키는 건가?”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툭하면 물었습니다. “민가협은 무슨 뜻이냐”고, “사람이름이냐”고, “가노방(가자 노동해방의 줄임말)은 무슨 가게 이름이냐, 열사는 무슨 뜻이냐” 등등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 제가 남편에게 의식화 당했다 하니 기가 막혀 정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남편이 제가 구속이 되자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얼마나 막막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한겨레신문 기자와 민가협에 연락을 했답니다. 그러자 민가협 상근자들과 몇몇 사람들이 모두 장안동 대공분실 앞으로 바로 모였답니다. 장안동 대공분실 철문 앞에서 임신 8개월인 한 여성이 깡통을 들고와 문을 마구 두들기고 발로 걷어차며 당장 석방하라고 외치더랍니다.

그 여성간사는 남편의 절친한 친구의 부인이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까 하는 생각에 걱정도 되고, 한편으로 존경스럽기도 했답니다. 정작 자신은 소리도 나오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런 후에 같이 노래를 부르고 해산을 했는데, 그 노래가 <동지>였습니다.

 

가슴에 와닿은 노래, '동지'

남편은 <동지>라는 노래가 그렇게 아름답고 가슴에 와 닿는 노래인 걸 처음 느꼈다지요. 결혼 전부터 꽃다지 공연이나 집회에서 그 노래를 많이 들었지만, 그 노래의 가사가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로 들리면서 우리들의 노래가 얼마나 절절하고, 각 상황마다의 아픔이나 동지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는지를 그때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남편은 매일매일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꽃다지 사무실에서 기거하며 탑골에 가고, 또 면회를 오고, 민가협 집회에 가고, 꽃다지 공연을 같이 다녔습니다. 면회를 와서는 그날그날 있었던 일과 변호사(아, 그 때 제 변호를 맡아주셨던 백승헌 변호사님께 정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에게 들은 사건의 진척상황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50일 만에 보석으로 나왔는데, 그날은 같이 구속이 된 원용호 대표의 결혼 10여 년 만에 얻은 첫아이 100일이었고, 또 석방된 이틀 뒤엔 친정어머니의 회갑이 있었지요. 석방되기 전날 남편이 면회를 와서 우울한 표정으로 내일은 면회를 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매일 와준 것도 고마운데, 괜찮다고 했더니 금새 장난스런 웃음을 지면서 내일 석방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의 고생도 고생이지만 밖에서 저보다 더 힘겨운 투쟁을 했을 모든 이들에게 감사했고, 또 안도했지요. 석방이 되던 날 서울구치소 앞에는 꽃다지 식구들과 많은 지인들이 모여 저와 원용호 대표를 맞아주었고, 다음날 탑골공원에서는 석방 환영식과 그간 지지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는 마지막 거리공연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꽃다지 거리공연에 큰 도움을 주셨던 탑골 공원 어르신들께도 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재판이 계속되던 4월에 꽃다지 봄 정기 콘서트가 시청 앞 세실극장에서 열렸고 공연 중 한 부분에 제가 무대에 출연해서 많은 이들에게 감사를 드릴 기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시부모님들도 공연에 오셨고, 연일 공연장은 꽃다지를 아껴주시는 많은 분들이 빼곡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약 1주일간의 콘서트라 매회 무대에 올라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자리였지만, 매번 다른 분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새로운 느낌이었고, 그 때마다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거르지 않는 결혼기념일 여행

남편은 아직도 결혼기념일에 여행을 가지 않으면 잡혀갈지도 모른다며 꼭 여행을 가자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또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결혼기념일 여행을 가지요. 또 그 당시 제가 뜨개질로 시아버님 덧신을 짜고 있었는데, 제가 다시 뜨개질을 하려 하면 불길하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 일조차도 다 그런 사건으로 연결이 되게끔 남편의 몸과 머리에 각인이 된 것이겠지요.

15년가량이 지났지만 아직도 몇몇 노래를 들으면 그 때 생각이 납니다. 어떤 상황에 접했을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고, 또 어떤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사람, 기억, 느낌이 있지요. 여러분 모두에게도 그런 노래들이 많길 바랍니다. 남편에게 노래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준 <동지>를 같이 들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부르는 노래도 좋지만 좀 아쉬운 감이 있으니 꽃다지 대합창 편성으로 듣겠습니다.

 

   
  

 

<동지>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혀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보았다
살을 에는 밤, 고통 받는 밤,
차디찬 새벽서리 맞으며 우린 맞섰다
사랑 영원한 사랑 변치 않을 동지여
사랑 영원한 사랑 너는 나의 동지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가 먼저 죽는다 해도
그 뜻은 반드시 이루리라 승리하리라
통일되는 날 해방되는 날
희망찬 내일위해 싸우며 우린 맞섰다
투쟁 영원한 투쟁 변치 않을 동지여
투쟁 영원한 투쟁 너는 나의 동지

 

*음원출처 : 노동가요 공식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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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9 - 행복한 인생

 

감옥에서 수백번 부른 '행복한 인생'
[노래이야기⑲] 노래책 만들고 갇혀…“구속이 내게 남겨준 큰 선물들"
 
 
 

이번에는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996년 2월, 당시 희망의 노래 꽃다지 대표였던 저와 민맥출판사 대표는 『희망의 노래1, 2, 3, 4』(1992~1995 도서출판 민맥)라는 제목의 노래책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이 됐습니다. 노래책에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실어 배포했다는 이유였지요.

 

노래책 내고 구속되다

   
  ▲노래책 <희망의 노래>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나 자주, 민주, 통일, 투쟁, 해방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모든 노래에 밑줄을 그어 조각조각 짜깁기하더니 그게 북한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겁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이고, 꽃다지가 ‘열린 음악회’나 ‘샘이 깊은 물’ 같은 방송 출연도 몇 번 했던 터라 다들 어이없어했지만, 그 당시에도 몇 건의 국가보안법 사건이 계속 만들어지곤 했던 때였습니다.

연행되던 2월 3일은 토요일이었고, 그날은 동대문운동장 앞에서 꽃다지 공연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장애인 노점상이셨던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외치는 집회였던 듯합니다.

그날 결혼 2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남편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가 우리 공연 담당자의 급한 집안 사정으로 제가 대신 공연을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여행 출발을 저녁으로 미루고 공연을 같이 갔더랬지요.

그 당시에는 핸드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때고, 삐삐를 통해 급한 연락을 하곤 했던 시절입니다. 공연을 하는 중에 계속 삐삐가 울렸고, 전화번호 끝에 8282라는 숫자가 붙어 뭔가 급한 연락이라고 생각했지만 공연 중이었고, 제가 반주 CD를 조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근처 공중전화에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민맥출판사 대표가 오늘 아침 출근길에 집 앞에서 연행이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민맥출판사는 서울매체라는 민중가요 음반 유통의 총판을 담당하고 있었고, 사회과학 도서와 음반의 배포를 담당하는 사람이 제 남편이었습니다.

 

"형사들이 저를 보고 반색하더군요"

바로 민맥출판사로 전화를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분명 출근을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니, 아마 출판사를 털어가지 않았을까? 아니면 직원이니까 남편도 연행이 된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왔습니다.

남편은 대학을 다니지 않았고 운동권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인연이 닿아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문화운동이라든가,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래도 꽃다지 활동이나 문화운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한 어떤 사전 정보나 지식도 없을 터이니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부랴부랴 뒷정리를 하고 꽃다지 식구들과 민맥출판사 사무실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어이없게도 형사들이 포진해 있었고 저를 보자마자 아주 반색을 하면서 영장을 보여주더군요. 형사들은 제가 결혼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새벽에 저희 친정에서 잠복해 있다가 허탕을 쳤던 것입니다.

민맥 사무실을 수색하면서 그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고 남편은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형사들이 아무 곳에도 전화를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 발로 호랑이 굴에 찾아간 거지요. 저는 영장을 자세히 확인한 후 가까운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내용을 읽어주고, 담당 검사의 이름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남편에게는 ‘민가협과 <한겨레> 기자에게 연락을 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저는 장안동 대공분실로 연행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어쩔 줄 모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구치소로 이송

이틀간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은 후 결혼기념일인 2월 5일 서울구치소로 이송이 되었고 검찰 조사는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연행이 되던 날부터 장안동 밖에서는 매일 민가협 상근자들과 단체 사람들이 항의집회를 열었고, 꽃다지는 민예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하며 매일 탑골 공원에서 ‘구속 예술인 석방을 위한 거리공연’을 열었답니다.

여러 신문에 기사화 되었고, 많은 이들이 농성장과 거리공연에 함께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매일 남편과 꽃다지 식구들이 면회를 와 상황을 전해주고, 또 기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구치소 안에서는 조사가 없는 날은 주로 책을 읽거나 편지를 읽고 쓰는 일이 전부였지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많은 분들의 격려 편지를 받았고, 또 면회를 오지 못한 꽃사람, 꽃다지 식구들의 수많은 편지들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가장 걱정을 했던 시부모님도 제 편이 되어 힘을 주셨지요. 시어머니는 민가협 집회 단상에서 “꽃다지 가수들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청년들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들만 잘살려 하지 않고 스스로 힘든 일 마다 않으며 남들과 같이 나누려는 아주 훌륭한 사람들인데 왜 탄압을 하느냐”며, “내 착한 며느리 은진이를 당장 내놔라”하고 호통치셔서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시아주버님들과 시누이 식구들도 모두 번갈아가며 탑골공원에 나가 후원도 해주시고, 고생하는 꽃다지 식구들에게 밥도 사주고 하셨지요. 다만 친정어머니만큼은 그 안에 있는 저를 안쓰러워 하셔서, 다음 달에 예정된 회갑연을 취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너를 이 안에 두고 내가 어떻게 그런 잔치를 하느냐"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지요. 단 한 번도 친정엄마한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걸 처음으로 후회했습니다.

거리공연 당시 탑골에 계신 어르신들이 처음엔 시끄럽다고 항의를 하셨다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다들 앰프를 날라주시고, 따뜻한 음료수를 사다주셨고, 오히려 공연을 방해하려는 외부인들을 나서서 막아주셨다더군요. 그분들은 제가 석방이 되고 나서도 종종 사무실에도 놀러 오시고, 공연도 보러 오시곤 하셨답니다.

 

구속이 준 큰 선물

꽃다지 식구들도 외롭진 않았을 겁니다. 꽃사람들과 꽃다지 팬들, 그리고 민족음악협의회 소속 가수들과 노동문화단체들, 그 외에도 대중가수들까지 참여해서 지지해 주셨지요. 그러니 매일 그 소식과 편지들을 접하면서 저는 정말 너무 벅찼습니다. 그리고 미안했습니다. 눈보라치고 추운 겨울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농성과 거리공연을 진행해준 모든 이들에게 어떤 표현으로도 모자란 마음이었습니다.

인간이 한 평생 살면서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의 사랑을 한 번에 받았기에 이 모든 이들의 사랑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선택한 삶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그 때 이미 다 받았던 거지요. 그래서 저는 50일간 그 안에서 매일 다짐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에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 모든 사랑은 저 개인이 아니라 꽃다지와 우리들 모두에 대한 사랑이었지요. 지금도 사람들에게 실망하거나 상처를 받을 때면 그 때와 그 감정을 떠올립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줬던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쉽게 실망하지 말자, 가능성을 믿고 기다리자, 좀 더 사랑하려고 노력하자, 하면서 말입니다.

어찌 보면 그 사건으로 꽃다지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알려지긴 했으니 고맙다 해야 할까요? 그리고 제가 이 길을 선택하고 살아온 걸 후회하지 않게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그 안에서 매일 매일 감사하고 다짐하면서 저도 모르게 입안에서 흥얼거려지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노래의 가사를 읊조리면 왈칵 울음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정말 그 안에서 몇 백번도 넘게 되뇌던 노래 <행복한 인생>, 같이 들어보시지요.

 

 

행복한 인생

                                                           조민하 글, 곡

 

삶은 나에게도 주어지고 때론 햇살이 드리우고
때론 견디기 힘든 시련을 만나 방황도 했었지만
그런 나의 삶의 지금까지 가장 소중한 선택은
진정 사랑할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을 산다는 것
잠시 쉬어갈 순 있지만 주저앉지 말고
넘어질 수는 있다 해도 절망하지 말고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늘을 살아야지

 

* 음원출처 : 93, 희망의 노래 꽃다지 2집 테이프 [내일엔 내일의 태양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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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8 - 가자, 노동해방

 

노동자 노래패 기량 뽐낸 <가자 노동해방>
[노래이야기 ⑱] 노동문화 장르발전 전망 잃어, 노동자대회 전야제 경연대회 폐기
 
 
 

노동가요의 확산과 보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들은 역시 민주노조의 조합원이고, 그 장은 주로 집회와 파업현장들입니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입으로 노래를 부르고 또 같이 부르면서 서로 단결하고, 결의를 다지고, 목 놓아 울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급의 선봉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노조노래패들은 노래를 정서적으로 검증하고 보급하는 창구로서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처음 노래를 만들면 노조노래패들에게 먼저 부르게 하고, 노래를 검증받은 후에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곡이 좀 어렵다거나 부르기 어색한 부분이 있다싶으면 곡을 고치기도 했었고, 창작된 노래가 노동자노래패들에게 어떤 정서를 받아들여지는가를 보면서 다시 창작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노래패들은 민주노조가 세워진 웬만한 규모의 사업장마다 거의 전국적으로 조직되었고, 지역별 연합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노래패 뿐 아니라 연극패나 풍물패들도 모여서 노동가요를 즐겨 부르곤 했고요.

 

노래운동의 선봉, 노조노래패

이러한 지역의 노래패나 문화패들은 문선대로서, 연대의 선봉으로서, 또 노동가요를 보급하는 중요한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노래는 지역 집회나 단사 파업에 전문패가 서지 않아도 노조노래패가 노래를 보급하고, 그 자리를 통해서 테이프도 엄청나게 판매되곤 했지요.
 

   
  
또 지역별로 노동자문화제들이 있었는데, 주로 가을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지역별로 문화패들의 그간의 성과를 모아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89년 즈음부터 시작해 각 지역별로 해방가요제, 가을문화제 등으로 자리를 잡았고, 단순한 노동자들의 문화축제를 넘어서 노동운동의 주요 이슈를 공유하고 결의를 다지는 자리였습니다.

방식은 주로 경선대회 형식이었지만 굳이 기능적 우수성을 가리기 보다는 단결과 연대, 투쟁을 자기 정서에 맞게 얼마나 잘 표현했는가를 기준으로 약간의 기념품과 명예를 상으로 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지역에서 선발된 문화패들이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모여 공연 형식으로 경연을 벌였습니다.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업종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올라왔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대규모화되거나 종합집체극 형식을 띠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천의 해방가요제나 노동자대회 전야제 심사위원으로 종종 결합을 했는데 전문패 공연과는 다르게 독특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연합적인 문화제 이외에도 단사 노래패나 문화패들의 독자공연도 종종 있었지요.

온전히 자신들의 이야기로 구성해서 조합원들과 주변 동지들 앞에서 공연을 하면 아주 구체적인 사안들이 담겨져 공감대를 훨씬 잘 만들어가기 때문에 함께 분노하고 결의하고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어떤 문화패 공연에서는 극중 한 노동자가 자살을 하려는 장면에서 객석의 조합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뜯어말리기도 했고, 극중에서 자본가 역할을 맡은 문화패원에게 온갖 욕설과 신발을 벗어던지는 등의 일들도 종종 벌어졌습니다.

 

문화패원들에게 왜 욕설을?

그러다가 95년 11월, 서울지역 예선에서 <가자 노동해방>을 각기 다른 업종, 연령대의 노동자 노래패 대 여섯 팀이 거의 똑같이 부르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다양한 정서의 노동자 문화를 보여주는 자리로서 의미는 축소되었다는 평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자 노동해방>은 그 해 초에 발표되었는데, 노동자노래패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는 곡으로 대합창곡을 선호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중, 96년 노동자대회 전야제 때 지역의 공연들이 대부분 풍물, 깃발춤, 노래, 극등이 결합된 집체극의 형식으로 문선공연을 짜서 올라온 것을 보면서 더 이상의 노동문화 장르발전전망을 보여주기도 어렵다고 평가되어, 이것을 마지막으로 전야제의 경연대회 방식을 폐기하게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노동자대회 전야제는 아니었지만 97년 여름, 보라매 공원에서 87년 노동자투쟁 10주년 기념문화제를 한 때가 경연대회로는 마지막이었던 것 같네요. 물론 지역이나 단사별로는 경연대회 방식을 계속 가져가는 곳도 있지요. 또 그즈음부터 지역별 문화제들이 많이 없어지기도 했고요.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문화패들은 점점 축소되거나 해체되기 시작했고, 대규모 집회도 많이 줄어 노동문화, 노동가요를 향유하고 보급할 수 있는 장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래서 지난 회에 이야기한 것처럼 일상의 접점들을 만들어가는 노력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어떤 측면에서 보면 경연대회 방식은 노동자문화패들이 기량을 쌓고, 창작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검증받고자 하는 욕구를 작동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조건과 시대가 변화하면서 노동가요를 향유하는 방식도 달라졌고, 노동문화를 계속 투쟁시기의 문화로만 국한하는 풍토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기에 일상에서 자신의 주체적인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인식한 것입니다.

지금은 노동자문화패가 몇 군데 남지 않았고, 또 문화패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문선대적 성격이 강해 이전처럼 문예적 욕구에 기반해 자주적인 대중조직으로서 노동자들의 정서를 드러내고 창작과 보급의 유통체계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문화패에서 문선대로, 후퇴

98년쯤인가 노동문화일꾼 수련회를 했을 때 전국에서 약 400여명의 문화패, 문화단체들이 모였었고, 그 때 일이년 후에 1000명 수련회를 성취해보자는 결의를 했었는데, 당연히 아직 1,000명 수련회는 열지 못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은 여전히 그 꿈을 꾸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 목표가 가능하려면 산별시대에 맞게 지역별 거점을 만들고 단사의 벽을 넘어서는 지역문화활동을 통해 다시금 노동문화를 세워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90년대 중반 노래패들에게 가장 많이 불린 노래, <가자 노동해방>을 감상할 것입니다. 이 곡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고, 둘 다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 <철의 사나이(Czlowiek z Zelaza)> 포스터
폴란드 영화 ‘철의 사나이(Man of Iron)’(1981년, 안제이 바이다 감독) 삽입곡이고, 여기에 지금의 가사를 붙여 <가자 노동해방>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한 단체는 부산 [노동자문예창작단](이하 노문창)입니다.

90년대 초, 아주 선동적인 집체극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한동안 순회공연을 하며 많은 이들의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이 후 [바리케이트]라는 음반을 발매하고, 그 속에 선동멘트와 함께 수록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 급부상하기 시작한 노동자 율동패에게는 특히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대합창 편성이 나온 후에도 율동패들은 주로 노문창 버전으로 공연을 하고 다니곤 했습니다.

또 하나의 버전은 꽃다지에 의해 발표된 대합창 편성인데, 95년 봄 [노동가요공식음반]에 수록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인기에 비해 현장에서 다함께 부르기 어려운 편성 탓에 대중적으로 불렸다기보다는 노래패를 중심으로 공연 때 주로 불렀습니다.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빠르기가 계속 변하는 때문에 악기를 각각 녹음할 수가 없어서, 이 노래에 완전히 매료된 당시 녹음실 엔지니어의 지휘에 맞춰 전체 악기들이 녹음실에 모두 들어가 동시에 연주하면서 한 번에 녹음을 했습니다. 이 두 개의 버전은 각각 너무 의미가 있고 인기도 있었던 터라 선택을 하기가 참 어렵군요. 그래서 오늘은 두 가지 버전을 모두 들려드리겠습니다. 

<가자! 노동해방>

 

                                          폴란드 곡, 노문창 작사

 

아흔 아홉번 패배할지라도 단 한번 승리 단 한번 승리
바리케이트 넘어 저 너머 마침내 노동해방
멈출 수 없는 우리의 투쟁 아무도 우릴 막을 수 없어
노동자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
위대한 노동 그 억센 주먹 기계를 멈춰 열어라 역사를
피 묻은 깃발 노동자 군대 가자 노동해방

 

*음원출처 1 : [노동가요공식음반 2] 중에서 꽃다지 합창
*음원출처 2 : 부산 노동자문예창작단 [바리케이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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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7 - 청계천 8가

 

문제곡에서 인기곡으로 <청계천 8가>
[노래이야기⑰] 공안정국 사전심의…가사 곳곳에 빨간 줄
 
 
 

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각 조직들은 내부 상처를 추스르면서 변화된 시대에 맞춰 새로운 방향 모색을 시작합니다. 문화예술운동의 전국조직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여 제도 영역으로 진출하면서 외연을 넓히고 기존 문화운동의 바람막이 역할을 자처하였고, 노동자문화운동을 주도해 오던 연합조직들은 93년~94년 사이 각기 다른 내부 논의를 통해 해산을 합니다.

노래단체들도 제각기 자기 대중 기반을 만들어가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며 지역 대중들과 만나고, 또 노조를 통해 각기 다른 정서의 조합원 대중들을 만나게 됩니다.

 

천지인과 희망새

90년대 초부터 상대적으로 노조운동이 다소 위축되긴 했지만 전노협에 대기업 노조와 사무전문직 노조들이 속속 결합하면서 대공장 남성 노동자 중심의 투쟁하는 노동자에서 보건의료, 사무전문직 등의 다양한 노동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전처럼 하나의 정서, 하나의 이슈로 노동자 대중들이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게 됩니다.

 

   
  

이전처럼 전국을 휩쓰는 노래는 잘 창작되지도 않았고, 노래가 창작되어도 제각기 다른 정서와 연령대, 다양한 노동자들 모두를 공감시키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노래는 더 다양해지지만 그 이전과 같은 대중세를 갖지는 못합니다.

그 즈음의 다양하게 분화되어가던 활동 중에 두드러진 건 ‘천지인’과 ‘희망새’의 등장입니다. 민중록그룹을 표방하며 천지인이 결성되었고, 통일운동의 자기 정치색을 드러낸 희망새가 결성이 되어 음반을 발매하면서 각기 다른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지요.

희망새는 정치적인 색채와 발성으로 논란이 되긴 했으나 애초부터 지향을 명확히한 출발이라 일정한 집단에서 수용되었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천지인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민중가요, 노동가요의 형식에 대한 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노동자노래단을 거쳐 꽃다지에서 활동을 하던 <누가 나에게…>, <열사가 전사에게>의 작곡자인 김성민이 꽃다지를 그만두고 나가 결성을 한 것도 그랬고, 또 록이라는 형식에 대한 선진적인 노동자대중들의 반발과 비판은 엄청 완강했습니다.

특히 <열사가 전사에게>의 천지인 버전은 열사의 정신을 왜곡했느니, 노래를 망쳐놨다느니 하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과거나 이 후의 논쟁처럼 특별한 결론이나 장르에 대한 발전적인 모색 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노래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합법음반 발매

한 편으로는 노동가요가 투쟁의 현장에서만 불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일상의 공간에서 함께 향유하고 즐겨야 하고, 이를 위한 노래들도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에 따라 꽃다지도 93년 겨울, 기존의 집체극 형식의 대규모 공연에서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공연을 1주일간의 콘서트를 시도하였고, 수용자들을 조직하는 후원 모임도 결성하게 됩니다.

이는 일상에서 노동자 대중들을 투쟁의 정서만이 아닌 일상의 정서로 조직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꽃다지는 합법음반을 준비하여 발매를 합니다. 합법음반이라 함은 제도권에 공식적인 등록을 하고 심의를 거쳐 음반을 제작하여 레코드점에서 판매가 가능하고, 또 방송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침이슬>이 민중가요로 세대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곡 자체가 좋아서도 있지만 이미 음반으로 발매되어 소장하고 있거나 방송에 나왔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십, 수백만이 부르는 노동가요도 그러한 반열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음반 사전심의에서 거의 대부분 곡에 밑줄이 그어진 채 되돌아 왔습니다. 붉은 줄이 그어진 부분의 가사를 수정하라는 지시와 함께 말입니다. <누가 나에게…>에서는 ‘어느 새 적들의 목전에…’를 ‘저들의 목전에’로 한 글자만 바꿔달라고 했으나 <단결투쟁가>는 하도 밑줄 친 곳이 많아서 노래가사를 아예 다시 써야만 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이미 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전혀 다르게 수정해서 음반에 싣는다면 그건 <단결투쟁가>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한 글자도 수정할 수 없다고 버티며 무작정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 심의위원회 쪽에서도 완강하게 나왔지만 결국은 그 시대의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전곡을 가사 한 자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켜 줄 수밖엔 없었습니다.

 

청계천은 변했지만

그리하여 94년 5월, 노동가요로서는 처음이라 할 수 있는 꽃다지 합법음반 1집이 한국음반을 통해 발매되었고 전국의 레코드점에도 진열이 되고, 라디오에서도 <단결투쟁가>가 흘러나오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레코드점에 음반이 꽂혀있다고 꽃다지나 노동가요를 모르는 사람들이 음반을 사지는 않았으며, 방송에도 초기에 좀 나오다가 94년 여름이 지나면서 공안정국으로 다시 회귀하자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더군다나 방송에 나오는 것을 의식한 부드러운 편곡으로 노동가요의 질감을 희석시켰다는 비판도 받았구요.

이번에는 이 시기에 논란이 되었던 노래들 중에서 천지인 1집에 실렸던 <청계천 8가>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들어보면 그 당시에 왜 이런 노래들이 논쟁거리가 되었는지 참으로 이해가 잘 안 가실 겁니다. 이미 9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인기곡 반열에 오른 노래이고, 아주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기도 하니까요. 청계천의 모습도 그 때와는 달라졌지만 이제는 그 당시 논쟁과 무관하게 즐겁게 감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청계천 8가>
                                           김성민 글, 곡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한
땀 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 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서린 리어커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 부부 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 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 새 텅빈 거리여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워~워~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음원 출처 : [천지인 1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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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엄청난 속도로 2010년이 지나간 것 같다.

어떤 일을 떠올리면서 2010년의 일인지 2009년의 일인지 헛갈릴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앞만 보고 달려온 건 아닌가, 소중한 것들을 순간 놓치고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에 잠시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절대 놓지 말고 살아야한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는데

나는 또 2010년 한해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을 실망시키고 아프게 했을까?

또 더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쓸데 없는 내 고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진 않았을까?

나에게 아직도 열정과 신뢰가 솟아오르고 있을까?

 

2011년이 밝았다. 이제 또 새로운 시작이다.

올해는 무엇을 다짐하며 시작할 것인지 생각도 못하고 맞이해 버렸다.

힘들때마다 떠올렸던 기억들, 다짐들...

그것이 나에겐 힘이고, 또 희망이지.

그 속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내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보다 나를 더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좀 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을 기획하고 살아야지.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살아야지.

다시 태어나도 이길에 있었을 거라는 믿음, 되뇌이며 살아야지.

내 기억속에 있는 이들, 혹은 이제 그 기억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이들도 많겠지만

모두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길 기원해본다.

 

2011년 새해..

더 힘차고 치열하고, 또 즐겁고 신나게...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한 바 이루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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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연재 16 - 민들레처럼

 

인기 노동가요 1위곡은?
[노래이야기⑯] <민들레처럼> 행진곡풍 퇴조와 서정성 선호
 
 
 

95년 가을, 민주노총 출범을 앞두고 노동가요 공식음반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민주노총의 건설 경로에 대한 몇가지 이견이 있었지만 어찌되었던 민주노총 출범을 앞두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을 보면서 몇몇 기획자들과 문화활동가 안에서 이 시기 노동가요를 한 번 정리하고 갈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전노협 문화국과 함께 전문가들로 '노동가요 공식음반 제작위원회'가 구성이 되었습니다.

 

노동가요 공식음반 제작위원회

곡 선정을 위해 내부에 선정위원회가 꾸려졌고, 기존의 곡 중 설문을 통해 선정된 노래 반, 공모를 통해 수집된 신곡 반, 이렇게 방향을 잡았습니다. 신곡은 창작공모를 통해 심사하여 음반에 수록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대중적 공모와 함께 기존 노동가요 작곡자들에게 노동가요 전망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곡 작업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기존 곡에 대한 설문은 노동자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노래 100곡을 우선 선정한 뒤, 노동자들의 집회현장에서 무작위로 배포한 뒤 수거된 800여부의 내용을 수렴하였지요. 설문의 항목은 예시로 제공된 100곡 중에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노래, 가장 많이 불린 노래,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이런 항목들로 다양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 <민들레처럼>은 꽃다지 1집 앨범 수록곡이다
그 결과 가장 많이 알고 있고, 또 불린 노래로는 <단결투쟁가>와 <철의노동자>가 공동 1위를 했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민들레처럼>과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그리고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민들레처럼>과 <전화카드 한 장>이었답니다.

물론 이 설문 결과만으로 선곡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 활발하게 활동을 했던 노동운동의 주체들이 필요에 의해 즐겨 부르고, 또 그 당시 직접 접하면서 인기를 얻은 노래들을 중심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내포한 설문조사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선정위원회에서는 낮은 순위를 차지했더라도 80~90년대 초반 노래운동과 노동문화운동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는 <노동의 새벽>, <고백>, <불나비> 등을 포함해서 대표곡들을 선정하게 되었답니다.

 

상처와 패배 그리고 반성

그런데 이렇게 설문결과로 나온 인기 순위나 인지도면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한 노래들은 대부분이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 노래들인데, 그 중 서정가요라고 분류되던 노래들이 아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 노동가요는 흔히 투쟁의 현장이라고 하는 집회나 파업을 통해 불려 보급되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투쟁가를 중심으로 노동가요를 이해했고, 또 인기곡으로 선정된 이러한 서정가요들이 나오게 된 배경은 상처와 패배, 반성이었다는 면에서 보면 의외일 수 있다는 거지요.

앞서 몇 차례 언급한 것처럼 87, 88년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된 민주노조와 노동운동 진영의 급성장은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자본과 권력의 엄청난 물리적 탄압과 이데올로기 공세에 주춤하기 시작합니다.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이 육해공군 상륙작전이라 표현되듯 군사력을 동원한 탄압에 80여일 만에 내려오고,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의 의문의 죽음을 보면서 참으로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이전까지도 많은 탄압이 있긴 했지만 공권력 투입, 대량구속, 자본철수, 공장이전 등 노동운동의 탄압이 정말 엄청나기도 했고, 또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노동가요에 있어서도 91년 상반기부터는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곡이 주춤하게 됩니다.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퇴조가 뚜렷해지고, 일상가요도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가장 많이 불린 노래들, '철의 노동자, 단결투쟁가' 등

워낙 긴밀하게 결합해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었겠지요. 단결, 투쟁, 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은 선 굵은 투쟁가의 호소력이 떨어지고, 또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중에도 많이 불린 노래는 <철의 노동자>,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등인데, 이들 노래는 구체적인 투쟁의 주장보다는 당당하고 멋진 노동자의 인간상을 그려냈다는 점이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노동가요 창작자들은 91년 하반기부터 노래의 내용과 정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생산하게 됩니다.

주로 슬픔과 절망에 대한 위로, 노동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지나간 2~3년 동안 투쟁을 반추하면서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나가는 의지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비해 투쟁가요들이 바로바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장도 줄어들어, 창작자들은 노동자의 에너지에서 곡에 대한 소스를 받기보다는 이제는 스스로들이 노동자들의 정서를 북돋아 가고자 했습니다.

매일을 파업과 집회현장에서 보내다가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도 생겨 연습실에서 함께 술을 먹으며 토론을 하기도 하고, 같이 아파하기도 하면서 창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다들 창작에 몰두하다보니 연습실에서 집단 합숙을 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이나 샤워시설이 부실한 연습공간에서 살다보니 다들 머리에 떡을 이고 있거나(머리를 오래 감지 못했을 때 기름기에 의해 머리가 달라붙는 현상을 말함), 양말을 세우는 진기록들을 수립하기도 했답니다. 또 부엌 전체를 맥주병으로 빽빽하게 메우는 설치미술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고요. 그 당시 단체들은 대부분 공동체 생활을 했고, 작업을 할 때는 서로가 서로의 문선대 겸 술 친구가 되어주곤 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개인 느낌 강해지고, 내면으로 깊숙이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들이 <민들레처럼>, <사람이 태어나>,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이고, 또 그 외에도 <희망의 노래>,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등이 그 시기에 창작된 대표적인 노래들입니다. 이런 노래들은 이전의 노래들보다는 더 개인의 느낌이 강해지고, 개인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왔으며, 더 섬세해진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즐겨 부르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꼽힌 <민들레처럼>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이 노래가 자신의 애창곡이라고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무척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흥얼흥얼 따라서 같이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민들레처럼

                                           박노해 시, 조민하 곡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할 저 투쟁의 길에
온 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 음원 출처 : [노동가요공식음반](95년 발매, 노동가요공식음반제작위원회) 중에서 꽃다지 가수 곽경희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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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5 -전화카드 한장

 

“상처입은 이들을 위로하던 그 노래”
[노래이야기⑮] <전화카드 한 장>…정파로 갈린 노래와 상처들
 
 
 

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낸 민중운동 진영에서는 대선 때 백기완 후보를 밀었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다시 5년이 지나 92년 다시 대선을 맞아 민중운동 각진영에서는 87년 평가를 근거로 대선정국에 대한 여러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러면서 또 입장들이 나뉘게 됩니다.

뭐 예전부터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규정짓는 시각에 따라 여러 이론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정파들이 분리되기 시작한 건 아시다시피 86년 즈음으로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정파들의 갈등이 증폭된 건 아마도 92년 대선 때였던 것 같습니다.

 

92년 대선과 정파의 분화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결국 대중관과 예술관의 차이로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대중실천의 방식과 문화도 당연히 다를 수밖엔 없습니다. 운동이 급성장하던 87년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주요한 당면 사안에 단일한 대오로 집결해서 투쟁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크게 문제로 대두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92년 대선은 조직을 분열시키기도 했고,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각 단체들은 대선을 맞아 내부 토론을 치열하게 진행했습니다. 어떤 단체는 양쪽으로 다 이름을 걸고 양쪽 문선에 다 결합하고 대선 후에 다시 모여 평가하자하여 양쪽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어떤 단체는 공식적으로는 어떤 정치적 선택도 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알아서 각자 선택하고 실천하기로 했고, 또 어떤 단체는 내부에서 한쪽으로 입장 통일을 하고 공식적으로 결합해서 활동을 하기도 했고요.

어떤 입장이었든, 한 단체가 동일한 입장으로 함께 움직이고, 그 선택이 승리한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조직은 대선 이후 한쪽 입장을 선택한 사람들이 대거 탈퇴를 하거나, 아예 단체를 해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노래로 보면 대학생들이 주로 부르던 노래와 노동자들이 주로 부르던 노래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시기와 사안에 따라, 그리고 불러지던 시공간에 따라서 노래들이 선택되어지던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 이 노래를 부르면 안되나"

전대협이 출범 후 90년 즈음부터 대학생들이 주로 부르는 전술가요들이 급격히 많아지면서 더욱 그 차이가 드러나긴 했지만, 대규모 집회나 연합공연에서 애창되던 노래들은 또 같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가사만 보면 ‘아, 이건 어떤 정파의 노래구나’하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는 노래도 있었고, 또 애초에 의도적으로 창작된 노래도 있었지만 그렇게 구분 짓던 많은 노래들은 정파적 입장이나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노래는 집단의 문화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게 당연할 경우도 있지만, 이미 많은 대중들에게 정파를 뛰어넘어 불러지던 노래들조차도 어떤 시기를 만나 색깔 논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결국 어떤 집단에게는 외면당하고 말았던 것 이지요.

반미나 민족, 통일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는 NL쪽 노래로, 민중, 노동자, 노동해방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는 PD쪽 노래로 무조건 구분하던 때였습니다. 그 즈음 대학 초청공연을 갔는데, 대학 노래패에 갓 들어왔다는 신입생이 뒤풀이 때 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노래책을 펴놓고 노래를 배우고 부르던 중에 자기는 <서울에서 평양까지>란 노래가 참 좋아서 종종 동아리 방에서 불렀더니 선배들이 그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했다며, 왜 이 노래를 부르면 안 되냐고 말입니다. 결국 그 친구는 노래패를 그만두었더군요.

 

"노래가 불쌍해"

그 뒤로 몇 년간 대학 공연을 갈 때마다 어떤 노래를 꼭 불러달라거나, 어떤 노래는 절대로 부르면 안 된다는 요구를 받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심지어 <동지>라는 노래도 부르지 말라는 곳이 있을 정도로 -그 노래가 뭐 어떻다는 것인지- 노래 하나하나에 대해 색깔을 입히고 선곡안을 사전 검열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 지난 13일 상상마당 LIVE HALL에서 열린 꽃다지 콘서트 (사진=오명록)

그럼에도 꽃다지는 한총련 출범식 초청공연 때도 <가자 노동해방>과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을 같이 부르곤 했습니다. 물론 꽃다지에 대해서도 예울림은 NL이었고, 노동자노래단은 PD여서 두 단체가 통합된 곳이니까 중립(?)이거나 양다리라고 평가한 분들도 계셨겠지만요.

통합 이전에도 노동자노래단의 어떤 노래를 놓고, 1절은 PD, 2절은 NL이라고 했던 분들도 계셨구요. 아주 심하게는 통일 싫어? 노동해방 싫어? 이렇게 표현하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으니, 이쯤 되면 정파가 정치적 입장과 정책, 전술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수준이 되어 버리지요.

재밌는 실화로, 집회 때 마스크나 김밥을 파시는 분들까지도 무엇으로 집단을 구분하는 지 파악을 하셔서는 한쪽 집단에 가서는 “노동해방 마스크(혹은 김밥)있어요”라고 하고, 그 집단을 지나 다른 집단에 가서는 “조국통일 마스크(혹은 김밥)있어요”라고 하셨답니다.

마스크나 김밥도 그 때 그 때 색깔을 입게 되던 때가 있었다니까요. 그래서 그 당시 노래들이 이리 불려지고, 저리 불러지다 누군가에 의해 외면당하는 것을 보고 노래평론가 이영미 선배가 “노래가 불쌍해”라고 표현했답니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던 그 노래
다시 돌아와서, 이 시기에 꽃다지도 30명 가까운 이들 중, 10여명이 탈퇴를 하거나 잠적을 하였고, 남은 이들도 상처투성이로 스스로를 추스르기도 어려웠습니다. 당시 대표를 맡았던 조민하 선배도 책임을 느끼고 사임하고, 조직의 지도부라 했던 이들도 파견을 명목으로 밖으로 나가있거나 휴가라는 이름으로 잠수를 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그 해의 계획도 목표도 쉽게 세워지지 않았고, 모두가 의기소침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민하 선배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옛 동지로부터 얼굴 표정이 안 좋다며, 언제든지 힘들면 전화하라고 건네받은 전화카드를 들고 들어와 밤새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바로 <전화카드 한 장>입니다.

대선 이 후 상처받은 많은 이들을 위로했던 노래,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부르던 노래, 그리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했던 노래, 전화카드를 선물하는 운동권의 유행을 만들었던 노래 <전화카드 한 장>을 들어보겠습니다.

노조나 단체 활동가들은 대부분 상처투성이이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겠지요. 내 마음의 상처를 보듬으며, 내 동지의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같이 따라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전화카드 한 장
                                             조민하 작사, 작곡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말 한마디 다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음원 출처 : 꽃다지 비합음반 2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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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4 - <철의 기지>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의 상징 <철의 기지>
[노래이야기⑭] 노래패 '새벽'의 변화…대중 속 민중가요의 변화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노래모임 ‘새벽’의 <철의 기지>입니다. 이 곡은 현대중공업 투쟁을 형상화한 노래인데, <저 평등의 땅에>, <선언 1, 2>, <노동자의 노래> 등을 작곡한 류형수의 곡입니다. 류형수는 85년부터 메아리 활동과 새벽활동을 같이 했고, 새벽 후반부에 꽤 비중있는 역할을 했으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도 활동을 했습니다.

 

   
  ▲ 1990년 현대중공업 크레인 투쟁 모습
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가요와 민중가요를 향유할 대중적 공간이 급속히 확장되면서 다양한 전문노래단체들이 속속 등장하게 됩니다.

노래모임 ‘새벽’이 84년에 제작한 합법음반 노래를찾는사람들(이하 노찾사) 1집을 모태로 하여 전문노래단체를 결성하여 합법적 대중공간으로의 적극적 진출을 모색하였었고, 87년 10월 첫 공연을 성공리에 치루면서 노찾사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민중가요, 민중 속으로

가수나 연주자들도 새벽 출신들이 중심이었고, 주요 레퍼토리도 기존 새벽의 창작곡이면서 대학가 인기곡이었던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 <그날이 오면>, <이 산하에>, <사계>, <대결> 등과 공연용으로서는 좋은 기존 노래인 <오월의 노래>, <부서지지 않으리>, <맹인부부가수> 그리고 새로이 창작된 <저 평등의 땅에>, <뒤돌아 보아도> 등이었습니다.

이들 노래는 노찾사로 인해 인기를 모으면서 민중가요의 풍부한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와 같은 새로운 인기곡을 만들어내기도 했지요. 노찾사는 그 후 몇 년간 공연이 성공을 하였고, 89년 발표한 2집 음반은 50만장 이상 판매되었을 뿐 아니라 대중가요 인기차트 7위권 안에 들기도 했답니다.

이처럼 대중공간이 열리고 민중가요 수용자 층이 확대되면서 지역 노래모임이었던 성남 노래마을도 적극적으로 대중공간으로 진출하였고, 진보적 고급 음악인들의 모임인 민족음악연구회도 국악과 고급 음악적 요소들을 민족적 음악언어로 재창조하는 새로운 유형의 창작곡들을 발표하면서 대중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흐름은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에서도 활발히 전개됩니다. 다양한 노래집단들이 생겨나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활동을 펼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울에 비해서는 양적 역량이 떨어지고, 또 지역 간 편차도 많은 실정이었지요.

마산 ‘소리새벽’, 안양 ‘새힘’, 부산 ‘노래야 나오너라’, 광주 ‘친구’, 인천 ‘노래선언’ 등은 대개 노동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창작곡으로는 소리새벽 김봉철의 <들어나봤나>, 새힘 이건의 <달동네의 부푼 꿈>, 희망새 김민하의 <아침은 빛나라> 등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변화를 꾀한 민중노래패들

특히 광주 노래패 ‘친구’, ‘우리소리 연구회’의 성과는 상당히 독특합니다.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민요의 적극적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 외에도 개인들의 활약이 돋보이기도 했는데, 대학가의 인기 창작자로 윤민석과 박종화를 들 수 있습니다.

윤민석은 <반미출정가 1>, <어머니>, <전대협진군가>, <결전가>, <백두산>, <애국의 길>, <전사의 맹세1,2> 등의 많은 노래를 창작하여 당시 결성된 전대협을 중심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박종화 역시 광주를 중심으로 <지리산 2>, <바쳐야 한다>, <파랑새>, <투쟁의 한 길로> 등이 인기를 얻어 전국적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 빼놓을 수 없는 흐름 중 하나가 노래모임 새벽의 변화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87, 88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노래운동 진영은 예측과 대응을 하지 못했고, 혜성처럼 나타난 김호철의 창작곡들이 노동자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불리는 것을 보면서 당혹감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시기까지 노래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어오던 중요한 주체로서 노래모임 새벽은 내부적으로 많은 고민을 했겠지요. 87년까지 <이산하에>,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만주출정가>,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창작과 비합법 테이프 제작으로 민중가요의 흐름을 주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꾼의 합창>, <내일의 노래> 등으로 노동자 대중으로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노래모임 새벽의 흐름이 88년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변화하게 됩니다.

<너를 위하여>, <선언 1>, <선언 2>, <오월의 노래 3>, <노동자의 노래>, <불꽃이 되어>, <철의 기지>, <바리케이트>등을 발표하면서 민중가요의 폭을 넓히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대중들의 음악적 취향과 관행들에 부합하지 못했고, 따라서 당시에는 현실적으로 노동자 대중, 학생대중이 향유할 수 있는 대중적인 노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새벽'의 자기 변화와 음악적 모색

90년에 들어 노동가요의 경향이 완전히 정착하자, 자신들의 창작곡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면서 새벽은 기존 노동가요의 경향을 대폭 받아들인 <해방을 향한 진군>, <다시 또 다시>등을 창작하여 발표하기도 했답니다.

지식인적이라는 한계가 있긴 했으나 80년대로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노래운동의 중심에서 이렇듯 끊임없이 자기 변화와 음악적 모색을 해왔던 노래모임 새벽의 활동과 창작곡들은 가히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의 기지>
                                                                            류형수 작사, 작곡

무쇠바람부는 울산의 하늘아래선 육천의 전사들이 태어났다.
흩어질 줄 모르며 그들은 지칠 줄 모르며
그들은 배신할 줄 모르며 그들은 머무를 줄 모르는 그들은
자신을 가두었던 철의 감옥을 거대한 화로로 녹여 자신을 지키는 요새로 만든다.
무엇을 얻었는가 그대, 자유와 평등과 그대의 벗들
무엇을 잃었는가 그대, 폭력과 구속과 나약한 환상
무엇을 얻었는가 그대, 무엇을 잃었는가 그대
그대 철의 기지 철의 용사여

 

* 음원 출처 : 주간노동자신문 주최 노래한마당 공연실황 [우리노동자] (1989년) 중에서 노래모임 ‘새벽’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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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3 - 단결투쟁가

 

완성도 1위의 명곡 <단결투쟁가>
[노래 이야기⑬]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1989년 말인가 90년 말인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소위 고급음악계의 진보적인 몇몇 작곡가겸 교수들이 모여 80년대 민중가요 중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노래 10곡을 선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1위로 선정된 노래가 <단결투쟁가> 였습니다. 80년대의 주옥같은 서정가요와 스케일 있는 대곡들을 다 제치고 노동자 투쟁가요인 <단결투쟁가>가 1위를 차지한 건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1위로 뽑힌 <단결투쟁가>

하지만 수백만이 부르며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를 선언했던 가사 뿐 아니라 우리말과 음의 조화, 악곡의 완성도 측면에서 가장 명곡으로 꼽힌 것은, 어쩌면 김호철 개인의 성과가 아닌 노동자 대중 모두의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단결투쟁가>는 88년 발간된 백무산의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에 실린 '전진하는 노동전사' 등의 시구를 가사말로 하여 창작된 노래입니다. 백무산 시인은 노동자 시인으로 박노해와 더불어 노동가요에 많이 등장을 하지요. <장작불>과 <사랑노래>도 백무산 시를 가사로 한 곡입니다.

1987~88년 전국을 휩쓴 노동자 대투쟁. 이를 통해 사업장마다 민주노조가 세워지고, 지역별협의회들이 결성됩니다. 그리고는 민주노조의 전국적 구심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를 위해 1989년 겨울, 서울지역노동자문예운동단체협의회(서노문협) 소속 문화단체를 중심으로 집체공연이 제작되었습니다. 전노협 건설을 위한 노래판굿 꽃다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시작해 몇 개 지역 순회공연을 하고 1990년 전노협을 건설하게 됩니다.

이 연합공연은 그 이후로도 몇 년간 해마다 가을이면 노동운동의 주요한 이슈를 주제로 각 장르별 창작성과를 집약해서 이어가는 새로운 공연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쏟아져 나온 노동가요

1990년 1월 22일, 경찰의 봉쇄로 수원 성균관대로 장소를 옮겨 전노협이 창립되었고, 이날 노동운동을 위시한 기층민중운동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자본과 권력은 기만적인 보수 대연합인 3당 야합을 선언했지요. 그리고 이런 보수대연합에 배신감을 느낀 진보진영의 총단결과 연대를 촉구하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자 우리 손을 잡자’라는 연합공연이 90년 3월 24일에 열립니다.

 

   
  ▲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 (사진=한내)

때문에 봄이면 음악 중심의 범 진보진영의 연대를 위한 연합공연 ‘자 우리 손을 잡자’와 가을이면 노동운동의 핵심적 이슈를 집체공연으로 형상화하는 ‘노래판굿 꽃다지’가 열려 새로운 노동가요를 보급하기도 하고, 대중적으로 검증된 노래들을 대중들과 함께 부르기도 했답니다.

대학 신입생이나 신규조합원들을 교육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그 시기 부문운동의 이슈들이 망라되는 선전, 선동의 장으로, 또 수 만 명이 모이는 문화집회의 장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자리입니다.

노동가요도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지요. 아무래도 투쟁이 고조되는 시기다 보니 행진곡풍의 투쟁가요가 주도하긴 했지만 광범위한 민주노조의 설립으로 노동가요를 부를 수 있는 일상공간이 창출되었고, 일상가요와 서정가요라는 새로운 종류의 노래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노래들이 창작되어 불리게 된 것이지요.

<포장마차>, <사랑과 행복>, <진짜 노동자3>, <참사랑>, <부모님께>(이상 김호철), <내가 왕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이상 윤민석), <달동네의 부푼 꿈>,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이상 이건), <내사랑 민주노조>, <우리들의 사랑>(이상 조민하) 등이 이 시기에 창작되어 불린 일상가요들입니다.

 

노동자노래단과 예울림

이러한 노래들은 <사노라면>, <불나비>의 뒤를 이으면서 노동자의 일상체험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은 투쟁적 낙관성, 역동성과 상호 전환하고 상생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이 시기의 일상가요들은 여태까지는 민중가요에서 잘 쓰지 않았던, 뽕짝과 스탠더드, 속화된 포크의 영향을 받은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노동자노래의 관행을 만들어갑니다. 이는 노동대중의 노래 문화적 관행 때문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또 90년을 전후한 이즈음 <전노협진군가>, <구속동지 구출가>, <무노동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이상 김호철), <연대투쟁가>(윤민석) 등 당시의 전술적 투쟁과제를 담은 전술가요가 출현한 것도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전노협 결성으로 최고조에 오른 노동조합운동은 자본과 정권의 어마어마한 물리적 탄압에 부딪혀 상대적으로 주춤하게 되고, 이전에 비해 파업과 집회의 수는 줄어들게 됩니다. 이 시기 노동가요를 창작하고 보급하는 서울의 두 단체, 즉 ‘노동자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은 그 전까지 하루에도 서너 건씩 다니던 지원공연의 숫자도 줄어들고, 비슷한 위상을 가진 두 단체가 서노문협 산하에 따로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간을 각각 유지하기도 쉽지 않고, 또 노동자노래단은 연주단이 부족하고, 예울림은 가창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노래판굿 ‘꽃다지’를 계기로 두 팀이 같이 공연을 다니거나 서로 가수나 연주자를 꿔주기도 했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가능했던 것이지요.

 

<단결투쟁가> 대합창 편성

1991년부터 통합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하기에 이르렀고, 그간 두 단체의 음악적 성과를 집약하고, 확대하는 합동공연을 해보면서 통합 여부를 판단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올린 공연이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땅, 아름다운 노래’라는 제목의 합동공연입니다.

1991년 12월 말, 중앙대학교 대학극장에서 이틀간 진행된 이 공연에 가수 15명과 연주자 7명이 무대에 서려니 자연스럽게 곡의 구성을 대합창곡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보게 됩니다. 이 때 발표된 <단결투쟁가> 대합창 편성은 두고두고 많은 문화패들에게 전수되기도 하였고, 몇 년간 대합창 편성을 유행시켰으며, 노동자들의 투쟁의 거대한 물결과 함성을 잘 드러낸 편곡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답니다.

물론 저희는 그 공연이 끝난 뒤풀이 자리에 서노문협 송년회를 겸하는 바람에 100만 원이 넘는 뒤풀이비 만큼 적자를 봤지만요. (그 당시 김치찌개 안주 1그릇에 2,500원이었고, 소주나 막걸리도 5~600원 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먹은 거지요^^)

결국 서로의 음악적 성과들을 집약하는 과정에서 활동방식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보다 폭넓게, 다양한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기대 속에 두 단체는 통합하여 92년 3월 꽃다지를 창립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수백만이 목 놓아 부르던 80년대 최고의 명곡을 노동자 대투쟁의 모습을 음악적으로 잘 형상화했다는 찬사를 받은 대합창 편성으로 들어보겠습니다.

<단결투쟁가>

백무산 시 / 김호철 글,곡 / 편곡 신양묘

1.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피맺힌 가슴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백골단 구사대 몰아쳐도 꺾어 버리고 하나 되어 나간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 뿐이다.

2. 수천의 산맥 넘고 넘어 망치되어, 죽창되어
적들의 총칼 가로막아도 우리는 기필코 가리라
거짓 선전 분열의 음모 꺾어 버리고 하나 되어 나간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마침내 가리라 자유와 평등 해방의 깃발 들고 우리는 간다
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 뿐이다.

*음원출처 : 꽃다지 합법음반 1집 [금지의 벽을 넘어 완전한 자유를 노래하리라!] (1994년 5월 발매, 한국음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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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2 - 철의 노동자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래이야기⑫]80년대 노동운동 현실 반영한 <철의 노동자>
 
 
 

<철의 노동자>는 안치환의 곡으로, 90년 영화 [파업전야]를 통해 대중들에게 발표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투쟁가요들이 김호철의 창작곡이었던 상황에서 영화의 인기를 타고 노동자대중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하여 95년 노동가요에 대한 인식과 인기도 설문조사를 통해 <단결투쟁가>와 함께 가장 많이 불린 노동가요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가수 안치환은 연세대학교 중앙노래패 ‘울림터’ 출신으로 노래모임 새벽을 거쳐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가수겸 창작자로 활동을 하다가 90년 솔로로 독립을 했습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가요제 출전이 목표였던 안치환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울림터’ 선배의 노래실력에 반해 민중가요 서클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을 접하게 됩니다.

초기 진달래 가요제, 무악가요제 등에서 창작곡으로 참가하기도 하면서 대학 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다 86년 구속된 선배를 생각하며 당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노동자 시인 고 박영근의 시를 개작하여 <솔아 푸르른 솔아>를 창작하면서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제주 4.3 항쟁을 노래한 <잠들지 않은 남도>, 이한열 열사 추모가인 <이한열 추모가>와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게 됩니다. <솔아 푸르른 솔아>는 87년 총학생회장 선거 때 우상호 후보 진영의 참모 한 명이 유세 때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면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80년대 후반 ‘노래를찾는사람들’ 음반에 수록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불리게 됩니다.

 

<철의 노동자>를 <전대협 진군가>로 착각

안치환은 ‘노래를찾는사람들’에서 활동을 하면서 김수영 시에 곡을 붙인 <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여 ‘제2의 김민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철의 노동자>는 파업전야의 삽입곡을 제안 받고 영화 스토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제철 공장을 견학한 후에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당시 <파업전야>는 80년대의 아주 열악한 노동조건,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의 위장취업, 노조 결성, 해고, 구사대 등장과 같은 현실을 반영한 영화로 영화의 내용이 파업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법으로 순회상영을 했습니다.

대학 상영회 때조차도 공권력이 들어와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기도 했고, 장소를 옮겨 상영하는 등 악조건 속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는 전대협이 결성되어 학생운동의 전국적 조직도 결성되었고, 윤민석의 <전대협 진군가>가 학생운동진영의 최고의 인기곡이었는데, 영화를 보던 학생들이 <철의 노동자>가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전대협 진군가>로 착각을 하고 모두 일어나 함께 불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곡 전체적으로 코드진행이 매우 유사하고, 후렴 시작 부분과 클라이맥스의 멜로디 진행이 거의 흡사해서 생긴 현상이기도 합니다. 물론 안치환은 이미 학생운동권이 아니었고, <전대협 진군가>를 모르는 상황에서 작곡을 했다고 하지요.

 

제도권 진입 성공한 김광석, 안치환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전문노래패들이 아주 많긴 했지만 전문노래패라고 해서 음악활동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습니다. 전업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었지요. 그래서 각자 창작을 하지만 꼭 누구의 노래라는 개념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전문노래패들은 노동가요를 보급하는 것이 더 큰 사명이라고 여겼으니까요.

먹고 사는 문제 역시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각자 집에 있는 자기 악기들을 가져와서 창작과 공연을 했고, 공연비를 받으면 그 돈을 모아서 악기를 사거나 연습실을 마련하기도 하고, 주머니를 털어 공간을 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지하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공연하고, 지방에 갔다가 밤늦게 올라오면 택시비를 아끼느라 연습실에서 술을 먹고 밤을 샜고 그저 끼니는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습니다.

제가 있던 단체에서는 제가 가수겸, 기획자 겸, 총무였는데 (그 당시엔 모두 몇 가지 일을 겸했고, 활동가라면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름 숫자 개념이 있었던 터라 활동비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매일 연습비 500원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날 500원씩을 받고 다들 일당 받았다고 하늘에라도 오를 듯이 기뻐하며 그 돈으로 술을 먹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 후에 월급제를 도입해서 기본급 10만 원에 3~5만원의 공연수당과 강습수당을 책정해 받기 시작했고, 파업과 대학 행사가 많은 3월~5월에는 어떤 단원은 50만 원 이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인 부분 뿐 아니라 음악활동에서도 전문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노동가요나 민중가요를 알려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노래를찾는사람들’ 출신의 가수 고 김광석 선배가 솔로로 제도권 진출에 성공을 했고, 그에 힘입어 안치환도 솔로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하지만 <철의 노동자>는 안치환의 노래보다는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에서 훨씬 많이 불렸습니다. 아마도 가사 중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사랑’ 하는 이 부분이 정말 노동자들의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이가 5,60대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노동조합을 결성했을 것이며, 무자비한 폭력적 탄압을 감수했을까요, 그야말로 비록 단 하루를 살더라도 정말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 아니었을까요? <철의 노동자>는 바로 그런 면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공감을 얻었고, 80년대 민중가요 중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고,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단결투쟁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철의 노동자>  

안치환 글, 곡

민주노조 깃발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으세
강철 같은 해방의지 와서 모여 지키세 투쟁 속에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껴보세
단결만이 살길이요, 노동자가 살길이요.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 사랑 단결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노동자

* 음원 : 전노협 제작, 전노협 노래모음 1집 [철의 노동자] 중 노동자노래단, 예울림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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