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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담구기 1

김치는 삼시 세끼 무엇을 먹던지 요긴한 반찬이며, 일용할 양식이고

냉장고에 김치가 가득차 있으면 언제나 든든한 마음의 양식이기도 하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양쪽 어머니가 김치를 싸주시기도 하지만

친정이고 시댁이고 어머니들 모두 음식하길 싫어하는 분들이라

우리집에 김치를 조달해주는 분은 아는 후배 어머님.

둘다 직장을 다니면서 집에선 밥을 잘 안먹고, 주로 외식을 하는 부부라

김치가 남으면 어머니께서 또 갖다주실 때 김치가 냉장고 가득 있으면 미안하다고

우리집에 종종 갖다주곤 했다.

그..런..데.. 그게 불규칙하기도 하지만 요즘은 종종 집에서 밥을 해먹는 덕에 우리집 냉장고엔 김치가 씨가 말랐다. ㅠㅠ

그리하여 재작년에 이어 올해도 김장을 담구기로 했다.

 

 

재작년에는 양수리에서 유기농 고추와 단호박을 하는 후배가 배추를 조금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를 하기에 겁 없이 찾아갔다.

누군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들고 요리를 한다지만 나는 그런 거 잘 못믿고, 봐도 잘 모르겠고...

예전 눈 동냥하던 경험을 믿고 무조건 양수리로 갔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후배는 트럭에 우릴 태우고 밭으로 갔다.

거기서 배추를 한 3~40개 쯤 뽑고 (걔들은 관리가 잘 안된건지 애들이 다 벌어져 있고, 좀 작았다.)

그 옆에서 갓도 좀 뽑고, 오는 길에 마늘도 좀 뽑고(캐고?)

어느 밭엔가는 가서 쪽파를 뽑은 후 돈을 내고,

지나는 길에 김장을 담구고 있는 어떤 집에서 절인 배추에 속을 싸서 막걸리도 한 잔 얻어 먹었다.

마지막으로 농협에 들러 젓갈과 고기를 좀 사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

한켠에서는 마늘과 쪽파를 까고, 집 주인들은 잠시 볼일을 보러 간 사이

그 유명한 신안 소금 푸대와 커다란 그릇과 배추를 놓고는 이걸 어떻게 절이나... 잠시 고민...

옆에서 거들어도 심부름하면서 버무리기나 했지 배추를 언제 절여 봤어야지...

일단 배추를 쪼개서 (그래도 생각엔 엎어 놓는 건 아닌거 같고...) 배추를 바닥에 한 판 깔고 소금을 뿌리고, 또 배추를 깔고 소금을 뿌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가 들어오신다.

 

 

뭐해? 나면엄마 없어?

(시골에서는 주로 누구 엄마 이렇게 부르는데, 아이가 없는 그집은 달리 호칭이 마땅치 않으므로 아이를 낳으면 엄마 라는 뜻으로 나면엄마, 아빠 라고 그집 부부를 불렀다.)

네... 잠깐 어디 갔는데...

뭐 하는거야?

네... 김장 좀 해볼라구요.

배추 절이는 거야?

네... 근데... 한 번도 안해봐서 이게 맞는건지...

에구머니... 이거 뭐하는 거야? 이러면 안돼.

왜요?

아이고, 배추를 물에 적셔서 해야지... 저렇게 소금만 뿌리면 그 자리만 까매져.

허걱!! 큰일났다. 빨리 다 꺼내!!

 

할머니는 한심하다는 듯 보시다가 손수 작은 다라에 물과 소금을 풀어 배추를 적셔 주셨다.

 

그리하여...

절인 배추를 기대하고 당일날 버무리며 막걸리 한잔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밤잠 설치며 들락날락 배추를 뒤짚고 어쩌구...

다음날 사과까지 갈아 넣고 갖은 양념을 하고 먹어보니 갓 향이 톡 쏘는 것이 아주 흡족한 김장이 되었다.

그리고 두 집에서 통에 나누어 집에 갔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같이 김장을 한 후배집에서는 어머니와 이모님이 열어서 드셔보시고는 싱겁다고 속을 다 털어내고 젓갈과 소금을 더 넣고 다시 버무리셨다는... ㅠㅠ

어찌되었든 우리는 그 맛있는 김장으로 겨울 한 철을 났으니...

그 기억을 못잊고 다시 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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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오이김치담구기

누구는 복(?)도 많아서 친정과 시댁에서 김치를 무한제공해주는 자가 있는 반면

나는 요리솜씨 별로 없는 두 엄마를 둔 덕에 (ㅎㅎ죄송 ^___^*)

김치구경은 거의 못하고 사는데,

안되면 말고, 있는 것으로 때우자는 주의를 갖고 있는 남편과 나는

복많은 후배네 어머님의 김치를 또 재분양 받아 얻어먹고 살았다.

뭐 주기로 한 날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주면 고맙고, 한동안 안주면 ㅠㅠ 할수 없지.

 

혼자 집에서 점심 한끼는 반. 드. 시. 면으로 때우는 남편은

나보다 늘 더욱 김치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 오이김치는 좀 쉽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오이김치 담구기를 시도했다.

부추도 함께...(부추 씻는 일은 아주 큰 일이지만...)

 

굳이 레시피도 필요없고, 계량컵도 필요없고,

오이를 썰어서 절인다음 (기양 맛보고 좀 짜다 싶으면 씻어 헹군다)

대충 집에 있는 고추가루 (분가할 때 시어머니가 싸주신 건지, 누구한테 얻은 건지 불분명한)와

마늘 (찧은 마늘은 시어머니가 항상 제공해주신다)  파 등등에다가

살짝 카나리액젖 (이건 왜,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다) 을 소심하게 뿌린 후

버무리고는 실온에서 하루는 놔둔 뒤에 냉장고에 넣었다. 

뿌듯하면서도 조마조마... 하게 하루를 더 기다렸다가 꺼내먹었더니 

우와~~~~ 대 성공!!! 우린 해냈어... 

 

첫번째 성공에 힘입어 한두달 후 다시 시도했다.

역시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난 번 기억을 살려 어찌구저찌구...

이번엔 부추 씻는 게 너무 구찮아서 오이만 담궜다.

이틀이 지난 후에 꺼냈더니 우엑~#$%^&!! 켁!!!

너무 짜다못해 쓰다... 지난 번 너무 소심했던 카나리 액젖을 너무 많이 부었다 싶었는데...

먹을 수 없는 오이김치를 바라보다 버리긴 너무 아까워서 고심하다

생각끝에 부추 두단을 사다가 (씻는데 목욕탕 전체가 부추들의 반란이었다) 넣었다.

그래도 들은 건 있어서 오래 묵히면 먹을만 하겠다는 생각에

한 일주일을 방치했다.

먹어볼까? 상의하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김치통을 열었다.

잉? 오이들은 속이 다 삭아서 껍데기만 남아있고, 이건 오로지 아주 푹 익은 부추김치이다.

뭐 어쩔 것이여... 버릴 수는 없고 그래도 먹어야지. 내가 한건데...

아끼고 아껴서(???) 두달만에 겨우 먹고는 일단 포기.

일년쯤 지나 또 한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너무 조심해서 그런지 

특별한 문제는 없었으나 참으로 별 맛은 없는 오이김치

 

요즘들어 그 후배의 김치도 가뭄에 콩나듯 쪼끔씩만 전해지고 ㅠㅠ

시장 반찬가게에서 그나마 달지 않은 김치를 찾아 두번 사다 먹었다.

그러다가 김치 없이 일주일을 보낸 남편이 참다못해 항의한다. 김치먹고 싶어!!!

무지하게 더웠던 지난 일요일, 큰맘먹고 시장에 가서 오이를 샀다

뭐... 늘 조금씩 담구긴 했지만  한두번의 실패에 더 소심해져서 (그리고 까먹었다. 얼마나 담궜었는지)

오이 12개를 사다가 3개는 무쳐먹으려고 두고 9개를 잘라서 절였다.

이번엔 붉은 고추도 사다가 양파, 마늘이랑 같이 갈고, 고추가루, 액젖등을 넣어

온 집안과 온몸에 고추가루 범벅을 하면서 부추, 쪽파 등과 같이 넣어버무렸다.

하루를 밖에 두었다 냉장고에 넣어놓고 하루 지나면 먹기로 했다.

근데... 사실 남편도 나도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아서 인지 깜빡... 한 것이다.

그렇게 4박 5일이 지나고는 오늘 아침을 먹으려다 갑자기,

아!! 오이김치 먹자!! 그러게... 먹어야 되는데...

꺼내서 기대반 의심반 딱 입에 넣었는데...

흠~~~ 이맛이야~~~ 처음 담궜던 바로 그맛... 성공,성공!!!

근데 좀 너무 익었다... 빨리 먹어치워야겠는데???

 

또다시 먹어치워야 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오이김치~~~ 우...우...우...

그래도 집에 김치가 있으니 걱정은 덜었다.  나는 이제 김치담구는 게 두렵지는 않아졌다... ㅎㅎㅎ

뭐... 또 담글라 치면 맛은 장담 못하겠지만, 룰루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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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 자바르떼

사회적기업이란 말을 처음 들어본 게 2년전 11월인데

어느덧 사회적기업이 예술인들 사이에서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적기업을 만들고자 하는 예술인들이 자주 찾아오고 상담을 하곤한다.

아직 우리도 버벅거리고 있는데, 누굴 상담할 처지는 아니지만

문화예술분야에서도 사회적기업은 몇 되지않고, 또 특수성이 있는데다가

문화운동 진영에서 달리 상담을 해줄 사람이 없으니

선후배들이 종종 나를 찾곤 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회적기업을 단순히 정부에서 기금 나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실제 9개월을 해보니 그렇게 접근을 하면 낭패를 보기가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일단 좀 더 체계적으로 자바르떼의 고민과 과정을 정리해야 하지...싶다.

아직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요즘 사회적경제와 같이 생각하는 논의 단위가 있어서

마침 1차로 두서없는 고민을 정리한 글을 소개한다.

물론... 진짜 두서없는 고민이지만...

자바르떼는 내부 전략단위를 구성하고 좀 더 고민을 구체화하고 대안을 모색해 보기로 했으니

앞으로 논의가 이루어지는대로 소개를 좀 할까 한다.

혹시라도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분들이 활용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사회적기업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참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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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경제의 가능성은?

  

이은진(자바르떼 대표) 

 

 

1. 아직은 사회적경제에 대해 함께 논의해 본적도 없고, 또 문화운동 내부에서 고민해왔던 바가 개념은 비슷하겠으나 사회적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익숙치도 않은 상태이다. 또 철학적 근거들을 정리하지 못한 초기 고민수준의 문제의식만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터라 이런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이 아주 조심스럽기도 하거니와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앞으로 지역에서의 가능성과 단초를 함께 모색하는 자리라 생각되어 정리도 되지 않은 고민을 두서없이 제출해 본다.

 

 

2. 사회적기업에 대한 관심도와 인지도가 무척 높아지고 있고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가들에게도 사회적기업은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2004년 신나는문화학교를 시작할 때 4대보험 가입을 교사전체가 거부하고 스스로를 실업자나 취약계층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돌이켜보면 5년사이 엄청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신나는문화학교의 경우 현재까지 올 수 있었던 동력은 교사들의 자발성과 의지에 있다. 2005년 사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을 때 지역의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무급 진행을 결의하고 1년간 사업을 계속하지 않았다면 아마 현재의 자바르떼도 없었을지 모른다. 문화예술 활동가들은 과거부터, 또 현재에도 지역의 다양한 계층들과 연대하면서 재정과는 무관하게 활동을 해왔다. 이것은 문화예술운동단체들의 역사와도 연관이 있는데, 문화예술운동단체들은 전통적으로 공동체적 운영방식을 채택해 왔다. 시민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도 비슷하긴 하겠지만 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들이 모두 주체가 되어 사업을 결정하고 운영에 참여하며 함께 책임을 져왔다. 즉 같이 벌어 같이 쓰고, 수익이 남으면 약간의 활동비를 나누어 갖는 식으로 운영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도 문화운동에 몸담았거나 몸담고 있는 활동가들의 경우에는 관계가 유지되고 있고 퇴직을 하더라도 지역에서 함께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편 예술가들은 초기 문화학교의 경우처럼 급여 방식에 익숙치 않고, 출퇴근이나 업무일지 등의 형식에 적응이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급여나 활동비로 보상되지 않더라도 자기 창작의 성과나 대중들과의 교감, 지역에서의 연대활동에 대한 보람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3. 문화운동 내부의 고민은 재생산구조의 구축과 생활문화운동으로서 문화를 변화시키려는 노력, 그리고 지역 거점 구축과 이를 통한 소공동체 구성으로 많이 집중되어 왔다.

문화운동은 급속히 확산되던 8,90년대에는 조직운동과 같이 성장해 왔지만 그만큼 또 조직운동에 종속되어 왔고, 문선의 역할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문화를 도구로 사고하기도 한다. 현재보다 상태가 덜 심각하던 90년대 중, 후반에 문화운동은 독자적인 토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기존의 조직방식과 다른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대안적인 가치, 대안적인 삶의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 거점을 구축하고, 이를 조직하기 위한 방안들을 검토해왔다. 그리고 각 지역을 잇는 전국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식도 논의 되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이다.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라는 슬로건을 걸고, 반 자본적인 영역에서부터 비자본적 영역을 아우르는 일상 문화투쟁들을 연결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문화예술이 가지는 공공적 가치와 예술 노동에 주목하게 되었고, 문화기본권적인 관점에서 ‘누구나 예술을 향유하고 창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90년대 초반의 대중문예교육 철학을 부활시키기에 이른다. 장르틀에 기반한 전문가 중심의 예술이 아니라 향유자 중심의 생활예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확장되었다.

 

 

4. 문화생태를 일구는 자바르떼

자바르떼가 추구하는 문화생태에는 몇가지 의미가 같이 들어있다. 누구나 예술창작과 향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문화예술 생태계의 선순환구조를 활성화시키고, 이를 위한 기본 동력으로서 생활예술동아리 활동을 활성화시키자는 것, 그리고 생태적인 문화예술활동을 의미하고 있다. 또 자바르떼는 신나는문화학교 1기가 끝날 무렵, 문화예술 지역공동체를 꿈꾸었고 사회적기업으로 전환을 준비하면서는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렇게 추진하게 된 것은 앞에서 서술한 지난 시기의 고민들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몇가지 이유가 더 있다. 한 가지는 예술가들이 스스로 노동자 주체가 되어 자기 노동의 사회적 권리를 주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영리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사회적기업에서 일반적인 직장인 수준의 급여보장은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과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 받는 급여 외에 다른 방식으로 채울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작은 마을 단위, 지역과 결합해서 노동력을 교환한다던가, 지역화폐로 다른 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다던가, 사회적 예술노동의 댓가로 공간을 제공받는다던가 하는 등 돈이 아닌 영역으로 해결될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자바르떼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지역에서 공동체적인 운영을 하는 공연예술단체들이 행정적 준비에 어려움은 약간 있으나 사회적기업 전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음을 최근에 확인할 수 있었고, 특히 문화예술교육을 병행하는 단체들이 핵심이 될 것이다. 공연 예술 단체들 뿐 아니라 미술작업자들 중에도 지역에서 마을의 소단위, 개별 요구에 맞추어 작업하고 싶어하는 활동가들이 많다. 최근엔 생활 예술로의 접근과 생활예술동아리 활동에 대한 중요성이 확산되어 지원이나 사업영역을 확대해 가는 추세여서 지역에서의 교육과 창작활동, 주민들과의 작업들이 원활히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 보여진다. 자바르떼는 올해 각 지역에서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과 문화(향유자)생활협동조합 구축의 단초를 만들어 갈 계획을 갖고 있다. 또 하나의 대안으로서 협동조합에 대한 실험을 시작하는 것이고, 2년간의 훈련과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5. 하지만 아직 상에 대해서도 구체적이지도 못하고,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한 부분도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적 전망을 구체화하여 추진전략과 단계별 목표를 세우는 것은 올 상반기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 예술가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방식, 커리큘럼을 만들어가는 것과 문화향유자 협동조합 구축을 위한 교육커리큘럼, 접근 방법, 핵심 주체를 세우는 문제도 아직 백지 상태이다. 더군다나 예측되는 어려움도 매우 많다. 아직도 문화에 대한 편견이 많아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뒤에나 고민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던가, 문화를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도 여전하다. 그런 상태에서 문화를 기본권인 동시에 생활로 받아들여 지속적인 향유를 하는 것이 어느 정도가 가능할 것인지도 아직은 미지수이다. 또 지역에서 동아리 활동이나 사회공익적 활동을 연계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공간 제공 등의 문제는 지자체와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영역이고 지역과 지역을 잇는 방식은 또 어떨 것인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장 난감한 부분은 예술 노동의 가치가 어떻게 계량되어 다른 재화서비스, 사회서비스와 교환될 수 있는지를 정리하는 문제일 것이다.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계량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그리고 기준을 우리끼리 합의한다고 해서 우리 내부가 아닌 예술계의 설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두서없이 쓰다보니 더 두서가 없어진 것 같다. 이렇듯 아직은 넘어야 할 산도 많고, 밑그림도 안그려져 있지만, 문화예술 영역에서 사회적경제 영역을 만들고 확장시켜갈 가능성은 매우 많다고 생각된다. 지역에서 함께 실마리를 찾아내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고 또 같이 풀어갈 파트너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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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간 겨우 세번째 합주...ㅠㅠ

연말에 공연을 할 수 있을라나...쩌비..

초기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실제 각자 레슨을 받는 일들이

녹녹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아주 바쁜 행사 기간을 빼고,

사부의 공연일정 한 두 번을 빼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베이스 레슨을 틈틈이 강행하는 나와는 달리

다른 멤버들은 그게 힘든 것 같다.

(도대체 뭐가 그리 바쁜거지? 아님 이게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건가?)

하여튼...

첫 합주를 마치고 기분이 좋아서 매달 한 번씩 합주를 하면서

레파토리를 두개씩 늘려가면 연말에 공연할 수 있겠다... 고 기대했는데

9개월이 되도록 합주를 겨우 세번 했을 뿐이고,

합주 때마다 한곡만도 아주 어렵게 마무리를 했다.

이제 누군가 들으면 응... 이거 무슨노래구나...하는 걸 알정도의 수준.

 

놀세는 무슨 공연이냐고, 내년말에나 되서 공연을 할 건지, 말건지 고민하자고 한다.

헉!! 내년 말? 2년을 연습하고도 그걸 고민해야 하는 정도란 말인가?

마담 졸라는 연습시간 짬도 내기 어렵고, 레슨도 잘 못받아 겨우 코드를 보고

한 곡 한 곡 어렵사리 치면서 손가락 아파 합주 그만하자는데,   

그러면서도 얼마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지,

기타보다는 와서 노래부를 생각에 늘 즐겁기만 하다. (에구~~~)

우리 밴드 실력이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니냐는데...

참, 내... 놀세는 그 말에 기도 안차다는 반응이다.

 

이렇게 양 극단적인 두 사람 사이에

나와 자동머리는 합주라도 열심히 하자는 주의다.

두 주에 한 번씩이라도 하고 합주에 재미를 붙이면 또 어느순간 질적으로 상승되어

레파토리는 금방 늘어날 거라는 생각인데,

뭐... 이것도 결국은 합주를 할 수 있을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다. ㅠㅠ

 

연초에 밴드만들고 신나했고, 또 연습하면서 잡생각 없이 푹 빠졌고

레파토리 생각하면서 즐거웠고, 주위사람들에게 뭐라도 취미활동 하라고 막 권하면서 우쭐했고...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있다.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변에 소문내고 무리했는데

이건... 뭐... 어쩔 수 없이 올해 내 공연은 물건너가고 마는가...

남편 놀세는 우리가 년도를 정한 건 아니지 않냐고, 연말 공연은 내년도 있고, 후년도 있다고 한다.

치이~~ 그러면 나는 잘난 척하고 밴드 바꾼다고, 다른 밴드에 가서 연주하겠다고 협박도 하곤 한다.

(그런 팀이 있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아... 합주하고 싶다!!! 

그래도 아직은 즐겁다. 베이스를 치고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어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친다.

꼭 공연을 해야 맛인가? 연주하는 것만도 즐거우면 뭐... 일단은... 더 가볼만 하니까...

...

연습이나 열심히 해야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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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 대해 남은 이야기

올해 5월의 오키나와 행은 심한 강행군이었다.

오키나와는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졌고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이다.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 본토 사람들과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상처가 아직 남아있다.  

오키나와인들은 무척 친절하고 상냥하다. 그러면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여유가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섬 오키나와에서 색다른 바다와 상냥한 사람들을 충분히 즐기고 느끼지 못한

이번 여행의 아쉬움을 달래며 2년전에 갔었을 때 다녔던 곳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오키나와인들의 자신들의 전통민요를 즐긴다. 국제거리에 가면 오키나와 민요, 혹은 섬민요 라는 문구를 적어 놓고 약간의 입장료를 내면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주점이 종종 있다.

어김없이 전통민요를 부르면서 손님들과 같이 춤을 추는데, 남성들은 주먹을 쥔 채 손목을 돌리며 춤을 추고, 여성들은 손바닥을 편 상태로 손목을 돌린다.

어떤 부분의 노래들은 일제시대 독립군가 곡조와 비슷하기도 하다.

"아히야~ 옷쏘! 옷쏘!" 하는 여성들의 간드러진 목소리의 추임새를 넣을 때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오키나와 전통악기인 샴신을 만드는 공방. 슈리성 올라가는 길 입구에 있는 상점.

 

도자기 말고도 오키나와는 유리공예로 유명하다. 오키나와 남쪽에 유리공장과 이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커다란 전시장이 있다.

 

히메유리 평화의 공원. 주로 태평양 전쟁 유적지 이기도 하고, 그래서 추모비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공원과 비석을 세웠지만 한국인 희생자들은 1만명정도로 추정하면서도 명단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를 위한 추모비를 오키나와 인들이 직접 돈을 모아 세웠다.

 

히메유리 전쟁유적지에 있는 어린 소녀의 동상. 부모님이 학살당한 걸 목격하고는 손을 움켜쥔 채 한이 풀리기 전에는 손을 펴지 않으리라고 했다 하여 주먹을 쥔 동상이다. (주먹을 쥐는 것은 여성들에게는 금기된 일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구덩이

 

평화의 공원에 있는 추모비, 돌마다 빼곡히 적혀있는 희생자들의 이름. 대한민국이라고 쓰여져 있는 칸에는 몇개의 이름이 없고, 비어있다.

 

가데나 기지 앞에 있는 고속도록 휴게소 3층에는 전망대가 있고, 전망대에서는 건너편 미군기지를 관람할 수 있다. 마치 관광지처럼...

 

가데나 기지 근처에 있는 전쟁 유적지. 참호가 파여있어 전투의 흔적이 역력하다.

 

가라스 보트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바다 밑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배)를 타고 30분 정도 나가면 바다속에서 움직이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다. 남보라색과 자주빛, 노란 물고기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단, 고개를 숙이고 계속 보면서 가면 멀미가 심하게 날 수 있다는 거..

 

배를 타고 갔던 토카시키 시마(섬) 오키나와에서 약간 큰 섬에 속하는데 배를 타고 가다가 운이 좋으면 멀리 고래떼들이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날도 고래떼가 나타났지만 사진에선 잘 볼 수가 없다.

 

토카시키 섬은 아주 아름답고 조용하다. 여름엔 관광객으로 북적댄다지만 우리가 갔던 3월엔 아주 조용하고 약간 바람이 불어 물에 들어가긴 힘들었다. 하지만 연두빛의 바다와 이끼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조용한 섬 토카시키의 마을과 아주 작은 라면집. 오키나와 전통국수는 두터운 훈제삼겹살을 얹어 주는 데 국수는 칼국수 처럼 납작한 면이라 쫄깃한 맛은 없다. 하지만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중 하나이고 또 나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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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7, 8)

 7. 5月21日   觀光  관광

 

 아침 10시쯤 사람들은 이시카와하고 슈리성으로 출발했다. 나와 정혁, 선봉형은 재작년에 가봤기 때문에 쇼핑이나 하자고 남았다. 우리는 다시 시장들을 돌아 물건을 좀 산 후 회를 사가지고 숙소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은 슈리성 관광 후 점심을 먹고 다시 숙소에 들어왔다.

일부 쇼핑하거나 남은 사람을 빼고 4시 쯤에는 가까운 바다로 갔다. 돗자리를 피고 맥주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안나를 비롯한 몇 명은 바다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바다는 인공으로 만든 곳이라 우라소에나 다카에 바다와는 달리 별로 좋지 않았다.

 자진해서 첫날 식사당번을 했던 우리셋이 장을 봐서 삼결살을 구워먹기로 했다. 준꼬씨의 집을 들러서 고기판과 불루스타, 전기 냄비를 가져왔고 거실을 가득메우고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먹었다. 토미야마 씨도 오셨다. 한참 먹고 나서 돌아가면서 소감을 한 마디씩 이야기 했다. 토미야마씨는 오키나와 인들은 여유있고 느긋하다고. 이시카와는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계속 빨리빨리하는 게 아쉬웠다고 했고 준꼬씨는 오키나와에 운동하러 오지 말라고, 미군기지의 문제도 아주 중요하지만 오키나와는 너무 아름다운 섬이니까 관광하러 자주 오라고 했다.

 에리꼬는 오키나와 친구가 공연을 보았는데 공연을 보고 난 후 그동안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 소홀했는데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사람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며,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시카와가 자랑스럽다고 뽀뽀를 보내주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뽀뽀해! 뽀뽀해!” 하며 직접 해주라고 하자 남에게 보여주는 게 너무 아까워서 싫다고 한다.

 한국인들도 돌아가며 한 마디씩했다. 아쉬운 점도 많았고 또 평가를 해야겠지만, 단순 공연만 한 것이 아니라 행진도 참가할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있었던 일정이었다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의 소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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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月22日   韓國へ  한국으로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짐 정리를 한 후 9시반에 출발했다. 에리꼬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와서 나누어 주었고, 같이 공항에 가주었다.

모노레일을 타고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는데 외국여행이 처음인 진영이가 티켓을 인천에서 버리고 왔단다. 하지만 다행히 걱정한 것 만큼 큰 문제는 없었다. 수속을 마치고 출국심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는데 이시카와는 계속 울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 열심히 살게 라면서... 정말 고맙다. 그리고 정말 수고많았고, 고생시켜서 너무 미안해. 하지만 분명 오키나와에서의 네 생활은 더 의미있고 즐거울거야. 에리꼬 많이 사랑하면서 살어. 라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보내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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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신문에 나온 기사들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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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6)

 6. 5月20日  - 히가시손의 헬리콥터 기지 건절 예정지(다카에) 방문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죽과 라면?) 먼저 귀국하는 박정숙, 유영희, 정윤경, 고명원과 인사 나누고,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박미영도 남았다) 9시 반에 숙소에서 버스로 출발했다. 이번 버스는 동경 나리타 공항 반대투쟁에서 10년 이상 투쟁하다가 오키나와에 내려와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 운전하는 차였다.  나가이 씨는 아침 일찍 동경으로 출발을 하셨는데 우리는 얼굴을 보지 못했고, 나중에 오자와씨와 통화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헤노코에 우선 들러 공동대표 중 한 분으로부터 헤노꼬 투쟁의 역사와 기지관련 설명을 들었다. 헤노코 앞 바다에는 ‘듀공’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고래 종류가 사는데 멸종 위기에 처해있고, 현재 이 앞에도 50마리 정도 밖에 없다고 한다. 몇 년간의 투쟁 속에서 겪은 일들, 또 태평양 전쟁과 그 이 후의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 등, 너무나 하실 말씀이 많으신 듯했지만 시간 관계상 줄이고, 다들 긴 천에 염원을 담아 철조망에 묶고 사진촬영을 했다.

 바닷가 입구에는 현에서 걸어 놓은 경고판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쓰레기는 가져가 주십시오.”라는 문구가 써있었다. 누군가가 ‘쓰레기’라는 단어 앞에 “미군과” 라고 적어놓았다. “미군과 쓰레기는 가져가 주십시오”라고.

 더늠에서 준비한 솟대와 기념품을 드리고 시간이 없어 버스 안에서 도시락을 먹으면서 다카에로 이동했다. 다카에는 작년 8월부터 농성을 시작했는데 헤노꼬와는 달리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고, 북쪽 산 기슭에 있는 총 인구 140명인 작은 마을사람들이 투쟁을 하기 때문에 천막을 4군데 치고 1명씩 지키는 데 오늘은 한 곳에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 천막마다 돌아다니며 방문하고 설명을 들었고, 또 그 주변을 돌아봤다. 댐과 기지 건설을 위한 도로 입구 몇 곳을 갔는데 그 입구마다 천막을 치고 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했다. 하지만 입구를 봉쇄하거나 바리케이트를 치면 그건 불법이라 연행되기 때문에 옆에 천막을 치고 있다가 차가 나타나면 사람들을 불러 막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번에는 트럭들이 몇 대 자갈과 모레를 싣고 와서 길을 깔았는데 연락이 안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한다. 한 곳은 노인 한 분이 교대도 하지 않고 몇 달간 계속 거기서 숙식을 하고 계셨다. 그 분 말씀이 평택같은 한국의 투쟁에 비하면 미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투쟁이고, 평화적인 투쟁을 하고자 한다고 하신다.

 풍물공연을 할까 준비도 하고 생각도 했으나 지금은 천연기념물인 새들의 번식기라 미군기지 건설도 중단되어 있을 정도니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아 공연은 생략하였다.

 산 입구에 쓰여진 푯말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다카에 바다는 우라소에 해변공원 바다와는 아주 다른 색을 띠고 있었고 산호 띠에 의해 파도가 잦아드는 선도 아름답고, 바다도 좀 더 깊은 듯 청록색을 띠고 있었다.

 다카에 지역의 산은 정글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군이 정글게릴라 훈련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이 지역에 사는 천연기념물인 뜸북이가 있는데 오키나와에는 포유류가 없어 천적이 없기 때문에 그 새가 날지 못하고 걸어다닌다고 한다.

 역시 더늠이 준비한 솟대와 기념품을 드리고 다시 출발했다. 오는 길에 바닷가라도 들를까 했으나 오자와씨, 메구미씨, 히나타 씨의 비행기 시간이 늦을 수 있어 그냥 바로 공항으로 갔고, 나하공항에서 일본분들과 인사를 하고 사진도 찍고 헤어졌다.

 버스로 다시 숙소로 돌아와 버스 청소를 돕고 난 후 개인당 500엔씩 받아 알아서 각자 저녁 해결했다. 이시카와는 전날 에리꼬가 화가 났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찬영이가 솟대를 만들어 집으로 찾아가 같이 라면을 먹는 등 애를 써서 화를 풀고는 다시 숙소로 왔다. 공연장 옆의 공원으로 가서 캔맥주를 마시다가 모기가 많아 숙소로 다시 돌아와 한 잔을 더 했는데 에리꼬에게 한국에서 가지고 온 반찬들을 주었다. 참 좋아했다. 이시카와는 에리꼬를 보내고 나서 역시 숙소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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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5)

5. 5月19日  평화콘서트 : 한국과 오키나와를 잇는 예술인의 밤 (사쿠라자카 극장)

 

  - 아침부터 공연 준비 / 공연은 18시 개장  /19시 공연 시작해서 21시 30분까지

  - 사전행사 : 인천노동문화제 영상 상영(5분), 평택 대추리 다큐상영 (40분)

  - 공연순서 : トヌム 더늠 (19:00~19:25) / まよなかしんや 마요나카 싱야 (19:25~19:35) / 金城繁 긴조시게르 (19:35~19:50) / しゃかり  샤카리 (19:50~20:30) / コッタジ 꽃다지 (20:30~21:10) / アンコール 앵콜 (21:10~)


 늦은 아침을 먹고 11시반에 꽃다지와 스텝을 맡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이동했다. 올라가는 길 옆 쪽으로 공원이 하나 있었다.

희망의 언덕 공원. 버려진 고양이들이 정말 많았는데 고양이들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았고, 먹을 것을 달라는 듯 주변을 맴돌았다. 그 공원 앞에 있는 우리가 공연할 극장 이름도 사쿠라 자카 극장(벚꽃언덕?)이었다.

꽃다지가 리허설 하는 동안 진영이와 나, 정혁씨, 창곤형, 그리고 이시카와가 산책을 나갔다.

늦게 온 진영이에게 주변 관광을 시켜주자는 취지였다. 시장통을 누비고 재래시장에도 갔었다. 국제거리 뒤쪽의 시장은 정말 크고 여러 블록으로 되어 있다.

한참을 걸어다니다가 다시 극장으로 가서 리허설이 끝난 꽃다지 식구들, 에리꼬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더늠은 2시부터 리허설을 시작했다.

3시 반부터 샤카리와 긴조시게르, 마요나카 상이 공연 리허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우리는 밥을 먹고 다시 진영과 주변을 돌아다녔다.

츠보야에 한 번 가보자고 해서 물어 물어 찾아갔다. 츠보야는 도자기 거리로 대부분 상점에 공방이 같이 있어 만드는 과정을 볼 수도 있고, 돈을 조금 내면 직접 제작 체험도 가능한 곳이다.

가서 보니 우리가 매일 다니던 시장길 평화의 통로로 나가면 바로 츠보야 였다. 그걸 모르고 우리는 반대편 길로 빙돌아 물어물어 찾아간 것이다. 지난 번에 왔을 때도 가본 곳이라 오래된 가마와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 굽는 공방도 들어가 사진도 찍고 구경도 했다.

그리곤 맥주 몇 개 사서 공원에서 쉬자고 하여 다시 극장 앞으로 왔다. 이미 사람들은 매대를 펼치고 있었고, 그 동안 만났던 오키나와 분들이 몇 분 와 계셨다.

 밖에서 매대를 펼치고 오자와 상과 진영, 광배, 창곤형이 판매를 담당했고, 에리꼬도 계단 중간에서 팜플렛을 나누어 줬다. 진행할 사람이 별로 없어서 준비가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덕분에 아무도 공연 사진은 찍지 않았다 ㅠㅠ)

 도시락을 먹고 평택 다큐멘터리 ‘들사람들’이 먼저 시작을 해서 극장에 들어갔다. 40분 정도의 다큐였는데 일본어 자막을 준비못해서 사람들이 잘 이해를 했는지 의문이다. 이어서 인천 노동문화제 동영상 5분짜리가 상영되고 7시 정각에 더늠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걱정을 많이 했으나 다행히 거의 객석이 가득 찼다.

 더늠은 입구에서부터 들어오는 소리로 치기 시작해서 객석 중간을 돌아 무대에 입장했다. 선봉형이 하얀 민복을 입고 나와 넘어가세를 2절까지 불렀다. 시간이 늘어지면 안된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한 절을 뺐다고 한다. 그 다음엔 마요나카 싱야 씨의 공연. 마요나카 싱야 씨는 삼신을 연주하는 김상(金さん)과 같이 나와 노래를 두곡 불렀는데, 노래들이 중간에 에드립도 많고 말씀도 많으셔서 15분가량 늘어졌다. 두 번째 곡에서는 더늠이 나와 함께 연주를 했다. 마요나카 씨가 긴조시게르씨를 소개했다. 긴조 시게르 씨는 오른 팔을 교통사고로 잃고 손 대신 쇠꼬챙이를 달아 삼신을 연주했는데, 연세가 75세가 되는 분으로 연주 실력이 아주 뛰어나고 노래도 오래 부르셨다고 한다. 하지만 눈도 어둡고, 숨도 가쁜 듯했다. 헤노꼬에서 만난 미찌루상이 타이고 연주를 같이 했는데 표정이 너무 예뻤다. 두 번째 곡에선가 객석을 향해 노래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물은 듯했다. 누군가 안다고 하자 올라오라 하고, 젊은 여성이 신발을 벗고 무대에 올라왔다. 아마도 그 노래는 듀엣곡인듯 여성은 자신이 불러야 할 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후 곡들도 객석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좀 전 여성의 일행인 듯) 오키나와 전통 춤을 추었고, 객석 중간 중간에서도 일어서지는 않았으나 팔을 올려 춤을 같이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음순서로 샤카리 공연을 위해 무대를 정리하는 데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는데 아주 정확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아는 듯 아무도 불평은 없었다. 샤카리는 전문 활동을 하는 대중가수인데 관객들과 소통하려는 느낌이 많았고, 오키나와 전통 민요도 부르고 전통민요와 대중음악을 접목한 노래들을 불렀다. 우리가 일본 가요라고 느낄 만할 그런 노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꽃다지 공연을 위해서도 역시 무대 셋팅을 바꾸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람들이 많이 나가는 듯해서 샤카리를 보기 위해 온 그런 팬들이 아닐까 싶었으나 거의 모두 다시 들어왔다. 약 15분 정도의 셋팅시간이 흐른 후 꽃다지가 공연을 시작했다. 정서적으로도 약간 다르기 때문에 느낌이 있었겠지만 자막을 쏴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용을 더 잘 느끼는 듯했다.

 10시가 다되어 공연이 끝나고 무대 및 밖에서 음반 파는 일도 정리를 한 후 뒷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아주 큰 술집이었는데 엄청난 안주들이 등장했다. 초밥과 오리고기, 소고기, 생선찜, 오키나와의 전통음식인 고야 복음 등. 샤카리 팀도 모두 참석했고, 헤노꼬에서 온 미찌루와 미온상, 마요나카 상, 야기상, 이시우 일행, 첫날 사회복지센터 뒷풀이 때 보았던 센터 사무국장님과 소설가 등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공연이 아주 감동적이었다고 많은 분들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몇몇 분은 전날의 연설이 감동적이었고, 나의 일본어 발음이 매우 좋았다고도 했다. ㅋㅋㅋ

 야기상은 수상을 보좌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계속 음식을 챙겨주셨고, 술집의 서빙보는 사람으로 오해한 한국사람들이 그를 마구 불러 음식을 시켰다. 그러나 전혀 불평없이 너무나 친절하게 다 챙겨주셨다. 더늠은 옷을 갈아입으니 아무도 공연단으로 알아보지 못하여 소외된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곧 곳곳에 끼어서 같이 어울렸다.

 이시카와의 병원 직원들이 20명 정도 공연을 봤고 뒷풀이에 같이 온 4명이 인사를 하며 공연이 너무 좋았고, 또 이시카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에 다시 공연을 온다면 자신들이 스텝을 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이시카와의 가장 큰 소득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대표선수(?)를 불러 인사를 시켰다. 동경을 대표해서 야기상이, 한국인을 대표해서 이은진이, 오키나와를 대표해서 토미야마상이, 그리고 이시카와가 나왔고, 메구미 상이 통역, 샤카리 그룹의 리더가 오키나와 말로 통역하겠다고 같이 나왔는데 “니헤 뒤베~~” 이런 식의 도통 뭔말인지 모르겠는 말을 반복했다. 아마도 ‘감사합니다’라는 오키나와 말인듯 했고, 사람들은 재밌어 했다. 동경에서는 1700명이 이 행사를 위해 오키나와에 왔다고 했다. 

 정리한 후 숙소로 이동했는데 이 시우 일행과는 여기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거리에서 퍼커션 잼을 한 팀도 있고, 따로 술집을 찾아간 사람들도 있고, 준꼬상의 차를 타고 야경을 보러 간 사람들도 있고, 숙소에서 한 잔 한 사람들도 있고 다들 어디선가 알아서들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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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4)

 4.  5月18日(平和行進3日目) 평화행진 3일째

     현민대회

 10시 출발하여 기노완시의 해변공원에 도착했다. 해변공원 야외 공연장 입구에 짐을 내려 놓고 오자와상, 요오꼬상, 박정숙 일행은 후발대를 마중하러 나하공항으로 떠났다.

시간이 많이 남아 이시카와가 바닷가에 가서 맥주나 먹자고 했다. 미영이는 피곤하다며 짐을 지키겠다고 했다.

나머지는 나가이 상, 메구미 상과 함께 바로 옆 해변으로 가서 맥주를 마시며 쉬었다. 바다색이 정말 예뻤다. 해변에는 천막을 쳐놓고 나무의자와 테이블이 쭉 있었다.

그 중 한 칸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이런 자리에 예약이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나 써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예약한 사람이 있다면 비켜줘야 한다고... 옆에서는 바비큐를 하고 있었다. 여기는 신청하면 바비큐 장비를 빌려준다고 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었는데, 너무 힘드니까...

 바닷가 산책을 하는 사람, 사진도 찍고, 인터뷰를 하기도 하면서 자유로운 시간 가졌다.

 12시에 도시락을 먹고, 1시반부터 행사 진행 준비를 했다. 그 때 후발대가 도착 (민정연, 정윤경, 고명원, 박진영)했다. 서울에서 보는 것 보다 더 반가웠다.

 매대를 펼치고 인천노동문화제 티셔츠와 뺏지, 인천CD를 판매하면서 오키나와 투쟁에 연대와 지지를 보냈다. 티셔츠에 요오꼬 상이 오키나와 신기지건설 반대. 라고 써주었다.

 선봉형과 광배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판매하면서 호객행위 했다. 선봉형은 어설픈 일본어지만 아주 열심이었다. “티셔츠를 뜨겁게 살고 있습니다” (티셔츠를 싸게 팔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잘못 함) 뺏지를 빤쓰라고 하는 등 아주 갖가지 말 장난으로 주위사람들을 뒤집어지게 했다. 우리만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나보다. 우리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들이 많았다. 

 오후 3시부터 사전행사가 진행되었다.

오키나와 음악팀이 한 팀 나와서 공연한 후 더늠의 풍물공연 10분하고 꽃다지가 노래 2곡(반격과 사람꽃)을 불렀다.

 사전공연이다 보니 행진대오가 계속해서 입장을 하고 있었고, 대오가 들어올 때 노래 중간인데도 안내 멘트를 했다.  객석은 반 정도 차있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4시가 되어서 집회는 시작했다.

 영택이와 내가 대회 공식 참가자(게스트)로 되어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역을 맡은 준꼬 씨와 단상에 올라가 미리 앉아 있었다. 참, 한국에서도 드문 이런 일이 오키나와에서 있다니. 한국에서 누가 문화단체들을 이런 귀빈 대접을 한단 말인가...

 연설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연설자 당 5분간 발언을 하기로 되어 있는지 행진 둘째날 사회를 본 야기상이 젤 앞 중앙에 앉아 ‘1분’, ‘종료’ 등의 팻말을 들어올리고 있었고, 별로 늘어지지 않고 진행되는 편이었다. 

  동경에서 온 노조 위원장, 실행위원들, 국회의원, 무슨 단체 대표자들이 연설을 했다.

 그런데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특이하게도 무대위에서는 행사와 약간 무관하게 고등학생정도로 보이는 두 학생이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예전 현민대회 흑백 사진을 A3 사이즈로 뽑아 들고 단상 옆이나 뒤에 서고 한 사람이 계속 사진 촬영을 했다. 객석에도 가서 사진을 찍고. 이들은 고교생 사진 창작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팀인데 기술자로 인정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팀이고, 뭔가 창작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사진기자는 한 명도 무대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통제를 하면서도 이들의 행위를 허용하는 것은 또 매우 특이했다.

 나과 영택의 연설은 약 5분정도 였다. 준꼬상이 통역을 해주었는데 인사말과 소감, 지지 발언, 광주에 대한 이야기, 돌아가서 열심히 투쟁하겠다는 다짐, 감사의 인사, 그리고 구호로 마무리했다. 외국의 공식 연설은 우리가 유일했고 TV에도 나왔다고 한다.

 비는 흩뿌리듯 계속 내렸다. 태풍때문인데 바람도 많이 불어 좀 추웠다. 마지막 아필(선언문) 낭독 시 오키나와 음악팀이 다시 나왔고, 청년 대표가 앞부분은 생략하고 뒷부분 한 문단만 읽는 센스를 보였다. 집회를 정리하면서 음악팀이 같이 연주를 하고 인터내셔날가를 합창했다.

 단상에서 내려오니 이미 매대를 다 정리해 놓았고, 야마시로 상과 인사를 나누고 남은 티셔츠등을 행사 자원봉사자들에게 기증했다.

 서둘러 버스로 다시 이동했고, 사람들이 더 왔기 때문에 오자와씨와 몇 명이 택시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버스로 숙소 도착했다. 오면서 이시카와가 저녁 식사 할 수 있는 식당을 예약했고, 에리꼬도 오기로 했다고 한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걸어 주점에 들어가 자리잡았다. 모두 28명정도 되었다. 1인당 3천엔(3만원 정도)에 술은 무한 리필, 음식은 코스로 나오고 모자란 것은 더 시키면 계속 준다는 약간 뷔페같은 곳이라고 진짜 좋아했으나 요리의 속도가 너무 늦어 거의 깡술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특히 더늠이 몰려앉은 테이블은 요리가 나오자마자 30초도 안되어 바닥을 보였고, 모두 배가 고파 화를 냈다. 어쨌든 10시 경에 식당을 나와 숙소에 돌아와서는 2차 할 사람들은 라면 끓여 먹고 술마시고 하면서 또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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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3)

3. 5月17日(平和行進2日目・西コース) 행진 2일째 서쪽코스

 요미탄에서 카데나까지 10Km 카데나에서 동쪽 코스와 합류

 

 오전 7시 출발. 오자와상과 히나타상이 일찍 숙소로 오셔서 방에 짐을 풀어놓고는 같이 출발했다. 오늘부터는 이곳에서 묵을 예정이시다. 

 요미탄손 시청 앞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제 공연 시간을 제대로 예측못해 늘어졌다고 생각했는지 오늘은 사전 공연이란다. 부랴부랴 더늠 치배들은 옷을 갈아입고, 사민당 방송차 앞에서 풍물공연을 했다. 역시나 풍물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지 중간에 끊으라고 하여 또 약간의 당혹스런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후 꽃다지가 두곡을 불렀는데 하나(꽃)라고 오키나와 민요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하나라는 곡은 7,80년대 활동가들이 잘 아는 노래라 오자와씨와 치바나 쇼이치씨를 비롯한 활동가들이 따라 불렀다.

 야기 상의 사회로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여러 사람이 나와 연설을 했다. 사민당 후보인 사토루씨와 오키나와 출신 국회의원 등.

 오자와씨는 20년 전에 오키나와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고 하신다. 그러나 최근까지 동경에서 헤노꼬 투쟁 지지집회를 방위성 앞에서 매주 한 번씩 하는데 이 집회에 연대를 계속 해와서인지 자세히 알고 계셨고, 덕분에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이해를 도와주셨다. 

 요미탄 시청이 있는 자리는 예전에 미군기지였는데, 시장을 포함한 지역주민들이 열심히 싸워서 결국은 반환이 된 땅이라고 한다. 그 때 시장을 지내며 끝까지 투쟁한 분이 현재 국회의원인데, 이 날 연설을 하셨다고, 매우 재밌게 연설을 잘 하는 것 같았다. (정광훈 의장님과 비슷)


 

9시가 조금 넘어 행진을 시작했다. 대오 제일 앞에 별모양으로 큰 상징물을 만들고 거기에 반전평화라고 써서 수레로 끌고 갔고, 또 황소의 탈을 쓴 사람도 있었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사민당 후보인 사토루 씨가 그 소를 끌고 갔다.

어제와는 달리 아이들을 데리고 온 주민들도 많았고, 한적하고 벌판이 펼쳐져 있는 기분좋은 길로 행진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곧 엄마 아빠에게 안기거나 업혀서 갔는데, 그 엄마 아빠들이 끝까지 행진을 계속 했다. 정말 대단한 의지, 체력이다. 

 카데나 근처로 가면서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카데나 미군기지 철망을 따라 계속 걸었는데, 정말 길게 계속되는 철망을 보며 걸어야 하는 것은 괴로웠다. 그러니 상점하나 보기도 힘들고, 맥주 한 캔을 못사먹었다는 거...


 역시 기차박수, 8박자 구호 등을 외치며 걷는데 오늘은 일본인들도 구호를 많이 외쳤다. 주로 오키나와의 신기지 건설 반대, 000 반대등의 구호가 많았는데 앞부분은 어쩌구저쩌구 하다가 뒷부분 한따이! 만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뭐, 같이 동참하는 의미이니까...

 히나타 상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자 많은 오키나와, 일본인들이 따라했다. 목소리가 정말 끝내준다.

 한참을 걷다보니 역시 우익이 출현했다. 우익은 항상 행진대오 우측에 출현한다.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차량(7~8대)이 정말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정말 시끄러웠다. 하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우리만 또 씩씩거리고...

 오자와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동경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동경에서는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에 경찰이 우익을 통제한다고 했다. 이시카와에게 풍물을 치면서 가자고 했다. 우익들 소리가 안 들릴테니 신나게 풍물치며 가자고. 이시카와가 우리차의 기사아저씨께 전화를 했다. 차가 막혀서 그런지 금방 온다고 했는데 도통 나타나질 않는다. 11시쯤 휴식을 위해 어딘가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우익 차들이 에워싸고 난리가 났다. 다시 출발하려 하는데 그 때서야 우리버스가 도착했다. 잽싸게 악기를 내려서 메고 풍물을 치면서 대오를 따라갔다. 이시카와는 “재밌다”고 한다. 우익들이 출현했지만 우리의 풍물소리가 더 컸고, 대오 앞쪽과 뒤쪽으로 인도를 따라 왔다갔다하면서 풍물을 치지 몇몇 사람들이 웃으면서 우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우익들은 몇 번 왔다갔다 하더니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사라졌다. 우리는 나름 의기양양해 하며 오후엔 더 신나게 쳐보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덕분인지 어제보다 걷는 게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점심 식사를 하고 난 뒤 이시카와가 와서 주최측에서 우익에 대해서는 무시가 기본 입장이라고 하며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하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특히 인도로 올라가는 일은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절대 안된다고...

 점심 이후 출발할 때 잠깐 풍물 공연을 하고, 다시 행진 시작하면서는 악기를 차에 실었다. 지루한 오후 행진... 우익들은 다시 나타나 계속 떠들어 댔다.(유턴을 해서 왔다 갔다 하며 계속 방해함) 기지 입구에서 잠시 항의집회를 했다. 그냥 서서 구호만 열댓번 외쳤다. 

정리집회 장소인 아메리카 타운의 공원입구까지 거의 다 와서 행렬이 멈추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침 가게가 있어서 맥주나 사자고 들어가려는데 이시카와가 우익들이 있기 때문에 따로 행렬과 떨어지면 안된다고 해서 포기하고 앞쪽으로 가봤다. 그랬더니 우익들이 흥분해서 차량들로 공원 입구를 막고 있었다. 경찰이 출동을 하고 우익 몇 명이 대오 쪽으로 달려들려 하자 자기네 일행들이 말리는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충돌이 생길 뻔 했던 거 같다. 

 우리일행은 무시라는 전술이 가장 힘든 전술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며 지쳐 있었지만, 오키나와인들과 행진 대오들은 익숙한 듯 보였다.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36년을 지속해 오지 못했을 것이고, 충돌을 하거나 하면 바로 경찰이 출동하여 잡아간다고 했다. 어쨌든 5.15 평화행진을 해마다 계속 진행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둔 방침일 것이다. 뭔가 끈질기게 버텨온 힘이 있긴 있는 듯도 하다.

 

공원에 들어서자 팥죽(?)과 음료, 사탕을 나눠준다. 동코스 (어제 헤노꼬부터 걸어 내려온)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바닷가를 잠시 산책하며 산호를 줍기도 했다.

 그러다가 맥주라도 먹고있자는 제안에 더늠의 세움이와 정기가 사러갔다. 그런데 간지 삼사십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걱정하던 이찬영이 찾아다니고 했으나 못찾았다. 큰일이다 싶어 다시 몇 사람이 찾으러 가려는데 나타났다. 길을 잃고 헤맸으나 결국은 그래도 스스로 찾아온 것이 다행이다.

 뒷부분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정리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시카와상이 급하게 공연 팜플렛 원고를 보내줘야 한다고 먼저 출발하자고 하여 버스로 이동했다. 가까운 휴게소 피씨방 앞 공터에서 이시카와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 30분 가량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7시. 메구미 언니와 나가이 상이 와 계셨다. 메구미언니는 일찍 도착했지만 어차피 행진대로에 결합할 수 없으니 몇군데 관광을 했다고 한다. 언니도 오키나와가 처음인데 건물도 경치도 전부 너무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확실히 일본이 아니라고 했다.  

 밤 9시 40분쯤에 빨래를 돌려놓고 (한 번 돌리는데 100엔이다) 조성일, 박미영, 이찬영, 김영택, 이은진, 메구미, 요오꼬 상이 함께 극장 답사 갔다. 극장은 숙소에서 시장길로 10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영화극장이기 때문에 조명도 별로 없고, 음향은 따로 셋팅을 한다고 했다. 예상대로 무대는 상당히 좁았다. 그러나 현장에 강한 우리 아니던가... 어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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