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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벗들과의 즐거움

지난 주말에 20년 지기 소중한 사람들과 일박 이일로 야유회를 갔다.

장소는 울 남편이 위탁, 운영(무늬만 ?)하는 계곡 가든.

9가족이 모였다. (연구네, 민제네, 세라네, 희경이네, 기상,경희가족, 혜진네, 태수네, 상희, 우리)

사실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게 일이되는 게 싫어서...(미안... 담엔 꼭 연락할께)

또 무지 바쁘고 시간도 없고...

어른 15명에 아이 넷... 정말 아이들이 예쁘다...

가끔 보니 더 예쁘다. 맨날 끼고 살면 싸우겠지만...

 

예울림 활동을 거쳐 메이크업으로 꽃다지 공연을 빛내준 이혜진(지금은 이예나)의 딸 채원과

서기상 곽경희 부부의 딸 승아

 

예울림에서 꽃다지 가수로 활동한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 를 부른 김세라의 아들 준찬

 

노노단에서 꽃다지로 가수 활동을 한 김태언(내일이 오면),

장희경(창살아래 사랑아) 부부의 둘째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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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마흔둘.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 언제였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면

역시... 청춘을 바쳐(?) 만들고 가꾸고 살았던 20대가 아니었을까?

물론 지금도 나의 활동은 진행형이고 또 지금 만나는 사람들도 누구 못지않게 소중한 동지들이지만

20대의 나는 예정에 없던 문화활동에 접어들면서 그 시절 누가 안그랬겠냐마는 정말 치열한 나날을 보냈다.

예울림 활동을 거쳐 꽃다지를 창립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문화운동을 펼쳐나가던 시절...

떠올리면 아~~ 옛날이여! 같은 소회가 아니라 아직도 생생한 몸의 기억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시기에 같이 활동했던 꽃다지 식구들은 정말 식구들이라 할 만큼 가까이 지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고 또 같이 살았던...

지금도 그들은 나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다.

내가 구속되었던 96년, 추운 날씨에 눈이 오나 바람불거나

매일매일 탑골공원에서 거리공연을 하며 민예총 사무실에서 밤샘 농성을 하며

나를 지켜준 사람들...

구치소에서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한명 한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줄창 입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던 가사말.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금 이순간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늘을 살아야지" (조민하 곡 <행복한 인생> 중에서)

아직도 이 노래를 흥얼거릴라치면 그 때 그 감정이 되살아난다.

늘 이 노래를 간직하며 그 때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야지... 하며 되새기고 되새긴다.

그들에 대한 소중하고 고마운 마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지.

 

5년 전 꽃다지 10주년에 꽃다지 출신 중 가능한 사람들을 모아 10주년 기념 공연을 했을 때

그들은 대부분 아이엄마, 아빠가 되어 하나 혹은 둘씩 아이들을 데리고 연습에 참여를 했었다.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밖에서 애들과 놀던 나는 순간순간 깜짝 놀랜다.

어쩌면 지 엄마, 아빠를 이렇게 닮았는지... 당연하다고? 물론... 그렇지요. ㅋㅋ

아이가 없는 나는 늘 입으로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같이 키우며 사는거지... 라고 하지만

그럴 성의가 부족하고 또 그럴만한 기회도 많지 않은게 현실이다.

이 아이들이 크면서 그 시절의 엄마 아빠의 삶을 늘 소중하게 인정해주길...

그러기 위해 같이 열심히 잘 키웠으면 좋겠다.

 

* 피에쑤 : 사진은 김현정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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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세에 대한 주인집 아줌마의 항변

지난 번 옥탑방 아저씨의 죽음과 전기세에 대한 민망한 일이 있은 후

담날 저녁 술한잔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데 집앞에서 주인집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그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 대뜸 전기세 받기로 했냐고 물으셨다.

나는 벌컥(술 한 잔 먹은뒤라 다혈질인 내 성질 그대로) 화를 냈다.

무슨 전기세를 받냐고, 아저씨 돌아가셨다는데, 그 이야기를 안해주고 전기세만 받으라하면 어떻게하냐고,

아줌마가 받아주시든지 했어야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아느냐고,

또, 아무리 딸이라지만, 아주머니 같으면 같이 살지도 않았고, 돌아가신 분 전기세 대신 내고 싶겠냐고

으다다닥... 해댔다.

전기세 안받는다고 했느니 신경쓰지 마시라고...

 

며칠 뒤 아침 출근길에 집앞에 나와 앉아계신 아주머니와 또 마주쳤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가는데 부르신다.

"저기..."  괜스리 주변을 살피신다. 그리곤 아주 수줍고 부끄럽게 웃으신다.

볼도 살짝 상기된 느낌이다. "전기세 내가 줄께" 하신다.

나는 "됐어요. 그럴려고 말씀드린 거 아니예요. 그냥 저는 아저씨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전기세 받겠다고 전화한 게 너무 민망하고 그래서 그랬어요" 했다.

"아니, 내가 아저씨 돌아가셨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리고 내가 줄께. 줄건 줘야지"

"아니예요. 됐어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주머니가 악의가 있으신 분은 아니고 아주 순박하신 분인건 알고 있었는데

순박하다 못해 뭘 잘 모르시기도 했지만...

기양 내가 술김에 좀 심했다 싶기도 했다.

 

또 며칠이 지났는데 아주머니가 부르신다.

"전기세는 이번 달에 수도세하고 정화조 청소비 나오면 그거 계산하고 나머지 내가 줄께" 하신다.

"아니라니까요...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 나도 사실 그집에서 못받은게 많은데 전기세는 그 딸한테 내가 내라고 했어.

근데 나한테 주라하면 내가 받아놓고 안줬다고 할까봐... 어른이면 모르겠는데 어리더라고.

괜스리 내가 중간에서 떼어먹은 것 같은 오해 받을까봐 직접 주라고 한거야. 

그리고 그 집은 엄마도 있고 아파트도 자기네 거래잖아."

덧붙여 그 아저씨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주 모질게 말씀하신다.

돌아가신 양반을 놓고 별소리 다한다 싶었지만 마땅히 대꾸하기도 그래서 가만히 듣기만 했다.

 

어쨌든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름대로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싶어서 그냥 알겠다고 했다.

주면 고맙지. 안줘도 그만이고... 싶지만 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저씨 일찍 돌아가시고 아들하나 키우며 30년을 혼자 사셔서

뭘 잘 모르고, 그저 착하고 순박하기만 한 분이지만

그러다보니 고지곧대로만 생각하시고 이해 못하는 것도 또 많은가보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오해는 약간 풀린 것 같다. 

마음은 좀 홀가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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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정신, 누가 또 가져가려나

스무살, 어린 날의 상처였다고 지금은 머리로도, 또 어느정도 감정으로도 정리가 된 기억들이고

어느 덧, 20년이 지났다.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힘을 느꼈고, 그처럼 벅차고 또 신났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세상이 곧 바뀔거라 믿었다.  그 시기에 대학을 다녔고, 또 운동을 하고 그래서 지금도 내가 사는 방식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해본 적이 없다.

정작 그 시대를 움직인 사람들은 민중이고, 노동자인데 마치 몇몇 이름있고 잘나가는 사람들이 다 만든 것처럼 이야기되는 요즘이다.

군정시대가 끝나면서 우르르 정치권에 줄을 서고, 그 언저리에서 뭔가 하나씩 꿰차려고 하는 자들이 80년대를 움직이고 또 민중을 조직한 것처럼 보여지는 기가막힌 세상이라는 거다.

 

나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언더팀에 있을 때 친했고, 또 나한테 많은 이야기를 해준 훌륭하고도 날리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 비서실에 있었고,

96년 내가 다시 구속되어 구치소에 있다가 나왔을 때 공연장에 찾아와

나보고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사냐고 했다.  그냥 조용히 고생했다...하고 갈 것이지...

 

정신 못차린 사람들 내 주변엔 무지하게 많다. 그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이 모두 정치권에서 성공하고 이제는 세상이 바뀐 것 같고, 또 운동도 바뀌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 말고 학생운동 때도 이름 없이 밑에서 활동하고 현장에 들어가

20년동안 꾸준히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노동자 삶의 변화시키고 세상을 제대로 바꾸기 위해 싸워온

멋진 선배들이 내 주변엔 훨씬 많다.

그런 선배들, 활동가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두 자기들 세대에서 끝난 것처럼 떠들지 말아주길...

 

정신차린 자들이 정권에 붙어 6월 항쟁이 자신들의 성과인 양 지들끼리 축배를 드는 꼴을,

정신 못차린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으로 바라본다.

그들만의 잔치에 끼고 싶지도 않다는 거지.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저 깊은 어둠 밑바닥에 묻혀있던 오래된 상처를 끄집어 내는 건

내 기억 속의 6월 항쟁이 그냥 저렇게 미화되고 박제화되는 게 싫어서였던 것도 있다.

물론, 20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생각도 들었지만

 

96년에도 구속되었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 작년 2006년에 못내 불안했다.

10년 주기로 한 번씩 들어갔다 나오는 징크스가 있는 거 아닐까 하고...

꿈도 많이 꾸었다. 경찰한테 쫒기는... 도망가도 찾아내고 다시 탈출해서 도망가면 또 바로 뒤따라 오고 

계속해서 내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은 불안감에 쫒기며 뛰고 뛰어도 꿈이라 발이 내맘대로 안 움직이는...

앞으로도 가끔씩 악몽을 꾸겠지만  

그 상처도 나를 만들어 온 과정이라는 걸 조용히 생각하면서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에게 추모의 마음을,

그리고 용기있는 시민, 노동자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보내며

그냥 나는 내 일상을 고민하며 6월을 기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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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에 대한 나의 기억 (3)

 하루 종일 잤다. 집이라는 게 꿈같았다. 저녁에 막내가 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사실은...” 경찰들이 찾아와서 집을 막 뒤지고 했다고... 자기 방도 들어왔었다고...자기가 화를 냈다고, 왜 그러냐고... 하지만 정말 겁났었단다. 침대 밑에 있는 자료들을 들킬까봐... 그 사람들 웃긴다고 했다. 언니 책꽃이에서 책을 다 집어갔는데, 난쏘공도 가져가더라고, 그 책은 자기네 반 학급문고에도 있는 책인데...

밤에 무서워서 아빠한테 이야기를 했단다. 아빠가 그 자료를 꺼내서 뒤적거리더니 전부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 보일러통에 넣어 모두 불살랐단다.

기가 막혔다. 몇 년간 써온 일기책들도 전부 있었는데... 하지만 동생이나 아빠를 탓할 순 없었다. 혼자 몰래 지하실에서 가슴 졸이며 책들을 태웠을 아빠의 마음을 생각하곤 아무소리 안했다.


 하루를 쉬고 학교에 갔다. 이미 소문은 나있었다. 몇몇 선배가 물었다. 어디까지 불었는지, 무슨 낌새는 없는지.. 그저 나는 알리대로 말했고, 별 일 없을 거라고 했다. 당분간은 사람들 만나지 말라고 했다. 써클 후배들하고 술 한잔 간단히 하고 집에 왔다. 집에 오니 그 형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오후에 만나잔다. 명동 로얄호텔 커피숍에서...

“왜요?” “학교 생활 잘 하나 당분간 만나서 확인해야 하니까... 낼 나와” “네”

학교에 갔다가 그 이야기를 하고 명동으로 갔다. 그 자는 학교 동향을 물었다. 그 선배 봤냐고... 안 나타난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란다. 알았다고 했다. 그는 사우나 갔다 들어간다고 나보고 먼저 가란다. 그러기를 한 달 정도... 불쑥 불쑥 전화를 집으로 걸어 만나자고 하거나 내가 없으면 엄마나 아빠한테 다음날 약속을 전하기도 했다. 만나서는 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가끔은 술한잔 하자고도 했고, 이상한 술집같은 데 들어가자고도 했다. 나는 번번히 순진한 척 이런 델 왜 가냐고, 도망치듯 헤어지곤 했다. 

집에서는 서로 눈치를 봤다. 학교에선 사람들을 만나기가 겁났고, 또 힘들었다. 모든 선이 끊어졌다. 무슨 수를 써야 했다.

어느 날 작정을 하고 아빠한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놈 때문에 못살겠다고... 학교가도 친구들이 형사따라붙으니까 이상하게 보고, 또 만나면 자꾸만 이상한 데 데려가려고 한다고... 아빠가 전화오면 이야기 좀 하라고, 나 이제 그런 거 안하니까 그만 만나라고 하라고. 아빠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음 날 또 나오라고 해서 이번엔 남영동 쪽에서 만났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학교 생활 열심히 하고, 이런 짓은 절대 하지말라고... 어쩌구... 하더니 마지막인데 술 한 잔 하고 헤어지 잔다. 아빠가 전화를 하셨나 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조금 걸어나오니 술집이 즐비하다. 숙대 입구니까... 아무데나 들어가자고 했더니 이런 분위기는 싫고 어쩌고 하면서 자꾸만 걸어간다. 널린 게 호프집인데 뭘 찾는지... 용산 쪽으로 걸어가다가는 술집들은 사람도 많고 번잡하니 여관방을 잡아서 조용히 술을 한 잔 하잔다. 기가 막혔다. 미쳤냐고... 그런 델 왜가냐고. 벌컥 화를 냈다. 내가 그 자에게 처음으로 화를 낸 것 같다.

그게 아니고... 하면서 길에서 실갱이를 벌이다가 화가 나서 그냥 가겠다고 인사하고 돌아서서 뛰어왔다. 따라오면 어쩌지? 이판 사판이지 뭐...하면서 뛰었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 사건은 끝이 났다. 그런데 학교에서 다시 선을 연결해 뭘 하기가 힘들었다. 한창 사투가 치열하게 벌어질 때라 문건을 구해 읽어야 하는데 힘들었다. 가끔씩 어렵게 선배에게 문건을 몇 개 받아서 집으로 가져가 침대 밑에 숨겨놓고 읽었다.

어느 날 밤 아빠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내 방 문을 열었다. 난 읽고 있던 자료를 이불 속에 넣었다. 아빠는 화를 냈다. 이런 짓을 또 하다니.. 네가 정신을 못차렸구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결국은 또 싸우고 말았다. 아빠는 돌아서며 “차라리 나보고 죽어 없어지라고 해라.” 하셨다.

혼란스럽고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학교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집에서도 늘 서로 눈치만 보고... 동기들 몇 명과 가끔씩 술을 한 잔 하며 학내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갔다. 동기와 술 한잔 하고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집으로 들어왔다. 그날따라 친구가 데려다 준다해서 버스 정류장에서 같이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저 앞에 막내가 뭔가를 가슴에 끌어안고 내려오고 있었다. “야, 어디가?” 하고 내가 불렀다. 막내는 날 보자마자 엉엉 울었다. “왜 이제와? 어디갔었어? 아빠 돌아가셨어” “뭔 소리하는거야, 너 왜 그래?” “아빠가 아까 돌아가셨단말야!!!”

친구한테 인사도 안하고 나는 동생과 택시를 잡아탔다. 서안복음병원 영안실...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다. 엄마는 들어서는 날 붙잡고는 “에고,에고... 이 박복한 것들...” 하고는 오열을 토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멍 할 뿐.

조금 있다가 작은아빠가 들어와 아빠의 유서를 내게 주었다.


장례를 치르고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빚이 많아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다. 이사를 하던 날 큰 고모가 오셨다 가시며 나를 불렀다. 내 손을 꼭 잡고는

“느이 아빠가 네 걱정을 젤 많이 했다. 너 거기 붙잡혀 갔을 때 네 아빠, 회사일 다 팽개치고 너 찾는다고 여기저기 안알아보고 다닌 데가 없다. 니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때 느이 아빠가 거기 병원 공사 시작할 때 잖니? 그 중요한 일을 다 팽개치고 다녔으니 회사 일이 문제가 생겨도 생겼지. 그것 때문에 밤잠을 못잤다. 오죽하면 그 자존심 강한 니 아빠가 고모부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겠니. 그런데 고모부도 안좋을 때라서, 진작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결국...훌쩍, 아뭏튼 잘 살아야 한다. 네가 집안 잘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

회사가 부도나기 하루 전 아빠는 바로 아래 동생과 엄마에게 시장을 보고 오라고 했다. 날도 많이 덥고 하니 입맛도는 맛난 것 좀 사오라고... 애들 좋아하는 것 좀 많이 사오라고.

엄마와 동생은 시장을 보러 갔고, 그날따라 통닭을 먹고 싶다는 동생의 말에 닭 튀기는 동안 이것 저것 구경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아무리 벨을 누르고 두들겨도 문을 열어주질 않았단다. 잠이 깊이 드셨나 싶어 옆 집에 이야기를 하고는 들어가 담을 타넘어 동생이 대문을 열었단다. 현관에 들어서 안방으로 가도 아빠는 안계셨고, 이방 저방 열어봐도 안계셨다. 구두도 그대로 있으니 슬리퍼 신고 요 앞에 담배 사러 나가셨다 싶어, 동생이 화장실에 갔다. 문을 열자마자 동생은 비명을 지르고 자지러졌다. 아빠는 화장실에서 목을 매셨다.

유서는 짧았다. ‘미안하구나, 못난 아빠를 용서해라. 엄마랑 부디 다들 행복해라’


87년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공개되면서 학교 안팎이 술렁거렸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탁! 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했다. 숨이 컥 막혔다.

아빠의 죽음 이후 난 학교에 복학을 했고, 반 년간 조직생활을 하지 않고(못하고) 살았었다.  그런데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접하고 전기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나는 살아남았고, 박종철 열사는 돌아가셨다.

나는 살아있고, 아빠는 돌아가셨다.

잊고 있던, 아니 잊을 수 없었던, 그러나 깊이 묻어버리고 싶었던 기억들이 치솟아 올랐다.

살아있는 게 너무 비겁하고, 미안했고, 또 부끄러웠다. 죄책감도 들었다.

술을 왕창먹고 대성통곡을 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그 동안 틀어막아놓았던 소리를 터뜨렸다.


나 때문이야, 내가 아빠를 죽였어, 아빠가 그날 '차라리 아빠보고 죽으라고 해라' 하고 돌아설 때, 아니야, 아빠, 나 사실 아빠 좋아해, 사랑해... 근데 아빠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라고 가서 아빠를 안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아니, 세상 모든 고민 혼자 떠 안은 듯 잘난 척, 밖으로만 돌고 심각한 척 하지 말고, 한 마디라도 같이 나눴더라면,

아니, 그날... 내가 술 먹지 말고 그냥 집에 일찍 들어만 갔더라면,

아니야... 내가 그 때 죽었어야 해. 물 고문 받다가 콱 죽어버렸어야 해. 비겁하게 살고 싶어 울며불며 매달리지 말고 그냥 버티다 죽었어야 해.

그러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지도 모르잖아.

난 원래 죽고 싶어했었어. 늘 죽고 싶다고 해놓고 고작 그 정도도 못견디고 살겠다고 비겁하게, 살려 달라고 구차하게...

내가 죽었어야 해. 내가 죽었어야 한다구...


술집 바닥을 데굴 데굴 구르고 발버둥을 치며 울었다. 그리곤 정신을 잃었는지, 필름이 끊겼는지...

나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 전에 학생운동 안에서 조직 선을 맡았던 언더 팀 선배들은 대부분 구속되었다. 수소문 끝에 써클 선배가 소개를 해주었다. 문화운동단체의 언더 조직을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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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에 대한 나의 기억 (2)

 도대체 시간은 얼마나 흐른걸까? 내가 붙잡힌 건 해가 지기 전 6시 정도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캄캄하다. 경찰들은 그 선배를 검거하는 걸 당연히 실패하고 투덜거리며 돌아왔다.

아주 조그맣게 내가 "저는 이제 풀어주세요"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이들은 내가 둘러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조금 늦게 갔으니 그가 낌새를 채고 튀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어떤 결과였어도 내 운명은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달라지는 걸까?

다시 눈을 가리고 아까 있던 그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를 혼자 방안에 앉혀두고는 모두들 나갔다. 다른 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긴 어딘지, 시간은 얼마나 됐는지... 좀 지나면서 주위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까의 그 욕조엔 여전히 물이 채워져 있고, 그 옆에 세면대와 변기가 있다. 그리고 병원에 있는것 같은 침대 하나... 창문이 있었다. 세로로 길쭉한... 여긴 지하는 아닌 거 같다.

물을 계속 틀어놔 버려 물바다를 만들어 볼까... 그럼 무슨 일인가 일어나지 않을까?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찬찬히 생각을 해봤다.

언젠가 내가 속한 언더조직 선배가 끌려가 당한 여러가지 고문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요령도 이야기해주었더랬다. 더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리바이를 생각했다.

언더조직에 있던 우리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알리빠따라는 걸 설정해놓는다.

잡혀가게 되면 다 누구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거다. 나도 있었다. 그 사람은 이미 작년에 빵에간 선배다. 그리고 나는 오픈써클인 노래패 활동만 이야기하면 된다.

나는 딴따라다.. 그냥 노래가 좋아서 써클활동을 하는 거고, 그 써클 선배가 나를 꼬셨고, 이것저것 부탁했다. 그 형과 나는 애인사이다. 머리속으로 되뇌이고 되뇌었다.

 

엄마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휴학할 때 엄마 아빠와 엄청 싸웠다. 나는 학교를 때려치겠다고 했고, 두분은 절대 안된다였다. 싸우다가 합의를 본게 1년간 휴학이었다. 내가 엄마한테 아주 모진 소리를 했었다. 아빠한테 난생처음 따귀를 맞았다. 그 이후로 계속 냉전상태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미안했다. 눈물이 흘렀다.


문이 열리더니 나이가 좀 든 남자가 들어왔다. 울고 있는 나를 위로했다.

처음엔 내가 하도 체구도 작고 어려보여서 십대쯤 되는 여공인 줄 알았단다. 그런데 내 가방을 가서 다 뒤져보고 내가 대학생인 걸 알았단다. 잘만 하면 금방 나갈거라고...

누군가 문을 열고 쟁반과 속옷, 칫솔을 가져왔다. 옷갈아입고 밥 먹으라며 나갔다.

쟁반엔 무슨 해장국같은게 있었다. 그리고 포장된 팬티와 러닝이 있었다.

여기는 전부 카메라 장치가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속옷을 갈아입었다.

밥을 먹었다. 그래도 먹어야 하니까... 먹어두자...우걱우걱 쑤셔넣으며 또 눈물이 났다.


다시 그 남자가 들어왔다. 학생수첩을 펼쳐 적힌 일정들을 읽으며 물어봤다.

내가 속한 조직이 어디냐고...나는 울림터라는 노래써클을 한다고 했다. 그거 말고 다른 조직 없냐고, 그런 게 뭐냐고 내가 다시 물었다.

수첩에는 바로 며칠전 5.3 인천 집회가 적혀있었다. 종5(종합관 5층)이라고 적힌 내 세미나 일정을 종로 5가 집회로 생각했는지 그것도 물었다. 난 모른다고 했다. 종합관 5층 수업이라고...

그자는 갑자기 여기가 어딘지 아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남영동 블랙박스...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란다.

그 와중에 나는 진짜요? 라고 물었다. 그렇단다. 난 다시 거짓말 마세요. 저 겁주려고 그러는 거죠? 했다. 그 사람이 서랍에서 무슨 서류같은 걸 꺼내 보여준다. 거기에 그렇게 써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너 같은 건 죽어나가도 모른다고 했다. 자기들은 그런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곤 나보고 잠깐 나오란다. 나를 데리고는 옆의 어느 방으로 데리고 간다. 그 방문을 열었다. 거기엔 내가 잘 아는 83선배가 얼굴이 퉁퉁 붓고 피멍이 든 상태로 앉아 조사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서로 깜짝 놀랐다. 아까의 비명소리가 저 형이었을까?

문을 닫더니 다시 원래 있던 방으로 데려갔다. 그 사람 아냐고.. 알아요. 우리 써클 아래층 마당패에 있는 선배예요. 이름 아냐고... 별명밖에 몰라요.

"저는 그냥 나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저 좀 내보내 주세요."

"협조만 잘하면 금방 나갈 수 있으니까 걱정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잘해"

아까 생각해 두었던 대로 나는 나의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자는 내말을 믿는 듯 했다.

나는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내 대학 생활은 그러하다고 굳게 믿었다.


이젠 잠을 자란다. 그리곤 여경이 하나 들어왔다. 그는 나가고 여경은 간이 침대를 펴고는 누웠다. 양치질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 긴 하루가 끝난건가? 피곤했다. 꼭 수영을 하고 난 뒤처럼 몸도 뻐근하다. 아프다는 생각은 안들었다.

며칠 전 5월 1일 메이데이, 가투가 끝나고 연대앞 다리네(실내포장마차같은) 술집에 앉아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는 동기들은 내 성년식 파티를 해주었다.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그 해가 만 스물이 되는 생일이었다. 동기들은 재수하고 온 경우 나보다 두살이 많았다. 파티라고 해봐야 쵸코파티같은 거에 굵은 양초에 20이라고 쓰고 그냥 술이나 먹는거지만... 그리곤 인천 5.3 집회에 갔었다. 거기서 전경이 던진 돌에 맞아 허벅지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다시 사흘뒤 학교 대동제 공연 때 혈서를 썼고, 이틀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료를 정리해서 막내 방 침대 매트리스 밑에 깔았다. 막내에겐 아빠한테도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동생은 며칠전 공연 때 내가 혈서를 쓰는 걸 보고 대충 눈치를 챘는지 아무말 없었다.


눈을 떴다. 또 쟁반에 아침밥을 가져왔다. 그래도 어제보단 잘들어간다.

어제의 그 자가 또 들어와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성심성의껏 대답을 했다. 내가 믿고 있는 것만큼.

지루한 하루가 또 지나갔다. 저녁밥을 먹고나니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웅성웅성 지들끼리 뭐라뭐라 하는데 우리집을 털었나보다. 식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젠 어쩌나...

그들이 나가자 다시 그자가 앉아 이야기를 한다.

아버님도 점잖으시고 아주 훌륭하신 분이더라고...집도 괜찮게 살더구만 왜 이런 짓을 하냐고...

"집에 갔었어요?" 식구들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 내가 무슨 일 터질 때마다 집에 안들어가곤 했으니 별로 이상하게 생각은 안할거라 여겼는데... 얼마나 다들 놀랬을까 싶었다. 미안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우리 할머니 제삿날이다. 친척들이 전부 와계셨을텐데. 온 동네 소문은 다났을 거고, 난리난리칠 아빠와 고모얼굴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월북을 하시고 빨갱이 집안이라고 아빠 식구들은 무지하게 수모를 당하며 사셨고, 결국은 마을을 떠나 주민등록까지 위조해 살기도 했었단다. 아직도 빨갱이라면 치를 떤다. 아니 집안 다 말아먹고 사람들 다 죽이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틀을 더 있었다. 특별히 더 진전된 조사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지 그 자는 나에게 애인하고 키스는 해봤느냐, 여관은 몇 번이나 갔었냐...

이런 질문들을 해댔다. 그런 거 모른다고 딱 잡아땠다. 별로 말 섞고 싶지 않았고, 화를 내고 싶기도 했지만, 뒷감당할 자신도 없고, 그저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그 자는 철없어 보이는 나에게 성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개XX!) 뭔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대꾸도 없이 듣고 앉아 있었다.


그날 아침은 어수선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고... 그러더니 나보고 짐 챙겨서 나오란다. 어디로 또 가는걸까? 운명에 맡긴다는 마음으로 아무생각없이 따라나갔다. 이번엔 눈을 가리지 않았다. 어떤 사무실 같은 방에 들어갔다. 아빠가 앉아계셨다. 깜짝 놀랐다. 아빠는 앉아서 신병인수서 라는 걸 쓰고 계셨고, 조서도 다 읽고 있었나 보다.

앞으로 쓸데없는 데 좆아다니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그 자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 나가는 거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랑 나가는데 그자가 다시 불렀다.

당분간은 수시로 더 만나야 한다고... 연락하면 그 때 그 때 나오라고... 했다. 역시 아무생각이 들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빠는 아무말 없이 내 어깨를 감싸며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푹 자라” 하셨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렀다.

집에 들어가자 마자 엄마는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벌겋게 부어오른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무슨 일 없었냐고 물으셨다. 그런 일은 없고...그냥 많이 맞았다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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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항쟁에 대한 나의 기억(1)

한 몇 년 전만해도 6월항쟁 기념행사, 혹은 이한열 열사 추모행사는 늘 참석했던 것 같은데

근래들어서는 굳이 일부러 가서 참여하는 일은 없어진 것 같다.

올해가 87년 20주기인데...

지금 나에게는 6월항쟁보다 7,8,9 노동자 투쟁 관련 고민들이 더 커서인지 웬지... 와 닿지가 않는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6월항쟁은 관주도의 행사가 되어 버린 느낌도

영향이 없다 할 수 없겠지.

2000년, 광주항쟁 20주기 때 5.18이 기념일이 되고 정부 주도의 행사가 되어버리던 날

나는 광주에 있었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5.18이 되면 광주에 내려가 행사참여도 하고

망월동 묘역도 참배하는 일정은 당연한 나의 삶의 일부였는데...

그날 본 광주의 신묘역과 기념행사는 너무 기가 막혔다.

완전히 유원지가 되어버런 신묘역, 광주의 그날의 기억들은 그저 사진 몇장으로

기념 코스가 되어 버렸고, 기념행사는 내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 같은 축제의 분위기 였다.

그날 같이 갔던 선, 후배들과 나는 이제 5.18 주간에 광주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 모양을 보는 것이 너무 아팠다. 

어제 저녁에 KBS 스페셜에서 87년 2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했다.

6.10도 기념일이 되고 또 관 주도의 행사를 한다. 5.18이 그랬듯, 6

.10도 이렇게 내 기억 속에만 간직해야 하는가...

 

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고 학생운동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와 광주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이 시대에 대학생이었던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해주는 큰 사건이었다.

그렇게 학생운동을 하던 나에게 87년의 기억은 뭐랄까 공포와 흥분... 그런 느낌이 교차하는 사건이다.

87년은 다 알고 있듯이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공개되면서 시작되었다.

나에겐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엄청난 공포였다.

한 해 전 86년 나는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수배중인 어떤 선배의 부탁으로 그 집에 갔던 적이 있다. 골목을 들어서는데

골목어귀에 포니 승용차가 한대 서있었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승용차는 검은색 포니였다. )

운전석엔 어떤 남자가 신문을 보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전봇대 옆에서 또 다른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동물적인 본능이랄까 나는 이들이 경찰이라는 걸 느꼈다. 걸음이 빨라졌다.

조금 앞쪽에 또 다른 남자가 서있었다. 뒤따라오는 발자욱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다.

뛰었다. 다다다닥... 찻길에 다다랐을 때 남자들은 내 뒷덜미와 허리춤을 잡아챘다.

왜 그러냐고 했지만 저항할 힘이 모자랐다.

승용차에 태워지고 수갑이 채워졌다. 고개를 숙이라며 뒤통수를 눌렀다.

그리곤 그 위에 양복 윗도리를 덮었다.

정말 경찰일까? 아니면 납치범? 온갖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사람들의 얼굴도 스쳐갔다.

얼마나 갔을까... 철문소리같은게 들렸다. 차가 멈췄다.

내 눈을 가리고는 나에게 내리라고 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구두발자욱 소리만 들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가는지 올라가는지...

다시 약간을 걸어 또 문 소리가 났다. 웅성거리는 소리...

눈을 덮었던 건 누군가 벗겼다. 갑작스런 빛에 잘 보이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대여섯명의 남자들은 다짜고짜 온갖 욕설을 하며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 가방을 뒤지던 한 남자가 소리쳤다.

"이 X 완전 빨갱이 아냐?" "야, 이거 완전 골수야 골수!" 그러더니 다시 이어지는 구둣발과 손찌검.

나는 아픈 줄 몰랐다. 머리속에서는 계속 어떤 일이 꼬였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또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하나... 누구를 갖다 대야 하지?

"좋은 말 할 때 이야기해. 000 이 어딨어?"  "제가 어떻게 알아요?"

"어쭈? 이게? 그럼 그집엔 왜갔어?"

"학교에서 어제 우연히 만났어요, 뭐 좀 갖다달라고 하기에 간거예요"

"지금 어딨어?" "몰라요" "어디서 만나기로 했을 거 아냐?"

"아니예요, 학교에 가면 알아서 연락한다고 했어요" 

"이거 안되겠네... 너 잠바 벗어!" "왜요?" "벗으라면 벗어"

남자들이 내 팔을 잡고 일으키더니 잠바를 벗겼다. 그리곤 내 팔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무슨 소린가 들려 돌아보니 이미 욕조에 물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아... 선배들한테 말로만 듣던 일들이 드뎌 내게 닥친거구나.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나를 물속에 쳐박았다.

욕조 바닥에 흙과 녹 조각들이 보였다. 그 와중에도 더럽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참을수 있는 만큼 참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발버둥을 쳤다. 욕조 밖으로 머리를 꺼냈다.

컥! 케엑! 쿨럭쿨럭...켁!!

"어딨어? 빨리 얘기해" "몰라요, 진짜 몰..." 다시 물속으로 쳐박혔다.

그러길 몇차례, 나는 정말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죽을 수 있는 거였구나...

팜에서 읽고, 이야기로만 듣던 그런 일이 결국 나에게 일어나는 거였구나.

무서웠다. 엄마, 아빠의 얼굴과 몇몇 친구들의 얼굴들이 스쳐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에 물이 가득차 몸이 퉁퉁 부어가는 것 같았다.

"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엉엉 울었다. 공포에 싸여 나는 아이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다 말할께요. 다, 살려주세요"

"진작 그럴 것이지, 000 어딨어?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근데 정말 난 그가 어딨는지 몰랐다. 약속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야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학교앞 00 주점에서 8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어? 시간 다됐잖아? 데리고 나와"

그리곤 한 남자가 뛰어 나갔고 다른 남자는 내 수갑을 풀어주며 옷을 입으라고 하곤 수건을 주었다.

하두 발버둥을 쳐서인지 온몸이 젖어있었다. 

잠바만 걸치고 젖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닦으며 그 남자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여기는 도대체 어딜까? 서대문경찰서? 마포경찰서? 내가 아는 동네면 도망갈 수 있을까?

다시 이리로 들어온다면 정말 죽을 거 같았다.

나가서 거짓말이었던게 탄로나면 나는 이사람들 손에 죽을 거야.

이번엔 수갑을 앞으로 채웠다. 승용차에 타고 신촌 뒷골목까지 갔다.

서대문 경찰서나 마포경찰서는 아닌거 같다. 이렇게 멀지는 않을테니까.

운전자와 뒷자석에 나만 남겨두고 세 남자가 술집을 향해 갔다.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양손을 잡아빼니 손이 수갑에서 빠진다. 한 손을 반쯤 빼고 앞자리를 살핀다.

문이 열리진 않을거 같았다. 발로 세게 걷어차면 열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이 돌아와 문을 열때 밀고 뛰어나갈까? 그런 건 영화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그랬다가 실패하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이렇든 저렇든 결국 난 이들 손에 죽을 거 같았다.

 

휴우~~ 안되겠다... 힘들어서 더 못쓰겠다. 눈물이 난다.

기억해내는 게  너무 힘들다.

그리고 지금은 밤이라 깊게 생각하면 잠을 못잘거 같다.

근데... 언젠가는 한 번 털어내 버리고 싶은 이야기인데...

어젯밤 KBS 스페셜을 보고 잠을 또 못잤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어떻게 해야 가벼워질까? 털어내고 싶은데.

일단은 그만 써야 겠다. 쓰던 원고나 마저쓰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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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근과 연영석

엊그제 전교조 대구 남부지회 직무연수 교육을 갔다.

내가 하는 건 늘, 노동자문화 아니면 민중가요 변천산데...

굳이 생각하자면 교사들 직무연수에 민가역사를 넣은 것이 좀 쌩뚱맞긴 하지만

작년부터 사이버노동대학 문화교육원 교육을 하기로해서 진행되고 있는 만큼

뭐, 그 연장선에서 받은 것일 수 있겠다 싶다...

하여간... 간만에 민가역사 교육을 하니 6,70년대 부터 시작해서 민가들을 쭉 뒤져보고 들어보고,

또 들려주고... 하게 되었다.

 

옛날 노래들... 나역시 옛 노래들을 들으면 참 감회가 새롭다.

내 인생에서 노래, 음악을 빼놓곤 이야기할 수 없을만큼...

노래 한 곡을 떠올리면 그 음악에 내 과거의 역사들이 다 배어있다.

무수히 많은 노래들로만 엮어도 내 인생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을 정도라고나 할까  ^0^;;

 

민가 이야기할 때 노래를 들려주기 전에 가사를 읊으며 먼저 불러주는 경우가 많은데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난 항상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라는 노래와

<다시 한 번 투사가 되어> 를 이야기할 때 아직도 목이 메인다...

<다.투.사>는 박창수 열사 추모곡이니 그럴 수 있다쳐도 그놈의 <무.무.자.> 는 왜 그런지 참...

 

그런데 이번에 내가 강의 마직막 부분에 최근 솔로가수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박창근의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노래를 따라부르다말고 울컥하더라는 거...

 

요즘 인천노동문화제 기획공연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는데

최근 노래들로 87이야기를 반추해보려하니 자연 요즘 솔로활동하는 노동가수, 민중가수들 노래말들을 꼼꼼히 분석하게 되는데 특히 꽂히는 게 연영석과 박창근 이더라고.

물론 전부터 그들 노래와 활동, 사상을 좋아했고, 그 외의 솔로가수들도 무지좋아하지만서두

87년으로 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바뀌었고,

노동자문화운동에서 고민해야 할 공존, 소통,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유연하고 형체없는 전선을 생각하면 특히나 와닿더라는 거지.

 

마침 오늘 창근이가 올라와 홍대 앞 클럽 '빵'에서 공연을 한다하고

또 연영석이 게스트로 나온다니 작품 구상을 하러 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네

그런 김에 노래가사 두개... 떠올리는데

두 노래가 잘 들어보면 비슷하다는 거지, 아니 일맥상통하다고 할까...

나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두 뭐... 상관없스~~~

 

 

이런 생각 한번 어때요? (박창근 글, 곡)

 



이런 생각 한번 어때요?

햇볓 따사롭던 어느 날 모든 것이 평온 해보이는 소녀 손에 쥐어진 소세지

그 녀석의 삶은 우리완 다르지 어떤 오감의 반응도 인정받지 못해

인간이 예쁜 입으로 공존을 이야기 할 때

그들은 오늘도 산채로 매달려 껍질이 벗겨지곤 하지


후라이드 치킨 좋아하세요? 생구이 삼겹살은 또 어떤가요?

멋진 그녀와의 데이트 화려한 조명아래 스테이크

오늘도 그대는 남의 살을 몇 점이나 삼키셨나요?

또 그대는 남의 젖을 몇 통이나 마셨나요?

의심 없이 통용되는 주저 없이 허락되는 이 모든 행위가 이 모든 가능이

오히려 당신에긴 악영향을 준다면 어떠하시겠어요?


나의 삶이 너의 삶과 맞물려 있고 인간의 불행 또한 다른 생명체의 불행을 먹고살죠

진정한 평화를 원하세요? 행복한 그대 삶을 꿈꾸나요?

파괴 없는 삶을 원하세요? 전쟁 없는 삶을 바라나요?

주어진 만큼만 누리는 것 나눠진 만큼만 갖는 것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 허락된 만큼의 욕망


간절히                              연영석 글, 곡


1. 누구는 뺏고 누구는 잃는가 험난한 삶은 꼭 그래야 하는가

앞서서 산 자와 뒤쳐져 죽은 자 그 모든 눈에는 숨가쁜 눈물이

왜이리 세상은 삭막해 지는가 아 나는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아- 음-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아 나는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아--


2.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과 오늘도 여전히 불안한 사람들

모두들 제각기 제 길을 가지만 난 아직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내 할 수 있을 때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만 갖는 세상

** 반복


3. 누구를 밟고 어디에 서는가 왜 같은 우리가 달라야 하는가

살아남기 위해 그렇다 하지만 그 모든 눈에는 고독한 눈물이

왜 이리 갈수록 지쳐만 가는가 아 나는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 반복

내 마음만큼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 갖는 세상

내 마음만큼 일하는 세상 내 마음만큼 갖는 세상을

**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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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할인마트 안가기

 

결혼하면서 12년을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단순히 우린 집을 얻을 돈이 없었고, 경기도 고촌에서 시부모님은 두분이 살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서 살겠다고 했다.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역할 분담은 필요했고 나는 활동을 하니까 집안 살림은 어머님이 다 해주셨다. 그런데 생활비가 문제였다.

어머니께 한달에 생활비가 얼마나 드냐고 여쭤보니 잘 모르신단다.

어머니는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전체 생활비를 운영해보신 경험이 없다. 독특하게도 아버님이 돈을 쥐고 필요한 걸 사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지금은 돈벌이를 하지 않으시는지라 자식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용돈을 얻거나 물품을 사오라고 하셨단다.

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일단 30만원을 드렸다. 쓰시다가 떨어지면 이야기하시라고...

우리도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조금씩 쓰면서 한달 생활비를 계산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하신다. 네? 그 돈 다 뭐하셨어요?

어머니는 추궁을 받으신 거라 생각하셨는데 조목조목 이야기를 해주신다.

파마하고.. 교회 헌금내고... 반찬사고... 신발도 바꾸고...집에 필요한 뭐 사고... 등등...

어머니는 용돈과 생활비를 구분하지 못하신다. 그렇게 살아보신 적이 없어서인 것 같다.

그렇게 하니 안되겠다 싶었다.

용돈은 용돈대로 형제들이 나누어서 드리도록 해야 하고 생활비는 생활비로 따로 정리를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시도한 것... 장을 같이 보기.

한 달에 두 번, 혹은 세 번을 장을 보러 같이 갔다. 어차피 열흘치나 보름치를 사야하니 차를 타고 싸다는 대형할인마트에 가서 필요한 걸 이것 저것 넉넉하게 사고 뭐하고 하니 두시간이 훌쩍 간다. 계산을 하니 20만원 정도가 나왔다. 헐~~

다리도 아프고 정신도 없고... 집에 와서 물건 산걸 열어보니 이런.. 별로 산게 없다. 남편이 좋아하는 술과 술안주거리... 약간의 찬거리... 생필품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또 장을 보러 가게 되었다. 결국은 마찬가지...

꼭 필요하지 않은 것도 참 많고, 한꺼번에 많이 사게 되니까 버려지는 것도 많다.

뭔가 대책이 필요한데....

며칠 뒤 친정에 제사가 있어 갔는데 엄마와 오빠가 장을 보러 이마트를 간다고 한다. 엄마는 이마트 가는게 영 못마땅 하다신다.

집앞에 재래시장이 있는데 거기가면 단골 아줌마들이 다 알아서 잘 챙겨주고 물건도 좋단다.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시장상인들도 먹고 살아야지, 맨날 무슨 마트가고.. 가봐야 정신만 없고, 봉투도 따로 사야하고, 물건도 좋지 않고, 별로 싸지도 않단다.

우리엄마 시골서 자랐고, 청주서 고등학교 나왔다. 그리고 살림만 하다가 아빠와 늦게 결혼해서 서울서 산지 벌써 30여년이다. 선거 때마다 싸운다. 나 꼴보기 싫어서, 운동권들 설치는 거 싫어서 당나라당 찍는다고...

그런 우리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 이게 출신성분 차인가?

나는 엄마한테 맞장구를 쳤다. 맞어... 그치?

대형할인마트 물건값 정말 싼가? 물건을 10개 20개 들이로 사면 어디서 사든지 싸게 해준다. 대형할인마트는 물건 값을 낮추기 위해 하청업체에게 무자비한 가격 횡포를 강요한다. 누구는 그런 이야기한다. 이마트는 교환, 반품을 군소리 없이 해준다고... 너무 좋다고...

자기네들이 전혀 책임지지 않고 물건 납품한 중소업체들한테 책임 물리면 그만이니 당근 교환, 반품 군소리 없이 해주지...

그리고 사실 별로 싸지 않다. 대형할인마트가 물건 값을 조금씩 올리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분가해서 둘만 사는 지금 우리는 일주일에 당근 1개, 호박 1개, 양파 2개, 무 1개. 이만큼의 재료도 필요하지 않다. 남는다. 마트가서 물건 살 일이 없다.

그치만 마트는 이제 더 이상 할인매장이 아니다. 오빠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간다. 1층에 놀이방도 있고 아이들 이것 저것 구경시키고 사주고, 또 같이 먹고.

먹거리 외에 가구며, 살림살이며 옷이며, 미용실에 병원에 문화센터까지...없는 게 없고, 모두 너무 싸단다. 아니 이제 굳이 싸다는 건 이유가 되지 않는다. 집 가까이에 저렴한 백화점과 문화센터를 겸비한 공간이 생긴 거니까.

분가하고 우리는 마트가지 않기로 약속했다. 노동자 탄압하지, 영세상인 다 죽이지, 또 중소업체에 횡포부리지, 주변 교통 마비시키지, 사람들을 소비 풍조에 물들게 하지, 자원 낭비하게 하지.. 뭐 이유를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고, 또 이런 배경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잘난척하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몰라서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거.

노동자 탄압하고 착취하고.. 그래서 불매운동 하자고 해도 사실은 거의 가능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옛날 낙동강에 폐수 방류한 두산 불매운동 할 때만 해도 약간 영향력이 있었지만 요즘은 별로 실천되지 않는다.

롯데 노조에 공권력 투입되고 롯데 불매운동 할 때 대학에 초청강의를 간적이 있는데 학생회 간부가 나한테 롯데 음료를 가져다 주었다. 내가 롯데 불매운동하기 때문에 안마신다고 하니까 당황하며 다른 걸로 바꾸어 주었다.

배달호 열사 돌아가시고 두산 불매운동할 때 내가 유일하게 마시는 청하도 두산 계열사 상품이라해서 눈물 머금고 소주마시거나 선배꼬셔서 백세주 마셨다. 뭔들 그런 실천에 동참을 안해봤겠는가... 그치만 역시 잠시 뿐이다. 어떤 상품엔 또 어떤 노동자의 피눈물이 배어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문래동 사무실 옆에 홈플러스가 있다. 사무실에 차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홈플러스 주차장을 이용하라고 한다. 24시간 무료... 크으~~ 아주 넓은 대형주차장을 완비한 사무실이라고, 마치 우리 땅인 양 맘대로 쓴다.

가끔씩 뭔가 급히 사야할 때, 사무실에 커피가 떨어졌을 때 갈등을 한다. 내가 그런 곳 안다닌다는 거 알고 옆자리 친구는 물건 살 때 꼭 자기가 간다. 생각해보면 참 얌체같은 짓을 한다 싶다. 나만 안가면 그만인가? 쩝~~ 그러면서 또 갈등...

나는 그냥 내 생각이 그렇고 우리 남편과 내가 약속했다고 알려주는 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이야기 한 건데... 그렇다고 주변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긴 싫고, 또 강요하기도 싫다. 없는 살림에 조금이라도 싼 물건을 사다놓고 두고 두고 쓰겠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선택이고 어찌 이를 탓할 것인가 말이다.

그러니 이 약속도 얼마나 지켜질 지는 잘 모르겠고, 또 어떤 식으로 타협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갈 때까지 가보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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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윗층 옥탑방 아저씨

재작년 7월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은 반지하에서 2층까지 두가구씩, 옥탑방 포함하여 총 7가구가 사는 다세대 주택이다.

우리는 2층 202호인데 무슨 연유인지 옥탑방과 우리집은 전기가 이어져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달이 옥탑방 아저씨가 우리에게 전기세를 1만원씩 주신다.

고지서에 보면 가구수 2, TV대수 2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수도도 가구 전체가 물려있어 두달에 한 번 집주인 아주머니가

인원수대로 요금을 나누어 받으러 다니신다. (덕분에 한 두집이 세탁기를 돌리면 물이 거의 안나온다.)

 

처음 몇달은 윗층 아저씨가 문을 두드리며(우리집은 초인종이 없다) 찾아와 돈을 주고 가시곤 했다.

그 아저씨... 나이가 50대 정도고 체구가 아주 작고 왜소하다.

얼굴은 창백하리 만치 하얗고 너무 착하게 생기셨다...

어디 호텔 경비를 하신다는데 24시간 교대인지, 주야간 교대인지 모르겠으나

새벽에 출근하기도 하고 어느날은 하루종일 집에 계시기도 한단다.

부인과는 이혼을 했는지, 자식은 있는지...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고 혼자 사신다.

남편과 나의 생활 사이클이 불규칙해서 아저씨를 만나지 못할 때가 많다보니

한두달씩 밀려 두달치, 세달치를 주시곤 하신다.

어느날은 아저씨가 찾아오셔서는

'이번 달은 제가 돈이 없으니 다음달에 꼭 같이 드리겠습니다.' 하신다.

전기세 만원도 없는 때도 있다니 참 힘들게 사시나 보다.

 

1년쯤 지나 작년 하반기 부터 아저씨가 통 찾아오시지 않는다. 집에도 안오시는 것 같다.

몇달 지나고 오셔서는 몸이 아파 그동안 병원에 있었다며 밀린 몇달치를 주신다.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했더니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암이라고 한다.

깜짝 놀라 괜찮으신거냐고... 누가 병원에 돌봐주실 사람은 있냐니까

그냥 웃으신다. 이제 얼마있다 또 치료를 받으러 입원하셔야 한단다.

 

올해들어서 거의 얼굴을 못봤다. 벌써 4, 5개월은 된거 같다.

집 주인 아주머니 한테 물어보니 그 아저씨 못나올 거 같단다.

집도 이사를 할 거란다. 그럼 어떻게 되시는 거냐니까 전기세 못받았냐고 물어본다.

그렇지요... 얼마나? 한 5개월? 어떻게 하냐고 나한테 되묻는다.

집주인 아주머니 순박하고 뭘 잘 모르시는 분이시긴 한데...

그걸 자기가 주인인데 알아서 해결해야지 우리한테 어떻게 하라고... 참, 무책임하다.

하여간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다.

어느날 남편이 낮에 아주머니가 올라와 윗층 이사갔다고

딸이 왔었는데 밀린 전기세 분할로 갚는다고 했다며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주셨단다.

전화해서 계좌번호 하나 알려주라며...

 

직접 아저씨와 통화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살지도 않았던 딸한테 전화하려니 좀 그렇다.

해봐야 6만원인데 그것도 분할로 입급시킨다니 딸도 살림살이가 그런가 보다.

나이도 20대 초반인데 학생인지...직장다니는지 잘모르신단다.

고민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저... 000씨 되시나요?'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저는 화곡동 사는 사람인데... 저기... 저희 윗층 아저씨...' (뭐라 설명을 해야 하는지...대략 난감.)

'아, 네...'

'아저씨하고는 어떻게 되세요?'  (이미 들어놓고....)

'딸인데요'

'네... 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일단 좀 친근감을 좀 줘볼까?)

'돌아가셨는데요?' (허걱!!! 갑자기 머리속이 하얘지면서 너무 당황을 한 나머지)

'어머... 언제요?'

'두 주 전에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 그랬군요. 많이 상심하셨겠어요. 경황도 없으실텐데... 제가 나중에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냥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아... 저... 그게... 주인 아주머니가 전화를 해보라고 해서...저기.. ' (허둥지둥 허둥지둥 막 줏어다 댄다)

'아, 네... 전기세 때문이시죠?'  (어쩌나...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아... 네... 근데... 지금 경황도 없으실텐데... 제가 참... 전화를 ... 나중에 다시 통화하지요'

'아니예요. 계좌번호 불러주세요. 제가 다달이 2만원씩 보내드릴께요.'

'아... 저...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나중에 제가 이 번호로 메시지보내드릴까요?'

(어떻게든 빨리 끊고 싶다 ㅠ)

'아니, 그냥 불러주세요.' (헐~~~ 어쩌지? 어쩌지?)

'저... 국민은행이구요...(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냐?)  000-0000000 (이럴 때 나는 왜 이런 걸 다 외우고 있어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줄줄 나오냐고오오오오!!!!)

저는 (헉!! 이제 이름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 000 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이달 말부터 보내드릴께요.'

'아... 그러시겠어요?  (뭘? 그걸 원한거면서...) 괜찮으시겠어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건지...촴~~놰) 그럼... 저기...'

'네. 보내드릴께요.'

'아...네... 고맙습니다... 경황도 없으신데...이런 전화를... 저기...'

'네...' 

삐~ 뚜뚜뚜...

 

이게 뭐~~ 야?

에이씨... 정말 짱나... 왜 이런 상황이... 나 정말 왜 이래?

그 아줌마는 왜 돌아가셨다는 이야긴 안해가지구... 우이쒸... 이러면 안되는 거 같은데...

괜히 전화했다...난 몰라 난몰라...

집에가서 아줌마 한테 따져야 할까나? 휴우~~~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고인의 명복이라도 빈다고... 상투적인 말이라도 할걸..

기양 나중에 전화한다고 할걸...

아니... 여유있게... 너그러운 척... 인간적인척...

아, 됐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구요... 조의금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랬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닌가? 그거 쫌 이상한가?

아~~~ 우울하다...

 

얼굴이 하얗고 작은 체구를 가진, 정말 너무 착하게 생기다 못해 좀 안스럽게 생긴

윗층 옥탑방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살면서 얼굴 마주한 건 한 10번이나 될까... 싶지만... 사람이 사는 게 이런 건 아닌데...

 

다음날 문자를 보냈다.

'주인아줌마한테 이야기를 못들어서... 어제는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의금이라고 생각하시고, 전기세는 그냥두십시오."

 

"아저씨... 좋은 데 가셔서 편안히 쉬세요... 명복을 빌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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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비우기

집안 살림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자란 나의 남편.

뭐 곱게 자라서 손에 물 안묻히고 자랐다는게 아니라 워낙 집에서 내논(?) 자식처럼 밖으로만 돌고 집에서 있던 날이 거의 없었단다.


결혼하고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가끔 집에서 대화를 나누면 남편의 입담에 어머니가 유난히 너무 재밌어 하신다. 그래서 내가 여쭤봤다. “이 사람 어릴 때부터 이렇게 농담 잘했어요?“ 우리 어머니의 진지한 답변. ”난 몰라... 난 얘랑 같이 살아본 기억이 없어...“

참내, 결혼 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집에 들어갈까 했단다. 그럼 어디서? 누나네, 형네, 친구네... 누구네 집이 빈다고 하면 그 집 가서 자고  냉장고 뒤져 먹고 씻고, 옷 다 갈아입고 나오고 했단다. 그러다 보니 밥조차 한 번 해 본 적이 없다는 거.

그럼, 놀러가서도 안했나? 캠핑이나 여행도 안갔나?

친구들과 놀러가면 자기는 주로 텐트치고 땅파고, 대형 튜브 불고, 뭐 놀 거리 만들고, 나무해오고, 숯불 피우고, 무지하게 바빠서 밥이나 음식할 틈이 없었단다.


하여간 그래서 살림은 커녕 밥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남편과 내가 1년 반 전에 13년간의 시부모님과의 동거를 끝내고 분가를 했다.

더 이야기하기 전에 가슴에 손을 얹으니 살짝 찔려서 고백하자면, 나 역시 시부모님과 살면서 살림은 몽땅 시어머니가 다해주셨기 때문에 거의 뭐 할 기회가 없었다고나 할까.

분가하니까 청소, 빨래는 어떻게 주말에 몰아서 하든지, 대충 미뤄두고 살 수 있는데 13년간 시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 먹던 습관 때문에 밥 해먹는게 젤 큰 일이었다.

밥은 밤에 쌀 씻어서 예약해놓고 아침에 일어나 국만 얼른 대충 아무거나 끓여서(이것두 아는 게 없어서 네가지 정도만 정해놓고 돌아가며 해먹는다) 먹으니 설거지는 주로 남편의 몫.

때문에 어디가면 자기 손에 물기 마를 날이 없다는 둥, 주부 습진이 점점 심해진다는 둥 앓는 소리를 한다. 설거지도 이젠 습관이 되었지만 첨엔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갠적으로 난 설거지가 정말 싫다)


특히 남편은 음식찌거기를 손으로 만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 

어느 정도냐면 돌이 좀 지난 조카들에게 밥을 먹여줄 때 밥풀과 국물을 질질 흘리는 걸 보면 보통 사람은 가서 닦아주거나 기다렸다 닦아 주거나 아님 그냥 지켜보거나 하겠지만 남편은 으으윽... 이상해...어떻게 좀 해봐... 하면서 도망간다.

(어릴 때 음식 흘린 거에 혹은 찌꺼기에 뭐 상처받은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 음식물찌거기에 의한 트라우마?)


하여 남편은 절대 음식찌꺼기 처리를 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화를 버럭!! 누군 좋아해? 싱크대 수채 구멍에 있는 거 누군 만지고 싶냐고!!

그러자 남편은 몇 번 나한테 구박을 받더니 묘책을 생각해 냈다. “앞으로 음식은 절대 남기지 말고 다 먹자.”

흠... 그건 또 내가 고민하던 건데... 음식물 남기는 건 농사짓는 분들과 요리를 한 사람에게 죄악이고, 자원낭비고, 환경오염이고...

그래서 우리는 찌개나 국을 끓여서 국물까지 다 마시는 전술을 쓴다.

물론 나는 손이 매우 작아서 음식을 할 때 무지하게 조금하고 한 두끼면 싹 먹어치울 수 있게 한다.

그래도 가끔은 건더기가 남기도 하고 냉장고 속에서 상하기도 하니 음식쓰레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절대로!! 는 잘 안된다.)

하여간 그래서, 물론 나랑은 약간 다른 생각에서 시작한 거지만, 우린 음식물 남기지 않기를 둘이 약속했다. 그것도 우리의 작은 실천이다.


그러다 보니 절대 냉장고에 뭐 쟁여놓을 일도 없다.

우리집 냉장고...분가하면서 시누네랑 바꿨다... 별 생각없이 그냥 무거운거 두번 옮기기 그래서... 무지 크다... 여름에 더울 때 거기 들어가 있어도 충분할 만큼.

처음 이사와서 반찬 한두개와 물병을 빼고 냉장고를 채우고 있던 건 밥솥이 없던 상태라 비상식량 같은 국수, 라면... 양념... 등등 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김치통이 들어간 거 빼고는...

상상하시라, 문을 열면 뒷벽이 하얗게 다 보이는 시원한 냉장고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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