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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비우기

집안 살림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자란 나의 남편.

뭐 곱게 자라서 손에 물 안묻히고 자랐다는게 아니라 워낙 집에서 내논(?) 자식처럼 밖으로만 돌고 집에서 있던 날이 거의 없었단다.


결혼하고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가끔 집에서 대화를 나누면 남편의 입담에 어머니가 유난히 너무 재밌어 하신다. 그래서 내가 여쭤봤다. “이 사람 어릴 때부터 이렇게 농담 잘했어요?“ 우리 어머니의 진지한 답변. ”난 몰라... 난 얘랑 같이 살아본 기억이 없어...“

참내, 결혼 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집에 들어갈까 했단다. 그럼 어디서? 누나네, 형네, 친구네... 누구네 집이 빈다고 하면 그 집 가서 자고  냉장고 뒤져 먹고 씻고, 옷 다 갈아입고 나오고 했단다. 그러다 보니 밥조차 한 번 해 본 적이 없다는 거.

그럼, 놀러가서도 안했나? 캠핑이나 여행도 안갔나?

친구들과 놀러가면 자기는 주로 텐트치고 땅파고, 대형 튜브 불고, 뭐 놀 거리 만들고, 나무해오고, 숯불 피우고, 무지하게 바빠서 밥이나 음식할 틈이 없었단다.


하여간 그래서 살림은 커녕 밥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남편과 내가 1년 반 전에 13년간의 시부모님과의 동거를 끝내고 분가를 했다.

더 이야기하기 전에 가슴에 손을 얹으니 살짝 찔려서 고백하자면, 나 역시 시부모님과 살면서 살림은 몽땅 시어머니가 다해주셨기 때문에 거의 뭐 할 기회가 없었다고나 할까.

분가하니까 청소, 빨래는 어떻게 주말에 몰아서 하든지, 대충 미뤄두고 살 수 있는데 13년간 시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 먹던 습관 때문에 밥 해먹는게 젤 큰 일이었다.

밥은 밤에 쌀 씻어서 예약해놓고 아침에 일어나 국만 얼른 대충 아무거나 끓여서(이것두 아는 게 없어서 네가지 정도만 정해놓고 돌아가며 해먹는다) 먹으니 설거지는 주로 남편의 몫.

때문에 어디가면 자기 손에 물기 마를 날이 없다는 둥, 주부 습진이 점점 심해진다는 둥 앓는 소리를 한다. 설거지도 이젠 습관이 되었지만 첨엔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갠적으로 난 설거지가 정말 싫다)


특히 남편은 음식찌거기를 손으로 만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 

어느 정도냐면 돌이 좀 지난 조카들에게 밥을 먹여줄 때 밥풀과 국물을 질질 흘리는 걸 보면 보통 사람은 가서 닦아주거나 기다렸다 닦아 주거나 아님 그냥 지켜보거나 하겠지만 남편은 으으윽... 이상해...어떻게 좀 해봐... 하면서 도망간다.

(어릴 때 음식 흘린 거에 혹은 찌꺼기에 뭐 상처받은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 음식물찌거기에 의한 트라우마?)


하여 남편은 절대 음식찌꺼기 처리를 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화를 버럭!! 누군 좋아해? 싱크대 수채 구멍에 있는 거 누군 만지고 싶냐고!!

그러자 남편은 몇 번 나한테 구박을 받더니 묘책을 생각해 냈다. “앞으로 음식은 절대 남기지 말고 다 먹자.”

흠... 그건 또 내가 고민하던 건데... 음식물 남기는 건 농사짓는 분들과 요리를 한 사람에게 죄악이고, 자원낭비고, 환경오염이고...

그래서 우리는 찌개나 국을 끓여서 국물까지 다 마시는 전술을 쓴다.

물론 나는 손이 매우 작아서 음식을 할 때 무지하게 조금하고 한 두끼면 싹 먹어치울 수 있게 한다.

그래도 가끔은 건더기가 남기도 하고 냉장고 속에서 상하기도 하니 음식쓰레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절대로!! 는 잘 안된다.)

하여간 그래서, 물론 나랑은 약간 다른 생각에서 시작한 거지만, 우린 음식물 남기지 않기를 둘이 약속했다. 그것도 우리의 작은 실천이다.


그러다 보니 절대 냉장고에 뭐 쟁여놓을 일도 없다.

우리집 냉장고...분가하면서 시누네랑 바꿨다... 별 생각없이 그냥 무거운거 두번 옮기기 그래서... 무지 크다... 여름에 더울 때 거기 들어가 있어도 충분할 만큼.

처음 이사와서 반찬 한두개와 물병을 빼고 냉장고를 채우고 있던 건 밥솥이 없던 상태라 비상식량 같은 국수, 라면... 양념... 등등 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김치통이 들어간 거 빼고는...

상상하시라, 문을 열면 뒷벽이 하얗게 다 보이는 시원한 냉장고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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