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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늦은 오후 런던발 급보를 전해들었다. 지하철과 버스에 폭탄이 터져 수십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했단다.

이런 소식은 언제나 날 우울하고 답답하게 만든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고 따위의 분석 이전에 나는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나 힘과 무관하게 당해야만 하는 죽임과 고통.. 그리고 이러한 죽음과 고통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악순환.. 이런 걸 떠올리며 절망하게 된다.

사진에 나타난 표정과 눈빛 때문이었을까?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는 더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저녁내내 답답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글들을 찾아봐도 해답은 없다. 평론가자연 하는 사람들 목소리 높이는 거 아니면 나처럼 답답해하는 사람들 뿐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블레어는 또 지난 몇년동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소리를 반복한다: "우리의 가치와 삶의 방식(value and way of life)"가 어쩌고 "다른 문명화된 나라들과 함께" 어쩌고저쩌고..

또한번의 폭력행사로 인해 서구사회들에서 자유가 그만큼 줄어들 것이며 그 사회들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일상을 살아내야 할 거라는 점 따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왠지 그게 덜 불편하다. 그보다 더 가슴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폭력이 어떻게 사람을 이상하게 (혹은 무섭게!) 변화시키는가에 관한 상상이다.

뉴욕에서, 워싱턴에서, 마드리드에서, 런던에서 그리고 파리 로마 베를린 등등에서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다니는 건강한 보통 사람들.. 이런 방식의 폭력을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뚜렷하게 경험하면서 달라진다. 혹시나 옆에 쭈뼛거리며 앉은 이가 테러리스트는 아닐까; 저 사람 지하철 내리면서 가방 놓고 내렸는데 저거 폭탄 아닌가; 저기 걸어오는 어두운 피부의 중동인들 그냥 놔둬도 되는가,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런던에서 터졌던 것보다 더 큰 미사일에, 장갑차에, 전투기의 공격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던 (혹은 당하고 있는, 그리고 또 당해야만 할) 지구 다른 한켠의 보통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 똑같이 스스로의 내면이 일그러져 가는 경험을 하고 있을 터이니..

철회된 자유는 다시 싸워 얻어낼 수 있다. 치만 일그러진 인간본성을 다시 펴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되찾는 싸움도 힘들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일그러진 본성이 펴지지 않는 한, 그들이 지지하지 않는 한 자유를 위한 싸움도 헛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보이지 않는 가지가지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사람들의 내면은 저도 모르는 사이 찌그러져 가고 있고 그 결과 이 세상도 점점 일그러져 가고 있다. 일그러지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곳.. 이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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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자 혁명

한 영역에서의 제도변화가 어떻게 다른 영역에서의 (초기 의도와 무관할 수도 있는) 결과(repercussion)를 낳게 되는가에 대한 훌륭한 역사분석이자 튀는 비평글. 뉴욕타임스 7월 5일자 칼럼.


이성애자 혁명 (The Heterosexual Revolution)

Stephanie Coontz

지난 일주일은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이들에겐 힘겨운 한 주였다. 먼저 캐나다에서 그 다음에는 스페인의 입법자들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로 인해 동성결혼을 금지시키기 위한 헌법수정을 요구하던 미국 보수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주장을 재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기독교 단체 “가족에 초점두기(Focus on the Family)”의 제임스 답슨은 그러한 금지조항이 없다면 지난 오천년 동안 우리가 알아왔던 결혼은 사라질 것이라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결혼과 가족에 대한 나의 연구 결과들은 나로 하여금 답슨씨에 동의할 수 없게 만든다. 답슨씨의 경고는 삼십여년 너무 늦게 나왔다. 오천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적 결혼은 이미 끝장나 버렸다. 그런데 이 혁명의 선봉에 섰던 것은 게이나 레스비언들이 아니었다. 이성애자들이었다.

결혼을 의무성을 띤 경제적/정치적 제도가 아니라 자발적인 애정관계로 처음 만들어버린 것은 이성애자들이었다. 출산을 선택의 문제로 만들어버린 것도 또 출산이 불가능한 커플들도 임신을 하여 부모가 될 수 있게 만들었던 것도 이성애자들이었다. 그리고 모든 결혼이 가족 내에서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남편과 이와는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하는 아내를 가져야 한다는 오랜 법칙을 뒤집은 것도 이성애자들이었다. 게이나 레스비언들은 단지 이성애자들이 만들어가는 혁명과 새로운 규범들을 지켜보며 이것들이 자신들에게도 맞는 거라 깨달았을 뿐이다.

게이와 레스비언들의 결혼을 위한 초석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누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의 문제를 부모나 국가가 결정할 수 없다는 급진적인 사고를 제기했던, 그리고 미국혁명이 보통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을 위한 결혼”을 포함하는 – “행복의 추구”를 권장하던 이백여년전 처음 놓여졌다. 비슷한 때에 제레미 벤담이나 마르뀌 드 꽁도르쎄 같은 사상가들도 동성간의 사랑이 범죄로 규정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결혼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결혼은 게이나 레스비언들에겐 적용가능하지 않은 두가지 전통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결혼은 한 가족으로 하여금 가내 노동력 증대를 위해 더많은 자녀를 갖게 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역사를 돌아보면, 가진 자들 사이에서는 여자가 출산을 못할 경우 남자가 이혼을 해버렸고 가난한 농민들의 경우 혼전 임신이 여성의 출산력을 보여주기 전까지 결혼은 미루어지곤 했다. 그러나 19세기 피임법의 확산과 함께 결혼한 커플도 아이를 안 가질 수 있게 되었고 20세기 의술의 발전은 임신이 안되는 커플들도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이와 함께 결혼은 출산할 수 있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주장도 약해지게 되었다.

덧붙여 전통적 결혼은 성에 따른 엄격한 노동분업과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의무적인 권력불평등을 부과했다. 봉건 초기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미국의 법은 “남편과 아내는 남편으로 하나가 된다 (Husband and wife are one and that one is the husband)”고 말해왔다.

결혼한 여성의 신분이 남성에 의해 결정되는 법(law of coverture)은 신의 명령과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법은 아내가 법적인 계약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나 자신의 소유를 가지는 것을 금지했다. 1863년 뉴욕의 법정은 아내들에게 독립적인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이 결혼제도를 파멸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불협화음의 씨를 뿌리는 것”이라 경고한 바도 있다.

그러한 법이 강제력을 잃은 후에도 입법자들과 대중들은 결혼관계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1958년 뉴욕상고법원은 (남편과는 달리) 아내는 상대방의 가사나 성생활에서의 의무방기에 대해 고소할 권리가 없다는 전통적인 관점에 대한 도전을 기각했다. 재판관들은 그 근거로 그러한 개인적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아내들에게만 있다는 점을 들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미국의 주들은 가사와 관련된 결정에 있어 남편에게 최종 결정권을 주는 “머리와 주인 (head and master)” 법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결혼에 대한 법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남편에게는 가족을 부양할 의무가 그리고 아내에게는 집을 보고 아이들을 키우고 섹스를 제공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대부분의 주들에서 부부강간을 범죄시하기 시작하였다. 결혼할 때 신부가 “I do”라 말하는 것은 그녀가 평생동안 “I will”이라 말할 만큼의 법적 헌신을 다짐하는 것이는 게 지배적인 견해였다.

나는 전통적 결혼의 옹호자들이 어떤 식으로 그 전통이 무너져내려가는 것에 대해 저항을 해왔는지 알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당시 나는 평등한 부부관계가 결혼제도의 붕괴로 이어질 거라던 극우 반대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제사 하는 얘기지만, 그들이 하는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결혼한 여성에게 독립적인 법지위를 제공하는 것은 이성애적 결혼을 붕괴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남편과 부인으로 하여금 결혼을 상호적인 의무와 협상된 역할(예를 들어 부인이 나가 돈을 벌고 남편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본다든지 하는)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많은 커플들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러나 결혼의 정의나 실행방식을 둘러싼 변화는 게이와 레스비언 커플들이 자신들도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결혼제도는 석기시대 이래 끊임없는 진화의 과정을 겪어왔다. 그 과정에서 결혼제도는 많이 유연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더 선택적인 문제로 자리잡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근래들어 이와 같은 변화의 방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게이와 레스비언 결혼을 금지하는 것을 통해 시계바늘을 되돌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턱도 없는 소리일 것이다.



글쓴이 Stephanie Coontz는 현대가족위원회 공공교육분과장이며 “결혼: 복종에서 친밀함까지, 혹은 사랑이 어떻게 결혼을 정복했는가에 대한 역사”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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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5, 2005
The Heterosexual Revolution
By STEPHANIE COONTZ
Olympia, Wash.

THE last week has been tough for opponents of same-sex marriage. First Canadian and then Spanish legislators voted to legalize the practice, prompting American social conservatives to renew their call for a constitutional amendment banning such marriages here. James Dobson of the evangelical group Focus on the Family has warned that without that ban, marriage as we have known it for 5,000 years will be overturned.

My research on marriage and family life seldom leads me to agree with Dr. Dobson, much less to accuse him of understatement. But in this case, Dr. Dobson's warnings come 30 years too late. Traditional marriage, with its 5,000-year history, has already been upended. Gays and lesbians, however, didn't spearhead that revolution: heterosexuals did.

Heterosexuals were the upstarts who turned marriage into a voluntary love relationship rather than a mandatory economic and political institution. Heterosexuals were the ones who made procreation voluntary, so that some couples could choose childlessness, and who adopted assisted reproduction so that even couples who could not conceive could become parents. And heterosexuals subverted the long-standing rule that every marriage had to have a husband who played one role in the family and a wife who played a completely different one. Gays and lesbians simply looked at the revolution heterosexuals had wrought and noticed that with its new norms, marriage could work for them, too.

The first step down the road to gay and lesbian marriage took place 200 years ago, when Enlightenment thinkers raised the radical idea that parents and the state should not dictate who married whom, and when the American Revolution encouraged people to engage in "the pursuit of happiness," including marrying for love. Almost immediately, some thinkers, including Jeremy Bentham and the Marquis de Condorcet, began to argue that same-sex love should not be a crime.

Same-sex marriage, however, remained unimaginable because marriage had two traditional functions that were inapplicable to gays and lesbians. First, marriage allowed families to increase their household labor force by having children. Throughout much of history, upper-class men divorced their wives if their marriage did not produce children, while peasants often wouldn't marry until a premarital pregnancy confirmed the woman's fertility. But the advent of birth control in the 19th century permitted married couples to decide not to have children, while assisted reproduction in the 20th century allowed infertile couples to have them. This eroded the traditional argument that marriage must be between a man and a woman who were able to procreate.

In addition, traditional marriage imposed a strict division of labor by gender and mandated unequal power relations between men and women. "Husband and wife are one," said the law in both England and America, from early medieval days until the late 19th century, "and that one is the husband."

This law of "coverture" was supposed to reflect the command of God and the essential nature of humans. It stipulated that a wife could not enter into legal contracts or own property on her own. In 1863, a New York court warned that giving wives independent property rights would "sow the seeds of perpetual discord," potentially dooming marriage.

Even after coverture had lost its legal force, courts, legislators and the public still cleaved to the belief that marriage required husbands and wives to play totally different domestic roles. In 1958, the New York Court of Appeals rejected a challenge to the traditional legal view that wives (unlike husbands) couldn't sue for loss of the personal services, including housekeeping and the sexual attentions, of their spouses. The judges reasoned that only wives were expected to provide such personal services anyway.

As late as the 1970's, many American states retained "head and master" laws, giving the husband final say over where the family lived and other household decisions. According to the legal definition of marriage, the man was required to support the family, while the woman was obligated to keep house, nurture children, and provide sex. Not until the 1980's did most states criminalize marital rape. Prevailing opinion held that when a bride said, "I do," she was legally committed to say, "I will" for the rest of her married life.

I am old enough to remember the howls of protest with which some defenders of traditional marriage greeted the gradual dismantling of these traditions. At the time, I thought that the far-right opponents of marital equality were wrong to predict that this would lead to the unraveling of marriage. As it turned out, they had a point.

Giving married women an independent legal existence did not destroy heterosexual marriage. And allowing husbands and wives to construct their marriages around reciprocal duties and negotiated roles - where a wife can choose to be the main breadwinner and a husband can stay home with the children- was an immense boon to many couples. But these changes in the definition and practice of marriage opened the door for gay and lesbian couples to argue that they were now equally qualified to participate in it.

Marriage has been in a constant state of evolution since the dawn of the Stone Age. In the process it has become more flexible, but also more optional. Many people may not like the direction these changes have taken in recent years. But it is simply magical thinking to believe that by banning gay and lesbian marriage, we will turn back the clock.

Stephanie Coontz, the director of public education for the Council on Contemporary Families, is the author of "Marriage, a History: From Obedience to Intimacy, or How Love Conquered Marri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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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타협"에 관해 - 김수행의 글을 읽고 안타까와 함

한 보름 쯤 되었나.. 참세상에 실렸던 김수행의 논설에 대해 다른 인터넷 공간을 통해 쓰고 또 토론하였던 글 혹은 주제. 이곳서 블로그를 만든 연유로 퍼다 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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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을 바꿔야 한다
양극화 해소 없이 '더불어 사는 것'은 불가능

김수행(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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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경제에 대한 최근 좌파의 기본적 입장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좋은 글. 동시에 마음 참으로 안타깝고 불편하게 만드는 글. (내 글 뒤에 복사해놈)

수출의존형 경제보다 내수에 기반한 경제가 노동자 서민들의 삶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되는 것 분명하다. 내수의 발전에 기초한 경제정책은 필연적으로 노동자 서민들의 구매력을 촉진시키는 정책, 노동자 서민들의 주머니를 조금이라도 더 두둑하게 만들어주는 정책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수에 초점을 맞춘 경제정책이 노동자 서민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진보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치만 이 진보성은 한계적이다.

내수가 강화되어야 수출의존형 경제가 가지는 경제의 불안정성을 극복할 수 있고 경제성장의 risk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표되는 내수경제 옹호론의 논리가 여전히 성장 위주의 담론틀 내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은 사실 그리 큰 설득력을 가지진 못한다. "성장신화"가 어느 사회에서나 대체로 노동자 서민에 대한 통제/억압 기제로 사용되어왔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낙오되는 것이 그 대안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제는 발전되어야 하고 생산력은 증대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생산관계의 영역에 해당하는, 경제발전의 청사진을 짜는 일이나 증대된 생산력이 가져다주는 과실분배 등을 둘러싼 decision-making의 문제도 똑같이 고민되어야 한다. 그리고 김수행의 글에서 잘 드러나듯, 이에 대한 남한 진보적 좌파들의 답은 "사회적 타협의 확대"이다.

경제정책결정에서 노동자 서민들의 목소리가 정책결정과정에 반영될 아무런 공식적 통로를 가지지 못한 현 시점 남한사회에서 "사회적 타협의 확대"는 "노동자 서민의 목소리 강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사회적 타협"이란 철학에 기초한 -김수행도 모델로 삼고 있는- "유럽의 선진국"들이 오늘날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본-국가-노동 간의 "사회적 타협"이 궁극적으로는 자본과 국가가 짜고치는 고스톱 판에 노동을 끼워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결정적으로 유럽의 나라들에서 "사회적 대타협"이 가능했고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가 정착되었던 것은 오로지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19세기 유럽 정치사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었던 새롭게 등장하는 민족국가들과 구체제 귀족세력들 간의 갈등,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흡수함을 통해 귀족세력들을 무력화시켰던 국가의 전략, 특히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지도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도입된 민주주의 (귀족세력에 대항한 국가-시민 동맹의 완성), 국가를 기본단위로 삼은 국제(경제)질서의 형성 (이게 얼마나 "거대한 변환(great transformation)"이었냐면, 1차대전 이후 형성된 질서가 wto가 세계경제질서를 평정하기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gatt로 이어지는 국가간 경제질서의 기본틀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00년대 초중반까지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착취의 결과 유럽제국들로 흘러들어올 수 있었던 잉여가치.. 이런 역사과정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사회적 타협"이나 "복지국가"는 존재치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유럽에서의 "사회적 타협"과 유럽식 "복지국가"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과 메커니즘들이 오늘날 발견되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세계경제질서는 명목상으로만 그럴 뿐, 이제 더 이상 "국가간 체제"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WTO는 국가들 뿐 아니라 대자본의 적극적 참여로 구성되며 그 자체로 행정과 사법 기능을 가진 전지구적 단위의 초국적 정부가 되어가고 있다. 반면, WTO의 기능을 담당하는 관료들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한줌도 안되는 목소리 센 나라와 자본가들에 의해 뽑혀지고 있다.

이처럼 국가간 질서를 대체하고 있는 초국적 정치경제 단위들로 인해 개별 국가는 과거와 같은 자율성을 가지질 못하고 있다. 최고 정책결정자가 아무리 아래로부터의 민심에 기초한 경제정책을 수립하려 해도 WTO나 IMF같은 초국적 권력단위에서 안된다 하면 쩔쩔 맬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타협"의 아우라를 제공했던 민주주의는 점차 실종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뽑지도 않은 누군가가 결정한 정책을 강요당해야 하며 설사 그것을 반대한다 해도 반대의견을 제기할 공식통로조차 없는 것이다.

100년만에 새롭게 나타난 또하나의 "거대한 변환"을 우린 목도하고 있는데, 남한 좌파들의 시야는 아직도 100년전의 변환에 가 꽂히고 있는 것이다. 지금 "사회적 타협"을 바라보며 그걸 뒷받침하기 위한 "내수 중심의 경제"를 주장하는 그 정신은 참으로 훌륭하지만, 그 판단근거/분석력의 미숙함과 사고에서의 몰역사성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내수성장은 참 중요하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판치고 국가간 경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의 대외적 자율성(=설사 그것이 초국적 권력단위의 정책기조와 충돌한다 할지라도 자국 시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정책화할 수 있는 능력)의 기초가 내수경제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타협"을 바라보면서 주장하는 내수경제로의 방향전환은 문제의 핵심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사회적 타협"을 가능케 해 줄 역사적 조건들이 고갈된 상황에서, 그리고 이미 오래전 "사회적 타협"을 해냈던 나라들에서조차 그 의미가 무색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주장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수출의존형 경제에서 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내수의존형 경제에서의 trickle-down effect일 뿐이다. 언제부터 좌파의 목표가 더 큰 떡고물이 되어버린 것인지..

문제는 경제와 관련된 정책결정과 수행과정에 대한 통제를 누가 하느냐이다. 일국 단위의 자율적 결정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조건에서 설사 "사회적 타협"이 있다손 쳐도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사회적 타협"은, 올바른 방향타를 가지지 못한 "사회적 타협"에의 기대는 오늘날 좌파에게 필요한 정치적 정책적 목표를 더 흐릿하게만 만들 뿐이다.

그렇다고 내수경제나 사회적 타협의 주장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가지는 현실적 힘 분명 있다. 타협이 피할 수 없는 것임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타협이 목표여서는 원하는 타협의 내용에 근접도 못한다. 타협은 싸울만큰 싸운 후에 주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회적 타협"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비타협적인 투쟁을 이야기하고 조직해야할 때이다. 그러다 보면 자본이 먼저 정부가 먼저 타협하자 할 것이다. 그때 타협하면 된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더 우리가 원하는 방향에서의 타협 내용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타협이란..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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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을 바꿔야 한다
양극화 해소 없이 '더불어 사는 것'은 불가능

김수행(논설위원)


노무현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공동체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숙제"라고 지적하면서, "더불어 사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인식을 함께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날카로운 현실 파악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전환시키고 실현할 때 우리 사회는 지금과 같은 '증오와 분노'를 해소하게 될 것이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다국적자본이 세계시장을 휘젓고 다니는 세계화시대에도 정부 또는 공권력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는 사실을 정책담당자가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주 일어나는 세계적인 금융공황을 보라. 1983년에 일어난 후진국의 외채위기, 1987년 10월의 세계적인 주식시장 공황, 1980년대 말 미국 저축대부조합의 대규모 파산, 1997년의 아시아 전역의 외환금융공황, 1998년 미국 헤지펀드 롱텀 캐피털 매니저먼트의 파산 위기, 2002년의 아르헨티나 금융공황 등등에서 각국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시장에 맡겨 두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각국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금융기관이나 기업을 살리기 위해 누가 자금을 제공했는가? 금융시장도 아니고 자본시장도 아닌 정부가 국민의 혈세인 공적 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노사대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노사 모두가 큰 손해를 보고 경제가 큰 혼란에 빠질 때 누가 이 노사대립을 해소할 수 있을까? 정부 뿐이다. 따라서 '공동체적 통합'에 필요한 현실적인 정책을 '힘이 없기 때문에' 추진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정부는 빨리 물러나야 할 것이다.

'더불어 사는 것'은 노대통령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양극화의 해소가 기업가들과 노동자들 모두에게, 그리고 부자와 서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인식'을 어떻게 심어 줄 것인가?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지금과 같이 수출에만 목을 매달고 있다가는 우리 경제가 계속 침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며 빈곤층을 내팽개치고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의 목을 비튼다. 이리하여 서민의 소비규모는 격감하고 내수산업은 도산하며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를 겪고 있다. 이렇게 되니까 수출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생기고,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함으로써 국내수요기반을 더욱 축소시키고 서민들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수출 증대와 서민 불행의 악순환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점과 우리의 최대 수출시장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2004년에 수출액을 국내총생산액으로 나눈 수출의존도는 37%이고, 수출액과 수입액을 더한 무역액을 국내총생산으로 나눈 무역의존도는 70%이었는데, 이 숫자는 내수기반이 붕괴되면서 2002년부터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미국과 일본의 무역의존도가 20% 정도인 것에 비하면 우리 경제의 무역의존도는 매우 높은 편이고, 따라서 우리 경제는 세계경제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휘둘리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수출시장이 중국과 미국에 너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 대한 수출 비중이 점점 증대하고 미국에 대한 비중이 점점 감소하다가 2004년에는 중국과 미국에 대한 수출이 각각 총수출액의 20%와 17%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시장의 장래가 중국 국내의 사회적 정치적 혼란의 가능성과 미국 정부의 중국에 대한 견제정책에 따라 안정적이지 않으며, 미국 시장에 대한 수출은 항상 미국 정부의 '보복'조치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 경제가 수출에 목을 매달다가는 눈 깜작할 사이에 대규모의 과잉생산과 과잉설비에 부닥치고 1997년과 같은 공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수출 증대와 서민 불행의 악순환을 끊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서는 내수기반을 확충해야 한다. 정부는 국산품에 소득의 대부분을 지출하는 서민들의 소득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경제정책(양극화를 해소하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건강한 일꾼일 뿐 아니라 건전한 소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며,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도 임금과 인격 면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는 비정규직을 폐지해야 할 것이고, 고용효과가 대기업보다 훨씬 큰 중소기업을 보호 육성해야 할 것이며, 빈곤층에 대해서도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에 대해 막대한 공적 자금을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조해야 할 것이다. 이런 내수기반의 확충 위에서 비로소 건실한 과학기술이 발달할 수 있으며 수출의 증대와 국민생활의 향상이 더불어 이루어 질 것이다.

이리하여 양극화의 해소 → 내수기반의 확충 → 경제의 안정적 성장 → 증오와 분노의 해소 → 사회적 타협의 확대로 나아갈 것인데, 이것이 바로 유럽의 선진국들이 걸어온 길이다. 친미주의자들이 칭송하는 미국 사회는 복지수준에서나 범죄수준에서 유럽의 선진국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5년06월12일 11:47:4

참세상에서 펌: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3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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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블로그는 사려깊고 똑똑한 이들의 왕래가 잦은 사랑방 같은 곳인데, 내 글을 읽고 막막하다거나 답답하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평소 막막/답답을 조장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 글에 담긴 문제의식은 그와는 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정세에 관해 나는 갈수록 낙관적이 되어가고 있다.

5년전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이유들은 훨씬 많아졌음을 나는 발견한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혼돈이 증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혼돈이라는 게 "기존 질서" 시스템의 불안정을 말하는 것인 한, 혼돈의 증대는 곧 기존 질서로부터 큰 수혜를 받지 못한 이들에겐 기회의 증대를 말하는 것이라 나는 판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 블로그에 길게 덧글을 썼다. **는 대안과 구호가 없는 것으로 인한 막막함으로, 그리고 결국 "사회적 타협주의"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물었고.. 많은 이들이 비슷한 답답/막막감을 가지는 것 같았다. 나는 희망을 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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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기한 "대안"과 "구호"의 문제에 대해:

뚜렷한 "대안"에 대한 그림이 없으면 무언가 불충분한 것 같은 느낌 저도 있습니다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게 무슨 강박관념 같은 것일 가능성 크다는 생각. 왜냐면.. 대안이나 계획이 있다손 쳐도 그대로 가는 경우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지금 우리가 훌륭한 대안처럼 보는 것들이 아주 우연적인 계기를 통해 improvise된 결과라는 것을, 훌륭한 듯 보였던 대안이 전혀 안훌륭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을 봅니다 (프랑스혁명이나 꼼뮨이 가장 전형적인 improvisation의 결과일 것이며 명백한 대안을 가지고 성공했던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는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지난 겨울인가 여기에도 올려져있었던 howard zinn의 글에서 배워야 할 것 아직도 많은 것 같습니다). 활동가들의 마음을 편안케해주는 효과야 있을 수 있지만, 대안이 있고 없고에 따라 현실투쟁이 영향받는 부분은 극히 미미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91년 5월 권력대안을 둘러싼 논쟁이 떠오르는군요.. --;)

마찬가지로 어떤 뚜렷한 "대안"을 "구호"에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도 상당히 지식인적 마인드가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정치적 투쟁이 사회구조상의 대립과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라 본다면, 자생적으로 터져나오는 구호들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구호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 터져나오는 구호들.. 다양한 삶의 영역들에서 터져나오는 생존권 보장의 구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르짖는 구호, 그리고 삶의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개방 반대의 구호들 외에 어떤 구호가 더 필요한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이라면 혹은 이미 혁명적 정세가 형성된 조건이라면 응당 어떤 대안적 구호가 필요하겠습니다만 과연 그것이 지금 필요한가 혹은 그러한 정세인가에 대해선 또다른 논쟁이 필요할 것입니다).

답답/막막에 대해:

이건 제 의도와 전혀 무관합니다. 김수행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실적 "대안"에 대한 고민(e.g., 사회적 타협론)이 되려 현실투쟁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것 같은 우려는 있습니다만, 저는 지금의 현실이 그닥 우울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한의 테두리를 넘어 전지구적 차원의 그림을 그려보면 지금의 상황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제 글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지금 상황은 백여년전 성립되었던 국가간 시스템에서 벗어나 초국적 정치경제 단위들을 중심에 놓는 시스템으로의 거대한 변환이 일어나는 시점입니다. 근데 백여년전의 "거대한 변환"이 국민국가 단위에서 형성된 아래로부터의 지지/동의에 기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오늘날 "거대한 변환"의 움직임은 아래로부터의 지지/동의를 이끌어내는 절차와 과정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전지구적 저항은 이미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 이것이 이삽십여 년전 유로콤의 고민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99년 시애틀에서 시작하여 퀘벡 밀라노 캔쿤 등등을 거쳐 서구 사회운동 중심의 global justice movement는 올7월 스코트랜드에서의 G8 회담을 깽판놓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알헨티나,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등 남미 국가들과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같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의 반신자유주의 전선은 점차 강고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에콰도르에서의 좌파정권 창출과 함께 남미에서 반신자유주의 블럭의 형성은 이제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네덜랜드 국민투표 결과 또한 새로운 거대한 변환이 가져다 줄 위험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보통 인민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남한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전지구적으로도 아주 모범적인 투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 판단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투쟁의 불꽃을 계속 살려내고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책결정자들로 하여금 바깥에서의 압박과 내부로부터의 압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내수 중심 경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압박은 이런 면에서 유효합니다. 내수가 활성화되어야 외부의 압박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자율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질서에서 주류 신자유주의에 저어하는 국가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내는 것이야 말로 지금 남한에 가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압박을 약화시키는 길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남한의 사회운동은 새로운 "거대한 변환"에 맞선 전지구적인 차원에서의 투쟁과 보다 더 연대를 돈톡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국의 차원을 넘어 전지구적 차원에서 혼돈을 계속 부채질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WTO IMF G8 EU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 바람에 입각해 진행되고 있는 모든 움직임들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대안은 인터내셔널리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사회적 타협주의"에 대해:

혁명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야 ** 말대로 "사회적 타협"은 불가피합니다. 타협은 모든 갈등이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협은 그 자체로 거대한 투쟁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것과 사회적 타협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투쟁의 결과로서의 "사회적 타협"을 바라봐야지 그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것이 "타협주의"일 것입니다)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개진한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라는 게 그닥 투명해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불안정한 전환기, 위기상황은 불투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불투명한 혼란의 상황에서의 improvisation을 통해 인류는, 인민은 끝없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저는 현재의 상황이 전혀 어둡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되려 갈수록 희망의 근거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타협"을 구호로 삼으려는 시도들이 안타까왔던 것입니다. 그게 오히려 투쟁의 불꽃을 잠재울까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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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보는 생각의 변화

변화를 보는 생각의 변화 (Changing Concepts of Change)

Grace Lee Boggs
Michigan Citizen, June 26-July 2,2005

나의 90회 생일이 가까와지면서 나는 내 인생 동안 있어왔던 변화를 바라보는 생각의 근원적인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다.

64년전 내가 처음 사회운동 활동가가 되었을 무렵, 대부분의 급진주의자들 사이에서 혁명적인 변화의 모델은 1917-8년에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였던 러시아 혁명이었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한 러시아가 강제수용소(gulag)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자 국가”였는지, 그리고 1939년 나찌의 폴란드 침공으로부터 시작한 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지지되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급진주의자들 내부는 (때때로는 물리적인)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진보주의자들은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믿었다. 논쟁은 주로 그런 진보가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하는지(개혁) 아니면 노동자들이 국가권력을 획득함을 통해 가능한 것인지(혁명)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생산에서의 지속적인 혁명이나 우리의 물질적 힘의 확장이 진보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는 가운데 미국의 흑인들은 2차 세계대전이 제공해준 기회[역주: 흑인들과 백인들이 같은 부대에 함께 배치되었던 첫 사례가 2차대전이었음. 그 이전까지 흑인병사들은 따로 흑인부대에 배치되었음]를 포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한 국내와 국외에서의 이중 투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떨어뜨려 태평양 전쟁을 종식시켰던 1945년 이후, 인류는 스스로 자신의 행성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자신의 물질적 힘을 확장시켰다는 현실과 마주쳐야만 했다.

인간진화에 있어 이 중대한 시기는 혁명적 투쟁을 바라보는 생각의 중대한 변화를 요구했다. 우리는 더 이상 생산관계에서의 변화만으로 혹은 꼭대기의 권력을 아래로 이전시키는 것만으로 급진적인 사회변화를 사고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변화를 우리 스스로와 제도를 함께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정치와 윤리가 그리고 목적과 수단이 통합되는 과정으로 사고해야만 했다.

1955년 몽고메리에서의 버스 보이콧에서부터 시작된 시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은 서구사회에서 억압받는 집단들이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시작한 첫번째 투쟁이었다. 인간 이하로 취급받던 한 사회집단[역주: 흑인집단]은 전세계가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가운데 분노한 피해자나 반대자의 모습이 아닌, 더 인간적인 새로운 사회의 대변자의 모습으로 새로운 인간형을 보여주며 자신들의 비인간화에 대항해 싸웠다. 그들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방법을 사용해 그들은 세상의 선을 더 증대시켰다. 단지 버스승차에서의 차별해소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랑하는 커뮤니티가 목적임을 마음에 담았던 그들의 운동은 지난 사십년간 미국에서의 문화혁명을 만들어냈던 인간 정체성과 생태운동에 영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이 운동은 [그동안 당연시 여겨지던] 모든 것들을 다시 되돌아보게끔 만들어 주었다: 정부에서의 모든 형태의 위계주의, 교육, 경제와 가족, 인종적/성적 관계, 가부장제, 백인사회, 자본주의, 과학, 기술, 그리고 진보의 의미.

1994년 1월 1일, 원주민 공동체에 기초한 자파티스타는 멕시코 도시들의 무력접수를 통해 전세계 혁명을 꿈꾸는 이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 이런 그들의 활동목적은 권력획득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힘에 기반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방안을 찾기 위한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에 사회의 모든 집단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space)을 만드는 것이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민주노총 대표 루벰 자모라가 (국가로 하여금 대중운동을 대체할 수 있게 만드는) 21세기 혁명을 꿈꾸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권력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힘을 만들어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미래에서 “변화”가 어떤 형태를 띠게 될 지 난 모르겠다. 이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바는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가 점점 병적인 모습을 띠어감에 따라 우리의 이웃들을 다시 우리의 공동체로 불러들이고 우리의 희망을 살아있게 만들기 위한 대안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그를 위해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한국으로 치면 "재야운동의 대모" 격이라 할 수 있는 오랜 좌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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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ING CONCEPTS OF CHANGE

By Grace Lee Boggs
Michigan Citizen, June 26-July 2,2005

As I approach my 90th birthday, I have been thinking about the radical changes in concepts of change that have taken place during my lifetime.

When I became a ‘movement activist’ 64 years ago, the model of revolutionary change for most radicals was the Russian Revolution which established the “workers state” in 1917-8. Radicals struggled with one another (sometimes physically ) over whether Russia, having nationalized the means of production, was still a “workers state” despite its gulags and whether it should be defended in the second World War which began with the Nazi invasion of Poland in 1939.

In those days most progressives believed that the government was responsible for making life better for working people. The debate was mainly over whether these improvements could be achieved gradually (Reform) or only by the workers taking state power (Revolution). Constant revolutionizing of production or expansion of our material powers was viewed as progress.

Meanwhile, American Negroes were seizing the opportunity provided by World War II to carry on the Double V struggle for Democracy, abroad AND at home. After the U.S. ended the Pacific war in 1945 by dropping the atom bomb on Hiroshima and Nagasaki, humanity was faced with the reality that we had expanded our material powers to the point that we could destroy our planet.

This crucial juncture in human evolution required a profound change in concepts of revolutionary struggle. No longer could we view radical social change as a change only in property relations or transferring power from the top to the bottom. Henceforth, we needed to conceive of it as a process that transforms both ourselves and our institutions, that fuses politics with ethics and integrates ends and means.

The civil rights movement, launched by the Montgomery Bus Boycott in 1955, was the first struggle by an oppressed people in Western society from this new perspective. Before the eyes of the whole world, a people who had been treated as less than human struggled against their dehumanization not as angry victims or rebels but as new men and women, representatives of a new more human society. Using methods that transformed themselves and their society, they increased the good rather than the evil in the world. By bearing in mind that their goal was not only desegregating buses but the beloved community, they inspired the human identity and ecological movements which over the last forty years have been creating a cultural revolution in the United States.

These movements have opened up everything to question: all forms of hierarchy in government, education, the economy and the family, racial and gender relations, patriarchy, whiteness, capitalism, science, technology, the meaning of progress.

On January 1, 1994 the Zapatistas, based in communities of indigenous peoples, captured the imagination of revolutionaries all over the world by their armed takeover of Mexican cities - NOT with the goal of taking power but in order to create spaces for all sections of society to enter into non-violent democratic discussion of how to create new infrastructures from below.

In El Salvador Rubem Zamora, President of the Democratic Union, has proposed that instead of struggling for state power (which enables the state to take over the popular movement), 21st century revolutionaries should concentrate on the construction of power from below.

I don’t know, no one knows, what forms change may take in the
future. All we know is that as capitalism becomes increasingly
pathological, as it transforms all our human relations into commodity relations, we must come together to create alternatives to bring the neighbor back into the hood and to keep hope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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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응시


앙리 드 뚤루즈-로뜨랙 (henri de toulouse-lautrec) 1897

거울 앞에 선 누드 (nude standing before a mirror)

 

물랭루즈에 맨날 출근하며 그 곳에서 술을 먹고 그 곳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던 로뜨랙.. 귀족세력이 망해가던 시절의 끝물에 그래도 귀족이랍시고 돈 걱정은 없이 살았으나 어렸을 적 두다리에 병을 얻어 난장이처럼 살던 그는 인생의 아픔에 대해 일찌기 배웠음이 분명하다. 난장이 혹은 불구인 저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그는 호탕한 술꾼행세를 통해 이겨내려 했지만 그가 그렸던 물랭루즈의 그림들은 전혀 호탕하지 않다. 그의 그림들은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의 뒤안에 있는 아픔과 상처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그 아픔과 상처가 가장 절정에 달한 모습.. 자신의 아픔과 상처에 도저히 눈돌리지 못하는, 그걸 있는 그대로 볼 수밖에 없는.. 아니, 그걸 보고 확인해야만 하는 물랭루즈 댄서이자 창녀인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전혀 늘씬하지도, 전혀 아름답지도, 전혀 화려하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여인. 스스로의 모습을 응시하는 그녀의 머리 속으로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치만 대략 알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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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기념: m&l 曰,


 

 

저 눈빛 저 기세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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