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2/02/27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2/27
    차봉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젊은바다
  2. 2012/02/27
    박태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젊은바다

차봉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故 차봉천 (당시 나이 62세 : 1947년~2008년)

 

1947년 2월 21일 경남 남해 고현면 갈화리 출생

1974년 부산시 공무원(행정서기)으로 공무원 생활 시작

1981년 3월 국회 공무원 임용시험(행정7급) 합격 근무

1998년 국회사무처공무원직장협의회 설립 준비위원장

2000년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발전연구회 공동대표 겸 사무총장

2000년 공무원연금법 개악 저지 공동대책위원회 상임대표

2001년 3월 24일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위원장

2001년 5월 7일 공무원·교수 노동기본권쟁취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1년 7월 공무원노조 추진관련 체포영장 발부, 명동성당 농성

2001년 12월 26일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체포·연행

2002년 3월 2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출범

2002년 3월 26일 노조 출범관련 체포영장 발부

2002년 4월 3일 초대위원장 당선 및 인천 산곡성당 및 명동성동 농성

2002년 10월 3일 공무원노조 결성 및 연가파업 주도 혐의로 체포, 구속수감

2003년 공공부문노조연대회의 공동대표

2003년 민주노동당 입당, 강남갑지구당 위원장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갑 출마

2004년 12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일만연대 활동

2006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지도위원

2006년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임원-대의원 직선제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8년 9월 4일 22시 18분 운명

2008년 9월 8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장.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안장

 

[동지의 삶과 죽음]

 

故 차봉천 초대위원장은 1947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였으며, 1974년 부산시에서 공무원을 시작했다. 1981년부터 국회사무처로 옮겨 일을 했는데, 승진과 개인의 영달에 연연하지 않고 부정부패 척결과 공직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동료들로부터 잘못된 일은 못 참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단칼’과 ‘차폴레옹’이었다.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굴종과 굴욕의 시대를 끝내고 진정으로 국민의 공무원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공무원노동자들의 권리와 단결을 위해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발전연구회,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치열하게 실천하였다. 이러한 헌신적 투쟁과정에서 정부의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고인은 암 투병 중 말기에 이르러서도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고 활동하다가 2008년 9월 4일 22시 18분 동지들에게 남은 투쟁을 맡겨둔 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잠들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태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92.08.29 박태순 (당시 26세)

 

주요 경력사항
1966. 9. 12 경기도 출생
1985. 3. 서울 영등포고등학교 졸업
1985. 3. 한신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7. 노동운동 투신, 수원지역에서 공장활동 함
1989. 5. 20 수원 검찰청 점거농성, "폭력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구속, 1년6월 복역 함
1990. 11. 13 부산교도소 출소, 이후 노동운동을 계속 함
1991. 병무청 영장수취 거부로 주민등록 말소, 기무사의 추적을 받음
1992. 수원, 부천 등지에서 노동운동
1992. 8. 29 직장 퇴근 후 귀가 중 행방불명 됨
2001. 2. 15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행방불명 되었던 1992.8.29 21:55경 시흥역(서울기점 17.1km지점)에서 광주행 무궁화호과 충돌 두부파열로 인해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짐.

 

열사의 삶
85년에 한신대 학생운동 참여 87년 노동운동에 투신. 수원 검찰청 점거농성 구속, 출소 후 수원 부천등지 노동현장 활동. 1992년 8월 29일 오후 역곡소재 수영기계(포장기계제작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직장동료들과 간단히 술자리를 한 후 구로역에서 헤어져 시흥동 소재의 친형(박영순)집으로 귀가하던 중 구로역 인근에서 실종 됨. 당시 박태순은 병무청의 영장 수취 거부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이며, 군기피자로 분류되어 기무사의 집중적인 감시와 추적을 받고 있었음. 박태순 실종 후 집에서는 박태순을 찾기 위해 연락 가능한 친구, 동료, 선후배에게 행방불명 사실을 알리고 소재지 파악에 나섰고, 혹시 불신검문에 걸려 군대에 입영되거나 구속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무부, 검찰청, 경찰관계자 등을 통해 확인했으나 박태순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8월 29일을 전후한 교통사고 사망자 중 20대 후반의 사람을 찾기 위하여 구로경찰서, 석수파출소, 인근 병원 등을 찾아 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함. 2001년 2월 15일 의문사진상위원회가 행방불명된 날 시흥역에서 열차사고로 무연고자 처리된 것을 밝혀내고, 벽제 무연고자 납골당에서, 행려사망자로 취급되어 9년 세월을 보낸 열사 유골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