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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작아지려 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니

언제나 존경했고 언제나 말씀을 들었고 언제나 인사했고 언제나 웃었잖아.

그런데 왜 자꾸 네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그러니

왜 그럴까

한국에 오니 왜 이렇게 내가 보잘것 없게 느껴질까

왜 그럴까

그르지마 예쁜아

그때의 행복했던 너도, 지금의 의기소침해진 너도 모두 너.

이 시간을 잘 지내면 풍요로웠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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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본체 2개, 모니터 1개 처분

아쥬아쥬 오래된 컴퓨터 본체 2개와 나름 그시대 앞서갔던 납작 모니터 1개 처분하고 싶은데

그냥 중고가전매장에 갖다드리면 되는 건지, 아닌지

뉴규 좋은 생각 있으세요?

계산해보니 10년 되었네요.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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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수기에 내 마음 담기

2010.10~2012.12

아프리카 짐바브웨 2년의 삶

 

해외봉사활동수기 공모에 내려고 글을 적고 있는데 겨우 에이포 3장에 게다가 크기 12, 줄간격 160%로 써야 한다.

2년의 삶을 어떻게 세장에 채울 수 있지.

내 생각에서 더도 덜도 아니게 쓰고 싶은데 짧은 단어에 비유적으로 내 마음을 담기에는 내공이 부족해서 자꾸 장수만 넘어간다.

 

예전에는 말하는 것이 쉬웠었는데 이제는 말이 내 마음을 온전히 담지 못해 말하기가 꺼려진다.

그렇다고 침묵이 답은 아닌 것 같다.

아무도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지 않았는데 괜히 머리가 커지고 있어서 그만큼 사는게 쉽지 않아졌다.

 

뭘하든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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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음핫.

짐바브웨에서 돌아온지 이제 한달 반이 지나간다.

처음에는 가족, 친구와 못나눴던 그간을 채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그런데 어느샌가부터는 짐바브웨에서 가져왔던 행복하고 따뜻한 마음이 스르르 지워져 알몸뚱이가 된 나는 작은 추위와 불빛에도 금새 울상이 된다.

한국의 날씨에 맞는 알맞는 옷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지금 그저 알몸이다.

춥고, 춥고, 슬프고, 작아진다.

한국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다.

사실 내가 짐바브웨에서 가져 온 가방에는 따뜻한 옷들이 있다.

주민들의 도움으로 2년간 한땀한땀 꿰다 보니 어느새 세상에서 하나뿐인 옷을 지었었다.

그래, 꺼내 입자.

꺼내 입고 나와 세상에 말하자.

 

 

짐바브웨에서의 시간들, 블로그에 정리하며 그간을 돌아보고 내가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보려 한다.

 

아.아.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얍~! ^_^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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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에서의 삶

2011년 7월에 작성했던 유네스코 뉴스 무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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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상태, 사업 내용의 기준은 2011년 7월 15일입니다.

* 사진이 포함된 글은 유네스코 브릿지 블로그 : http://kncu_bridge.blog.me/10129500272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난 10개월 동안 깨지고, 배우고,

그리고 사랑하게 된 짐바브웨에서의 제 삶의 이야기 들어보시겠어요?

 

 

이틀 전 이사를 했습니다. 실은 이사라기보다는 단출한 짐과 함께 새롭게 지어진 옆방으로 옮겨 온 것인데요. 짐바브웨에 온 지 마침 1년이 다 되어가는 시기에 묵은 때를 벗겨내듯, 새로운 방에서 짐바브웨에서의 2년째의 삶을 맞이하게 되어 좋습니다.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이사하기 전에는 왜 그렇게 울상이었나 싶습니다. 기존의 방과 크게 바뀐 것이 없는데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사하게 된 억울한 마음에 새로운 방의 안 좋은 점들이 더 크게 받아들여져서 그랬나 봅니다. 비교하지 않는 마음으로 제 상황을 보니 이제는 오히려 좋은 점들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짐바브웨 생활 초기는 이런 실수들을 반복했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외국생활, 처음 해보는 국제자원활동, 그리고 브릿지 1기.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해보겠다는 욕심이 짐바브웨 생활 초기에는 오히려 독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이런데 짐바브웨는 이러네. 짐바브웨는 다른 곳에 비해 이것이 부족하네. 이런 것이 없네.’ 내가 채우려는 욕심에 짐바브웨가 가지고 있던 자원보다 짐바브웨의 부족한 점들이 먼저 보였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제가 원하는 것을 보던 시기였습니다.

 

 

 

넘어지고 깨지기

 

저는 짐바브웨에서 가장 큰 타운쉽* 중의 하나인 ‘타파라(Tafara-’행복‘을 뜻함)'라는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타파라는 약 8000가구 이상이 거주하는 매우 큰 타운쉽입니다. 마을이 큰 만큼 사람이 많고, 그래서 무엇보다 사람 자체가 자원인 마을입니다. 설문조사 때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영업(Self-employment)**을(자영업은 적당하지 않은 번역 같은데 특별한 용어가 생각나지 않네요.) 타파라 마을의 장점으로 꼽았던 것과도 통합니다. 가용노동인구의 약 90%가 실업자인 이곳에서 self-employment는 살아남기 위해 주민들이 스스로를 단련시킨 삶의 몸부림과도 같습니다.

* 흑인 재정착촌 township 흑인이나 빈민 등을 차별적으로 분리시켜 생겨난 집단거주지

* * 의류재봉, 목수, 용접공, 소매상업 등의 self-employment가 있습니다. 고용의 기회가 적은 만큼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발휘하는데 적극적입니다.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마을에 정착하는 것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짐바브웨에 온지 2개월 만에 좋은 집주인 가족들을 만나 타파라 마을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집주인 아들 칼빈(Calvin)의 도움으로 마을에 들어온 지 약 한 달 만에 국제워크캠프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국제워크캠프는 저와 브릿지 프로그램을 마을에 소개하는 자리이자, 마을 사람들이 한판 놀 수 있는 스포팅 이벤트(Sporting Event)로 치러졌습니다. 이때만 해도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국제워크캠프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젊은 친구들과 함께 우리 마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으며 보내던 초기 3개월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크게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와 친구들 간의 균형 잡힌 관계였습니다. 지역주민 스스로 마을의 변화를 만들어가도록 한다는 브릿지 철학에 대한 저의 잘못된 해석에 갇혀 제 의견을 내기보다 언제나 그들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나보다 마을에 대해서 잘 아니까, 그들은 마을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이 진짜 주민이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어리석었나 싶습니다. 나조차 브릿지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으면서 만난 지 겨우 얼마 되지 않은 친구들이 나의 의도를 이해해주고 나와 모든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니요. 시간이 흐른 뒤에 생각해보니 이 친구들에게는 마을의 변화를 원하는 마음만큼이나 일자리를 얻고 경제적인 안정을 찾으려 했던 마음도 컸던 것 같습니다.

 

 

 

조금씩 눈을 뜨다

 

 

이 때 즈음 시기적절하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브릿지 활동가들을 위한 보수교육 차원의 리트릿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이 덕분에 그간 짐바브웨 타파라에서의 일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내 스스로,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얼마나 균형 잡혀있지 못했다는 것을요. 또한 소수의 친구들과 만난다고 정작 중요한, 지역의 자원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내가 보고 싶었던 부분만 보았지, 마을의 진정한 자원인 주민들을 만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참 예쁩니다. 그들 모습 그대로 믿고, 그들과 함께 변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저의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제 자신을 믿고 주민들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주민을 만나자. 그 과정에 주민이 원한다면 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겠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변변한 프로젝트 하나 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브릿지 1기로서 지역에 대해 알아가고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저는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낯선 지역에서 낯선 사람들과 무언가를 꾸미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친구들에게 저의 변화된 의지에 대해서 전했을 때 그들이 보여줬던 조롱 섞인 반응은 저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넌 후퇴하고 있다.’, ‘30년 후에 지역학습센터 건물이 지어진다고 하면 어떤 주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 때문에 우린 마을에서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그들에게 미안한 만큼 제 마음 속 상처도 컸지만 이를 계기로 많이 배웠습니다. 주민들을 조직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경제적인 이익을 바란 주민들이 저를 중심으로 잠시 모인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함께 변화를 꿈꿨다고 생각했지만, 변화에 대해 말할수록 그들에게 약속하게 되고 그들이 기대를 갖도록 만든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요.

 

 

이렇게 저의 짐바브웨 초기 몇 개월의 삶은 실패의 이야기고,배움의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까지 가서 뭔가 대단한 걸 하는 줄 알았더니, 눈에 띄는 프로젝트 없이 시행착오만 하고 있나.’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활동가들이 성공의 이야기를 적고 있으니, 저 같은 활동가도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한 명 쯤은 있어도 괜찮겠지요? ^^

 

 

 

첫째도 만남, 둘째도 만남... 언제나 만남

 

 

주민을 만나기 위해 성인문해수업이 열리는 마을의 성당(Roman Catholic Church)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짐바브웨에서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알아가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지역 리더들의 모임은 정치적 색깔이 짙어서 외국인에게는 위험할 수 있는 반면, 성당은 그런 위험 없이 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습니다.

 

 

참 더디어 보였습니다. 주민들을 만난다고는 했는데 그냥 이렇게 만나기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천 명이 넘는 교인 중에서 내가 얼굴을 아는 주민은 겨우 몇몇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주민을 알아간다는 차원에서 섣불리 질문공세를 퍼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정착 초기에 지역조사 차원에서 설문조사를 했었는데, 그런 것은 주민들에게 또 다른 약속을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전 그저 친구가 되고 싶었습니다.

 

 

성당에 꾸준히 나가면서 성당(이하 ‘센터’라 칭함)이 실질적으로 주민들의 센터 역할을 해 주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하는 일은 센터 아주머니들과 수다 떨고, 밥 먹고, 그러다가 다른 주민들이 오면 그들과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센터의 다양한 모임에 최대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센터와 마을에 대해서 알아갔습니다. 종교를 중심으로 엮인 튼튼한 조직을 이용하여 유치원, 성인문해교실과 같은 학습 모임이 열리고 있고, 재봉, 텃밭 그룹과 같은 자원활동 모임, 소득증대 모임이 있었습니다. 자원이 충분치 않아 빠르진 않더라도 이들 스스로 변화를 위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좀 뭔가를 하면서 주민을 만나자 싶어 타파라 포토 월드(TAFARA PHOTO WORLD)라 이름 붙인 사진 촬영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센터 내에서 내가 무언가를 하는데 발판으로 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주민들의 삶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보다 사진을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브릿지의 돈을 직접 사용하기보다 작더라도 본 프로젝트를 수단으로 주민들의 돈을 모아 마을을 위한 일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주민들의 사진을 촬영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일대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그들의 이름을 알아갔습니다. 이제 저는 약 200명의 주민들의 이름을 외웁니다. 이름을 몰랐을 때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와 같이 형식적인 인사들을 나누며 스쳤던 인연들에게, 이제는 “굼베제 아주머니, 잘 주무셨어요?”라며 먼저 다가가 인사합니다. 내가 현지어를 사용하는 것 이상으로 주민들이 좋아할 때가 바로 내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때입니다.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라면서 좋아하시고, “내 이름이 뭐라고?”라고 되물으시며 다시 한 번 불러주기를 원하시기도 합니다.

 

 

이름을 알아가니 우리들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친구가 되니 반갑게 인사하게 되고, 포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들과 두 번 인사를 나눕니다. 말로 나누는 인사, 그리고 진한 포옹을 하면서 나누는 가슴의 인사.

 

 

브릿지의 국내 훈련 당시 주민의 삶에 스며드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할 때 주민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그리는 활동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밥 함께 먹는 게 무어 그리 어려울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짐바브웨에 온지 겨우 몇 개월 만에 제 스스로가 그려왔던 기본적인 것들을 잊으며 살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다시금 되새기고 제 삶의 나침반으로 삼는데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마을 안에서 관계가 생기면서 타파라 주민으로서의 진짜 제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민들을 믿는다는 건 그들의 가능성을 본다는 것

 

 

이전에는 똑같이 검은 얼굴의 주민이었다면, 이제는 그들 각자의 다른 얼굴 생김새가 보입니다. 그리고그들의 힘, 그들 스스로의 변화가 보입니다. 그러면서 전 브릿지 활동가로서의 제 정체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국제개발협력, 자원활동이라는 보기 좋은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은 내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아프리카에 온 것은 아닐까? 내 욕심 때문에 오히려 이들 스스로 변화하려는 의지를 허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민들을 조직한다는 이름 아래 그들의 삶에 내가 무례하게 끼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존재 자체가 오히려 이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 그래서 전 제 자신을 낮추어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에 오기 전 주민의 삶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원조에 익숙한 주민들이 우리에게 가질 기대를 낮추어야 한다고 많이들 얘기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제 자신이었습니다. 제 자신을 낮추고 배우려는 마음으로 대하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저를 친구로 받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의 따뜻함이 지금 제가 우리 마을을 사랑하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많은 현지 분들이 얼굴이 하얀 외국인은 돈이 많고 자신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기 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주민들은 이들과 다른 중국인* 루도(Rudo)**를 압니다. 너희 마을은 발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너희 문화를 배우기 위해 왔다. 그래서 나는 현지어인 쇼나어를 배우고 친구가 되려고 한다.’라고 말하는 루도를 압니다. 국제자원활동가의 정체성에 계속 물음표를 던지던 생활 끝에 하얀 외국인에게 갖는 선입견을 깨뜨리는 것, 진짜 친구가 되는 것에 브릿지 활동가로서의 첫 번째 정체성을 세웠습니다.

* 난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계속 얘기해도 주민들은 또다시 차이나, 차이나 합니다. 하지만 저를 중국인으로 보느냐, 한국인으로 보느냐는 이제 제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한국을 알리기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 제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진정 친구가 되려 했던 중국인 Rudo를 떠올리면 그저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실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는 건 그런 따뜻한 온기가 아닐까요.

** Rudo는 제 현지어 이름이며 ‘사랑’을 뜻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자극적인 미디어 속 정보에 홀려 짐바브웨를 에이즈의 나라,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넝마를 입은 아이들이 구걸하는 나라로 상상하고는 했었습니다. 에이즈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영양 상태가 좋은 사람들은 큰 무리 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다양한 영양 섭취는 힘들지라도 끼니를 거르지는 않으며, 한국보다 오히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짐바브웨 사람들입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진짜 아프리카를 보는데 소홀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을 홀려왔던 것 같습니다. 진짜 아프리카를 보고, 진짜 짐바브웨를 보고, 이곳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저는 브릿지 활동가로서의 두 번째 정체성을 세웠습니다.

 

 

 

관계 속 따뜻함으로 치유된 상처를 딛고, 조심스레 전.진.

 

 

주민들의 돈을 모아 마을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던 바램 속에서 시작한 ‘타파라 포토 월드’. 이를 통해 얻는 수익으로 센터의 부서진 의자와 벤치를 수리하는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습니다. 온전히 주민들의 돈으로 시작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사진 판매가 많은 흑자를 내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돈을 모으기 위해 센터 위원회와 다음과 같은 예산 구조를 협의했습니다.

‘사진 판매 수익 : 센터 자금 : 브릿지 = 1 : 1 : 1’

약 2개월 동안 사진을 촬영하면서 미화* 100달러를 벌었기 때문에 위의 예산 구조에 의하여 300달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즉, 사진 수익과 센터 자금 200달러는 주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입니다.

*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짐바브웨 화폐 가치 몰락으로 2008년부터 지폐는 미화를 사용하고, 동전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란드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게 브릿지 철학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면 마을에서 하루 이틀 정도 조사를 한 후에 새롭게 자원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센터에 가구를 기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브릿지 활동가는 조력을 할 뿐입니다. 가구를 새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원을 보고 이를 최대한 활용합니다.

 

 

수리가 필요한 의자와 벤치를 확인하고, 예산 내에서 수리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여 재료를 마련한 후, 센터의 주민들이 함께 모여 가구를 수리하는 워크캠프를 진행했습니다. 이 모두 센터의 자원 목수 엠마뉴엘(Emmanuel)의 조율 속에 행해질 수 있었습니다. 가구를 수리한 두 번의 워크캠프 후 이 모임에 함께 해 준 주민들에게 고맙다고 말을 한 사람도 제가 아니라 엠마뉴엘이었습니다. 주민들은 저의 존재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한 주민은 제게 “너는 여기 왜 왔어?”라고 대뜸 묻기도 했습니다. 이 워크캠프를 추진하기 위해 나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는데 이런 질문을 받아 당황스러웠지만, 곱씹을수록 기분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전기가 끊겨서, 센터에 다른 행사가 있어서, 용접공이 없어서 취소되기 십상인 의자와 벤치를 수리하는 워크캠프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두 번의 워크캠프를 통해 17개의 벤치와 18개의 의자를 수리했습니다. 센터 사람들과 함께 진행했기 때문에 즐거웠다고 엠마뉴엘은 얘기합니다. 함께 하는 것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던 워크캠프였습니다. 또한 센터 유지보수 위원회 의장(Minister of Maintenance)인 쿠리사(Kurisa) 아저씨는 “Men's Club을 만들어서 매주 토요일에 센터를 보수하는 일을 하자.”, 그리고 “직업이 없는 젊은 청년들과 함께 하며 그들이 자연스럽게 일을 배울수록 있도록 하자.”라는 아이디어를 내주시며 사람들을 독려하셨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조직이 탄생되는 건가라는 기쁨에 잠시 들뜨기도 했지만 연달아 두 번의 모임이 취소되는 것을 보면서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워크캠프를 계기로 주민들이 모이고,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알고, 서로를 독려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나 저에게나 의미가 큽니다.

 

 

 

서로에게서 배우며 함께 성장

 

 

센터의 의자와 가구를 수리하는 워크캠프는 이렇게 삐거덕대며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빨리 만들어내기 위해 억지를 부리지는 않습니다. 이 워크캠프 외에도 그들에게는 치열한 그들만의 삶이 있으니, 그들의 삶의 속도, 변화의 속도를 거스르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모임이 그냥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삶을 우선으로 두면서 변화를 꿈꾸는 모임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진짜 삶 속에 녹아들어 오래오래 함께 갈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꾸는 변화

 

 

짐바브웨에 온지 열 달이 지나서야 저는 이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넘어지고 깨지며 생긴 상처가 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진짜 치유는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 저는 이제야 조심스럽게, 주민과 함께 하는 변화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서로에게서 배우며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 이것이 지금 제가 꾸는 변화입니다.

 

 

쿠리사 아저씨가 제안해주신 Men's Club이 조직된다면 센터를 보수하는 일 외에 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안/적정기술입니다. 전기스토브로 음식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전기가 매일같이 끊기는 현상은 큰 고통 중의 하나입니다. 햇볕이 좋은 짐바브웨의 날씨를 활용할 수 있는 태양열 조리기(Solar Cooker), 땔감의 화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있는 로켓 스토브(Rocket Stove)를 만들어 보려 합니다. 센터의 여성 그룹들과는 대안 생리대를 만들어 보려 합니다.

 

 

타파라에는 이미 그들의 탄탄한 학습 조직(학교, 야학, 성인문해교실, 유치원 등)이 있으니, 그러한 지역학습센터를 운영하기보다는 2년째의 타파라 삶은 제가 관심 있는 대안/적정기술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며 즐겁게 지내고 싶습니다. 편리함이 넘쳐나는 한국에선 웬만한 의지 없인 대안적인 삶을 살기 어렵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삶의 팍팍한 조건들이 대안/적정기술을 나누는데 있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너와 나를 믿고 쭈욱~ 가기

 

 

남은 1년, 제 삶의 화두는 대안/적정기술 외에 현지어와 현지음식을 즐기면서 주민들과 더욱 진심으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너무 믿지 말라’, ‘조심하라’는 조언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전 관계를 믿습니다. 상처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전 관계 속에서 행복해하고 치유되는 사람이란 것을 알기에 저의 마음을 믿고 이렇게 가고 싶습니다. 그냥 그게 제가 잘 할 수 있는 거니까요...

 

 

 

2011년 7월 15일

짐바브웨 타파라에서 세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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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넘치는 우리 마을 TAFARA

자연이 넘치는 우리 마을 TAFARA 

막연히 귀농을 꿈꿨던 적이 있다. 귀농만이 살 길이라며, 도시의 삶들을 타박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원하는 길인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생각한 길이었다는 걸, 밭을 가는 것보다 관계 속에서 훨씬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었다.

전 진정 대안적이지 못한 인간일까요? 전 세속에 찌든 사람일까요?

이렇게 나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못했던 때, 어느 분이 말씀해주셨다. '사람도 자연이다.'라고.

그래. 맞다. 사람도 자연.

TAFARA 마을에 정착하던 초기에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다른 활동가들이 그저 부러웠었다.

난 아무리 사진 잘 찍으려 해도 저 나라 사진 한 방엔 그저 올킬이구나. 라며 부러워했더랬다.

우리 마을은 왜 이렇게 큰 거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짐바브웨에서 가장 큰 타운쉽 중의 하나, 적당한 이름 없어 도시빈민지역이라 이름 붙이는 우리 마을.

아마 그 땐 사람이라는 자연을 보지 못했던 때였나 보다.

지금은 사람이 보인다.

이름을 부르고 인사하고 포옹할 때마다 가지각색의 얼굴이 보이고,

같은 흑인이지만 더 까맣거나, 덜 까만 사람들이 보인다.

산등성이처럼 굴곡진 얼굴의 개성이 보이고,

계곡처럼 패인 얼굴의 주름이 보이고,

호수처럼 깊은 눈동자가 보인다.

높다란 산등성이의 웅장함도 멋있지만,

우리가 한평생 만들어나가는 자연, 얼굴들, 관계들. 위대한 삶의 증명들.!!!

사람이 많은 우리 마을. 삶의 위대함으로 넘쳐 나는 우리 마을. 그래. 맞다. 사람도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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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원하는 것

지금 내가 사는 마을인 TAFARA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큰 바람이 되고 싶었다.

것이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나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내 스스로를 낮추고 낮추어,

이제는 잔잔한 물결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들이 너무 소중해서 내가 감히 개인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제가 당신의 삶에 조금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라고 주민의 가슴의 문을 열기 전 공손히 여쭤보기라도 해야할 것 같다.

아마 나의 브릿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떠나간 뒤에도 마을 사람들이 가끔씩 중국에서 왔던 Rudo를 떠올리면 그냥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지길.

사실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힘이 되는 건,

그런 따뜻한 온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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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씨앗.

브릿지 국내훈련 때, 아마 많이들 되뇌어 본 말일 것이다.

'주민의 삶에 스며들기.' 그 때는 암~ 그래야지~! 했던 것이,

지금 8개월 남짓 되는 짐바브웨 삶을 돌이켜보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름을 알고, 친구가 되고, 인사하고, 포옹하고, 함께 식사하고, 기쁜 일 함께 축하하기, 슬픈 일 함께 위로하기...

18명 모두 그리는 브릿지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의 부릿지는 주민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내 모습, 어떤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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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없는 삶

재작년 겨울이었다.

워크나인 친구들과 마포 한 지하방에서 서로의 꿈에 대해 나눈 적이 있다.

그 때 난 '경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었다.

꾸듯,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는데. 내가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나 하고 말한 건지 싶을 정도로, 그냥 내 입에서 툭 터져 나온 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말한 말의 의미를 몸으로 알아간다.

지금 나는 나로 인해, 타인으로 인해, 겹겹의 경계로 둘러싸인 삶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경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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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에서 면생리대를 만들고 있어요!!!

내가 자주 가는 마을의 센터(성당)에는

 

재봉틀로 센터 옷도 만들고, 주문을 받아 옷을 만들어 팔아

 

센터 살림에 보태시는

 

tailoring 아줌마 그룹이 있다.

 

나도 옆에서 바느질이나 하면서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에

 

면생리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 짐바브웨 천가게에서 융 천을 발견한 쾌거가 있었으니!!!

 

으하핳

 

 

내가 바느질하는 모습도 괜히 재밌는데

 

요상한 걸 만드니, 아줌마들의 관심이 높다.

 

시실리아 : "루도, 뭘 만드는 거야?"

 

루도 : "여자들한테 달마다 필요한 거. 피를 흡수하는 걸 만들고 있어."

(생리대가 영어로 뭔지 몰라서,,, 이렇게 설명...ㅎㅎㅎ)

 

루도 : "이걸 하면 일회용 생리대를 사지 않아도 돼. 한 번 쓰고 빤 다음에 다시 쓸 수 있으니깐 돈도 많이 절약할 수 있어. 난 5년 전에 만든 생리대를 아직도 쓰고 있거든."

 

시실리아 : "이걸 다른 여자애들에게 가르쳐주는 게 어때? 생리대를 사기 위해 여자애들은 한 달에 3달러 이상을 쓴다구!! 이건 정말 좋은 아이디어야. 이건 하나의 프로젝트가 될 수 있어. 만들어서 팔 수도 있다구!"

 

으하하...

 

그래서 요새 나의 관심사는 어떻게 센터 여성들과 면생리대를 만들 것인가! 이다.

 

Youth leader 말리안에게 물어보니, 여자애들이 많은 관심을 보일 거라고 하는데...

 

워낙 사적인 것이라 공공연히 말은 못하지만 돈이 없어서 생리대를 못 사는 친구들도 많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아주머니는

 

자기는 생리가 끝났지만, 이걸 하고 있으면 따뜻할 것 같아서 사고 싶다고 하셨고,

 

장거리 여행갈 때 속옷 대신에 교체해주는 용도로 쓰면 좋을 것 같다고도 하셨다.

 

 

그 동안 마을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걸 해야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내가 조그맣게 알고 있던 것에서 출발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그리하여, 1년 반 남은 나의 활동 컨셉을 정했으니! 그것은 바로 "대안!" "얼터너티브"다!

 

배운 게 그거라고,

 

대안생리대 만들고 써 보고, 브릿지 훈련 때도 활동가들과 공유했던 경험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리대 만드는 모임이 잘 꾸려지면,

 

그 후에는 태양열 조리기(solar oven) 만드는 모임을 꾸려보고 싶다.

 

이 역시, 대안기술센터에서 자원활동했던 경험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사는 타파라는 전기도 자주 나가니깐,, solar oven!! 이거이거!! 대박나면 어떡하지??? 으항항...

 

벌써부터 행복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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