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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19
    강희철 열사 - 열사예배 120415
    젊은바다
  2. 2012/04/19
    권희정 열사 - 열사예배 120415
    젊은바다
  3. 2012/04/19
    진철원 열사 - 열사예배 120415(1)
    젊은바다

강희철 열사 - 열사예배 120415

강희철 열사
(1962년~2003년)   당시 41세 사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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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19일 인천 출생
1989년 인천민주청년회 노동분과
1990년 인천민주노동청년회 조직국장
1991년 노동자 문화마당 ‘일터’기획실장
1993년 통일을 여는 민주노동자회 조직위원장, 노동자 통일대 ‘백두’활동
1995년 한국노동운동협의회 조직강화특위 수도권 대표
1996년 평화와 참여로 가는 시민문화센터 사무처장
1998년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본부장
1999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인천연합 조직위원
2000년~2002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조직위원장
2003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정치위원장
2003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도중 뇌출혈로 입원
2003년 4월 13일 41세 나이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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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62년에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지역에서 청년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위해 젊음을 다 바쳤다. 또한 ’00년부터는 전국연합 조직위원장, 정치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평생을 조국의 통일과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의 길에 바쳐왔다.
’03년 전국연합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도중 뇌출혈로 입원한 동지는 미국에게 빼앗긴 주권회복과 진보정치 승리를 위한 그 길에서 동지와 함께 해온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 섞인 방문과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42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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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열사 - 열사예배 120415

권희정  열사
(1973년~1996년)   당시 23세 학생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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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서울 출생
1992년 3월 성신여대 사범대 국민윤리교육과 입학
              제 14대 대선공정선거 감시단 활동
1993년 불교학생회 회장, 시사토론 소모임 ‘물결’ 결성
1995년 사범대 학술부장 활동
1996년 2월 총학생회 정책국장 활동
1996년 4월 7일 ‘합리적 등록금 책정을 위한 재단과의 대화’를 요구하며 단식 및 총장실 점거 농성 중 과로와 단식 후유증으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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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성신여대에 입학한 후 불교학생회 회장, 총학생회 활동을 하며 그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인 활동을 해왔다. 동지가 총학생회 정책국장으로 활동하던 ’96년 성신여대 총학생회는 ‘예결산안 공개’, ‘등록금 소위원회 재개’ 등을 요구하며, 학원자주화투쟁을 시작하였다. 이에 학교 측이 학생들의 요구는 외면한 채 학생들에게 위협을 가하자 그 당시 총학생회 정책국장이었던 동지는 총학생회장과 함께 학원자주화투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각오로 학교 측이 즉각 협상에 나올 것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을 시작하였다. 동지는 단식 도중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감기까지 걸려 가슴이 답답하다는 등의 통증을 호소하였으며, 급기야 4월 7일 새벽 1시경 고대 안암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밤 11시 30분경 갑작스런 심근염으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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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원 열사 - 열사예배 120415

진철원  열사
(1976년~1996년)   당시 20세 학생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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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월 4일 서울 출생
1995년 2월 대원고등학교 졸업
1995년 3월 경원대학교 도시계획학과 입학, 민족사 연구회 ‘한얼’ 활동 시작
1995년 8월 잠시 동아리 활동 중단
1995년 12월 장현구 선배의 사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투쟁이 전개되고 있을 때 다시 활동 시작
1996년 4월 6일 밤 9시 30분 경 총여학생회실에서 분신하여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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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95년 대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원대학교 도시계획학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동아리 민족사 연구회 ‘한얼’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경원대는 ’91년 최원영 재단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고질적인 사학비리와 ’95년 108명 제적 등 무리한 학생 징계, 고발로 사회적 물의를 빚어왔는데, ’95년 12월 4일 분신 운명한 고 장현구 동지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이 4달째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경원 7천학우들은 울분에 차 있었고 동지는 주변선배와 동기들이 고생하는 것을 많이 안타까워했다. ’96년 4월 6일 동아리 회원들과 그간 진행되어온 장현구 열사 투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후 고교선배(고 장현구 동지)의 분신사망과 동아리, 학과의 선배들이 제적, 고발 등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다가 최원영 재단의 살인적 학원운영에 항거, 총여학생회실에서 분신,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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