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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2/11
    한국노총의 이명박 지지
    Justica
  2. 2007/12/10
    동창회 고만 합시다
    Justica
  3. 2007/12/09
    기부를 못하는 이유
    Justica
  4. 2007/12/07
    지도자의 도덕성
    Justica
  5. 2006/02/27
    내공 깊은 이가 이렇게 없는가
    Justica
  6. 2006/02/19
    제8요일
    Justica
  7. 2006/02/16
    지식인의 천박함(1)
    Justica
  8. 2005/12/22
    기억을 위해: 쌍꺼풀의 기원(CNN 보도)
    Justica
  9. 2005/12/14
    언론이 움직이는 법
    Justica
  10. 2005/12/10
    진보에 대한...
    Justica

한국노총의 이명박 지지

한국노총은 본래 그랬다, 원래 수구꼴통이었다는 식의 해석은 부질없다. 그것보다는 존재와 의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존재는 노동자이면서 파업에는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 경제적 약자가 오히려 이명박과 이회창을 지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유난스러운 한국적(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상에 대해서는 좀 더 탐구가 필요할 것 같다. 역사적, 사회심리적 분석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우선, 한국노총의 이명박 지지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이 심각한 괴리를 어찌할 것인가가 더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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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고만 합시다

말이 좋아 옛친구와의 우의를 다지고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지....어디 돈벌 거리나 잡아볼까 또는 인맥이나 쌓아둘까 하는 얼굴이 한 둘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근히 제 자랑에 바쁘고 스스로의 성공에 뿌듯해 하는 자들도 드물지 않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나마 있던 소박한 옛 추억도 다 까먹을 판이다. 안 그래도 바쁜데, 이런 동창회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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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를 못하는 이유

척박한 기부문화를 탓하지 말라. 회원의식이 없다거나 진성...가 없다고 말할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이기적인 소시민 문화 때문에 무엇이 안된다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기부(넓은 의미에서)를 못하는 이유는 돈이 아까와서가 아니다. 그 돈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많고 적고를 떠나, 그게 제대로 쓰인다는 확신만 있다면 전혀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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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도덕성

당선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본인이 시인한 것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이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분이 당선되면 도대체 자라는 애들에게, 삶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그리고 공직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교육을 위한다면 위장전입도, 평범한 건물주인이 모두 다 한다는 절세(?)도, 실정법만 어기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대통령도 그랬는데요 뭘"이라고 하면, "그래도 너는 달라야지"라고 할 수 있을까.   

 

두렵다. 이제 정의와 사회윤리가 어떻게 될까. 어차피 돈과 성공만이 유일한 시대정신이고 그것을 후보가 대변하고 있다면 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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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 깊은 이가 이렇게 없는가

토요일 한 자리에서 아주 유명한 명사(?) 한사람을 만났다. 두세시간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결론은 아주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점이 첫째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도 드러날 법 한 사람이 무엇이 급해 제 자랑에 침이 마를까. 두번째는 놀랍게도 생각의 깊이가 매우 얕다는 것. 사상과 철학을 한다는 이가.... 놀랍다. 이렇게 생각 깊은 이가 없는가. 내공이 깊은 사람을 보기가 어찌 이리 어렵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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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요일

여러 가지 눈이 있을 수 있지만, 순수, 아름다움, ....등의 말보다는 장애의 아픔이 눈에 띈다. '삶의 의미'식으로 로 보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고 안이하지 않을까...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을 연기한다는 역설...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사회적 기능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겠다!)이 그리는 환자의 모습은 누나가 힘들어 돌볼 수 없는 정도로 기능이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기억나는 대사...........

 

마지막 장면

 

"일곱째 날은 하느님이 쉬기 위하여 구름을 만들었고,

여덟째 날은 빠진 것이 없나 생각하다가 조지를 만들었더니 보기에 좋았더라."

 

또,

 

비행기는 타지 않으면 나는 것이 보인다. 매일 비행기를 타던 아리의 삶이 달라진 것을 표현한 것

 

 

 

* 참고

 

제목 :  제8요일 (Le Huitieme Jour / The Eighth Day, 1996)   
97 칸느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
감독 :  Jaco Van Dormael
출연 :  다니엘 오떼유, Pascal Duquenne, 미우-미우   모든 출연진 보기
기타 :  1996-10-26 개봉 / 118분
줄거리 : 

 

 

아리(Harry: 다니엘 오떼이유 분)는 성공한 세일즈 기법 강사이다. 그러나 아리는 자신의 차갑고 계산적인 삶의 태도에 염증을 느끼는 부인 줄리(Julie: 미우 미우 분)와 별거 중이다. 아리는 부인 줄리와 어린 딸들과 함께 다시 화목한 삶을 되찾는 것이 꿈이나 좀처럼 돌아선 줄리의 마음은 제자리로 오지를 않는다. 어느날 아리는 비오는 밤길에 차를 몰고 가다가 우연히 강아지를 치게 되고 그개의 주인은 다름아닌 요양원에서 막 탈출한 다운증후군 환자 조지(Georges: 파스칼 뒤켄 분)이다. 조지는 정신박약으로 요양원에 기거하는데 어머니가 이미 수년전에 죽었는데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어머니를 찾아 다니고 있다.

 아리는 때묻지 않고 순진한 영혼을 가진 조지에게 점점 매료되고 특히 극심한 초코렛 알레르기가 있는 조지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조지와 함께 집으로 가서 팀??선물을 주려고 하나 부인에 의하여 거절당하고 딸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문전박대 당하는 아리, 그를 오히려 조지가 위로하기 시작한다. 요양원으로 다시 돌아온 조지는 재탈출을 감행하고 한편 아리는 가족에게 거절당한 자신에 대해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리의 세일즈 강의 중에 조지는 요양원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교육장소에 나타난다. 아리는 기습한 그들을 보며 빙그레 웃으며 강의는 팽개쳐둔 채 그들과 함께 나간다. 버스를 탈취하여 해변으로 향하는 그들은 아리의 집부근으로 가고 그날이 마침 딸의 생일인 것이다. 조지와 아리는 부인의 집앞에서 밤새 폭죽과 불꽃놀이로 딸의 생일을 축하한다. 이제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해변의 밤하늘을 수 놓은 불꽃들은 얼어붙은 부인 줄리의 마음을 녹이게 된다. 아리는 다시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조지는 친구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쓸쓸히 떠난다. 조지는 빌딩의 옥상에 올라 의사의 금지로 먹지 못했던 쵸코렛을 먹어 발작 상태에 이르고 곧 어머니의 환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곁으로 가기위해 옥상에서 몸을 날리는데 조지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띄며 높이 높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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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천박함

무얼 기준으로 '지식인'을 정의하는지 모르지만, 주위에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자들은 자기 밥벌이용 지식을 조금 더 가진 것 이외에 어떤 다른 특징도 찾을 수 없다.

 

지식을 전수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들의 천박함은 더하다. 최소한의 의무도 다 하지 않으면서 권리를 찾고 섬김을 받으려는 태도는 극악하다. 밥벌이의 기본이 되는 지식도 보잘 것 없는 상태에서 군림하고 누리려는 자세는 실로 참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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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위해: 쌍꺼풀의 기원(CNN 보도)

"한국여성들 미군에 잘보이려 쌍꺼풀 수술했었다"
[연합뉴스 2005.12.22 08:31:24]

(워싱턴=연합뉴스) 박노황 특파원= 미국의 CNN은 21일 한국에서의 쌍꺼풀 수술붐을 소개하면서 이 수술이 한국전 이후 1950년대 도입됐으며 당시 한국 여성들은 미군 사병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백인 처럼 보이길 원했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한국에서의 쌍꺼풀 수술은 마치 미국에서 치열 교정기를 사용하는 것 처럼 흔한 것이며 심지어 한국의 대통령까지 이 수술을 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CNN은 이어 특히 휴가철 쌍꺼풀 수술이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 많은 환자들이 휴가를 내고 수술을 받고 있으며 부모로 부터 쌍꺼풀 수술을 선물로 받고 있다고 말했다.

CNN은 이어 쌍꺼풀 수술을 하는 아시아 여성들에 대해 민족적 정체성으로 부터 등을 돌리려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얘기이며 "성형 수술은 아시아인이건 아니건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에서 처음 쌍꺼풀 수술이 이뤄진 것은 1950년대 보다 20여년 앞선 1930년대로 당시 최초의 미용사였던 오엽주씨가 처음 수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노무현 대통령의 눈꺼풀 수술은 쌍꺼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윗눈꺼풀이 아래로 처지는 '상안검 이완증'으로 시야가 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눈꺼풀의 일정부분을 절개, 봉합하는 수술이었다.

n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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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움직이는 법

최근 황교수 사건을 두고 언론에 대한 말들이 새삼 많다. 어느 한 두 사람의 잘못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얼른 생각해도 우리 나라 언론이 의제를 만드는 방식은 문제가 적지 않다.  

 

시각을 중시하는 언론 매체는 "그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텔레비젼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중요한 의제라도 화면에 비출 것이 없으면 뉴스 시간에 올라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내용 투성이지만 대규모 길거리 시위가 그나마 가끔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그 시각적 효과 떄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기에 영합하자는 유혹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른바 "화면 만들기"용 운동이 대표적이다. 고상한(?) 말로는 퍼포먼스라고도 하는데, 알록달록한 행사를 한다든지 동상에 올라간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9시 뉴스에 보도되어야 한다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볼 때마다 입맛이 쓰다.

 

한국 언론이 움직이는 또 다른 기초는 보도자료이다. 이야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말하고픈 것은 개인이 내는 보도자료 혹은 '자가발전'이다. 이런 자가발전을 식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도저히 기자가 알 수 없을 것 같은 내용이 보도되는 때이다. 어디 '세계적' 인명사전에 실렸다든지, 무슨 학술지에 논문이 게재되었다든지, 정체불명의 상을 받았다는 것 등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개인 동정 난이 아니라 기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황교수는 이런 한국 언론의 속성을 적절히 활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은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결국 언론이 나아지는 것이 바른 길이나. 이런 현상들은 한국 언론의 구조적 문제점 - 전문성, 인력 부족, 이념적 편향 - 으로 볼 때 당분간 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때마다 답답해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한국 언론의 이런 상황에 타협 혹은 야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람과 활동이 언론에 맞추고, 그 결과로 사람과 활동이 달라지는 일만큼은 없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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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대한...

얼마 전에 좌파라는 정당이 이상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일부 자칭 '좌파'들의 애국심(혹은 주의)은 좌파가 본래 지향하는 바와는 서로 어울리기 힘들다.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 를 편드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도 사실 민족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의 부정의와 야만성을 반대하는 것이 본래의 내용일 것이다. 민족은 식민지배의 부정의와 야만이 구현되는 질료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터.

 

황교수 사건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반응은 명맥히 애국심 혹은 애국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온 국민이 월드컵이나 올림픽의 성과에 열광하고, 외국에라도 나갈 짝 치면 삼성이나 현대자동차 또는 한류 '열풍'에 친근함과 익숙함을 넘어 '자랑스러워'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나 언론도 어차피 이런 대중적 정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그러고 보면 문제를 개별화하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좌파'의 태도는 다른 생각거리이다. 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부 자칭 '좌파' 혹은 '진보'가 보수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과연 이를 기묘한 동거상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한국 일부 '좌파'의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 그도 아니면 혹자의 주장처럼 새로운 이념지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비교적 간단하게 생각한다. 애국심과 좌파 혹은 진보는 양립할 수 없다. 좌파를 넓게 정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의미로 정의하더라도 좌파는 진보여야 하고, 그 진보는 어렵더라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현재를 지양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애국이 낄 자리는 그리 넓어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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